모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해온 오래된 미스터리다. 동굴 시절부터 우리는 “함께 있을 때 뭘 먹고 얼마나 말해야 하는가?”라는 실존적 궁금증을 안고 살았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임은 사회적 최적화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실험되고 있다. 본인은 에너지 효율을 최우선해 인간관계의 설계를 극도로 단순하게 유지해왔다. 화려함 따위는 효율적 소비를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적정 인원의 황금비율은 두세 명, 많아야 서넛. 이것이야말로 삶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알고리즘이다.
대화에서 ‘듣는 사람’이 되는 것은 방관이 아니라, 고도로 훈련된 사회적 리액션이다. 누군가가 대화를 주도하면, 나는 정밀하게 타이밍을 계산해 “아, 그렇군요”라는 효과음을 넣는다. 이때 고개를 끄덕이는 각도와 빈도는 거의 프로토콜 수준이다. 이런 리액션 능력을 가진 자는 모임의 생태계에서 최상위 포식자라 할 만하다.
하지만 어제의 모임은 역대 최대 난이도였다. 일곱 명, 최적 인원의 약 175%에 해당하는 수치. 거대한 음식 더미 앞에서, “이걸 다 먹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생존 본능이 발동됐다. 다행히 음식은 풍족하게 남았고, 우리는 도덕과 욕망 사이에서 “적당히 먹기”라는 형이상학적 미션을 수행했다. 남은 음식은 냉장고의 깊은 동굴로 퇴장했다. 술은 음식의 양에 비례해서 소극적으로 소비되었고, 이로써 숙취 없는 다음 날 아침이라는 현대인의 작은 승리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사랑이 출몰한 순간이다. 한 참가자가 ‘누군가에게 마음이 생긴’ 상태로 접속하여 실시간 표정 데이터를 쉴 새 없이 변환했다. 우리는 그를 관찰하며 “인간이란 얼마나 감정에 취약한가”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사랑은 모임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원시적 변수다. 이 변수에 휘말리면 IQ는 눈에 띄게 낮아지고, 모든 서사가 공개 시장에 상장된다. 모임의 구조적 미덕은 바로 이런 실시간 드라마를 매순간 낳는다는 데 있다.
나는 이런 역동적 현장에서 관조적 태도를 유지했다. 말을 적게 한다고 존재감이 희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위대한 사상가들이 증명했듯, 자신의 내면적 고개 끄덕임이야말로 명상의 완성이다. “오늘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는가?” 이 간단한 질문 속에 자기반성의 소우주가 담겨 있다.
결국 모임이 남기는 풍경은 이렇다. 숙취 없는 아침, 냉장고 깊은 곳의 잔여 음식, 사랑의 변동 그래프, 그리고 조용히 사유하는 자아. 승리란, 음식과 감정, 술과 이야기를 균형 있게 소화하면서 살아남는 것이다. 예측 불가능한 드라마와 더불어, 내일의 모임에는 어떤 소우주가 펼쳐질지 기대하는 마음, 이것이 사회적 의식이 끝난 자리에서 얻는 우주적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