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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곽에서 기술을 켜는 마음

멀어진 세계를 따라잡으려는 느린 기술 연습

by 무아제로

보육원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마음이 자꾸 기술 쪽으로 기울어지는 건 아마 오래전 작은 사건 때문일 것이다. 10년 전, 프로그래밍의 ‘프’도 모르던 내가 얼떨결에 기술연구원 같은 곳의 교육 과정에 합격해버린 적이 있다. 지원한 이유도 거창하지 않았다. 그냥 뭔가 배워보고 싶어서, 그 시절 특유의 근거 없는 용기가 있어서. 그런데 합격 발표가 뜨자마자 이상하게 내가 더 놀랐다.


막상 배우기 시작하니 세상은 너무 빠르게 돌아갔다. 전공자들이 가벼운 숙제처럼 풀어내는 것들 앞에서 광고 전공이던 나는 늘 뒤처졌고, 언젠가는 따라잡겠지 하는 희망도 금방 닳아버렸다. 결국 그 교육 과정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실패라기보다는, 내 한계가 어디쯤인지 처음으로 감각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의 좌절이 기술을 멀리하게 만든 게 아니라 오히려 계속 기웃거리게 만들었다. 못 했던 세계를 다시 열어보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지금도 살아 있어서 그림 편집, 영상 제작, 글쓰기 도구 같은 것들을 프로 버전으로 만지작거리며 혼자 놀듯이 배우고 있다.


요즘은 외곽에서 일하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별로 없어서, 사람들이 거의 쓰지 않는 페이스북에 들어가 서울과 해외의 산업 사람들의 생각을 훔쳐본다. 그러다 투자 회사 대표가 n8n이 귀하다는 글을 올린 걸 보고, 나도 괜히 그 귀한 프로그램을 켜보고 있다. 가입해야 하고, 결제해야 하고, 영상 속 화면과 지금 인터페이스가 달라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따라 한다.


결국 나는 ‘언젠가 놀면서도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게으른 꿈을 위해 오늘도 부지런하게 무언가를 만지작거린다. 외곽에 있어도 세상에서 멀어진 게 아니라, 오히려 그만큼 더 멀리 볼 수 있다는 걸 뒤늦게 배우면서.


화면 캡처 2025-11-26 130559.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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