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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단 Jun 08. 2016

강박에 대한 강박

   일본의 현대미술작가 쿠사마 야요이는 너무나 많은 이미지가, 특히 동그란 원이 자신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이미지들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다. 나중에는 그 이미지를 견디지 못해 정신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했다. 사면이 거울로 둘러싸인 방에 점이 박혀 있는 풍선이 가득한 그녀의 작품을 보았다. 본인의 안식이라 했던 호박에도 군데군데 점들이 박혀 있다. 나는 그 이미지를 보며 여기 파멸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그 파멸을 내 방에 밀어 넣고 싶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성기를 내 안에 깊숙이 밀어 넣듯. 아마 나는 짧게 오르가즘을 느낄 것이다. 지금 밖에는 이름 모를 새가 울고 있다. 얼마나 천박히 우는지 문장을 이어 나갈 수 없을 지경이다. 방금 엄마가 말을 걸었고, 샹송이 흐르고 있다. 새는 어느새 울음을 멈췄다. 나는 다시 방을 생각한다. 점에 대한 강박. 점으로 가득한 방. 파멸하는 공간.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본래. 무엇도 가만히 놔두지 못할 곳이겠지. 허겁지겁 이미지를 삼키면 어느새 무수한 점들이 네모난 모양으로 변해있을까. 원으로 가득한 공간 뿐 아니라 사각으로 가득한 공간, 삼각으로 가득한 공간이라면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은 두 팔 벌려 환영하리라. 여기 이데아가 있다! 그러나 쿠사마 야요이는 이데아에 질식했다. 질식해가고 있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나와 쿠사마 야요이가 어떤 공통분모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볼라뇨의 소설에 나온 신부들이 떠오른다. 그의 작품인 <칠레의 밤>에서 성당을 보존하기 위해 매사냥을 하던 신부들의 말로는 그닥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들어간 성당의 신부는 늙어버린 매와 함께 세상의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성당의 종말을 향해 진격하는 비둘기에게 종말을 선물하기 위해 진격하던 매. 그러나 매는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았고, 주인공은 사냥을 그만둔 매를 풀어준다. 늙은 신부는 매가 올라앉은 나무는 유다의 나무라고 말했다. 정말 그것이 유다의 나무였다면 결론은 비둘기가 가득한 세계가 이데아라는 말일 테고, 진실을 격파하기는 힘든 일이므로 매가 비둘기를 다 잡지 못해 비둘기 똥 때문에 성당이 침식당할 것이다. 이데아가 파멸했다! 이데아가 파멸해가고 있다! 신성모독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비둘기 똥이 이데아일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내 방안에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 말고 또 무엇을 넣고 싶은지 생각해 보았는데, 파멸을 방안에 마련해 두고 싶었고, 그렇다면 비둘기 똥이 내려앉은 성당을, 이데아가 이데아를 파멸시키고 있는 것을, 매가 올라앉은 유다의 나무를, 허상이 올라앉은 허상을 놓아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 방 안에는 파멸에 대한 것들이 들어앉을 것이고, 그것들이 여기가 원래 내 자리야 라고 말하며 나를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 파멸을 보지 못한 척 하면서 열었던 방문을 슬며시 닫고 나갈 것이고, 오르가즘을 느끼다 말고 말라버릴 것이다. 방금 엄마가 웃으며 나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고 말을 걸었다. 나는 그 얼굴을 치우고 싶었고, 쳐다보기 싫었고, 글인지 문장인지 소설인지 뭔지에 대한 걸 쓰고 있고, 엄마의 얼굴이, 그 견딜 수 없는 눈길이 나에게 전진하고 있다는 생각에 온 몸이 경직되었다. 한편으로는 그러다 갑자기 후퇴하는 엄마의 얼굴 때문에 이마에서 피가 뛰는데, 그 긴장의 이유가 엄마의 얼굴 때문인지, 오늘 에스프레소를 두 잔을 마셔서이기 때문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나는 엄마를 바라보지 않았고, 다만 잠시 창밖을 향해 눈을 돌렸을 때는 바람에 현수막이 날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현수막을 보며 저 현수막을 떼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고, 왜냐하면 정신 사납기 때문인데, 그와 함께 지금 나오는 옛날 샹송을 꺼버리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가끔 너무나 많은 소리가 나에게 달려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그 모든 소리 위에 창살을 내리 꽂고 싶다는 욕구가, 두 손에 잡히는 형태로 만들어 저 멀리 던져버리고 싶다고, 산산이 부서진 유리조각처럼 만들어 버리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는데, 소리는 아무리 해도 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다만 음악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아니 그보다 더 큰 소리라 착각하고 있는 채로 그보다 더 크지 않은 딱 그만큼의 발소리를 내며, 그것이 음악을 향한 복수니까, 음악을 꺼버리는 수밖에 없는데, 대부분은 그것마저도 하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다가오고, 현수막이 흔들리고, 음악이 들릴 때마다 이 세상이 종말에 가까워지면 좋겠다 느낄 때가 있었고, 아니 늘 느끼는 것 같고, 그렇다면 종말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자면 그것은 무(無)다. 무엇도 없는 공허가 나를 향해 아가리를 벌린다면, 나는 아마 필사적으로 도망칠 것이고,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으로 뛰어들 것이다. 그 설치미술 속으로 숨어들어 영원한 안식을 얻었다 생각하며 호박을 껴안을 것이고, 그러나 그 호박에도 점이 박혀 있는 것을 보며, 이데아가 눈앞에 있는 것인가, 젠장, 시발 소리를 내뱉으며 여기에도 파멸이 있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파멸을 갖고 싶은데 파멸을 마주할 용기가 없으니 유다의 나무 위에 올라앉아야지 하고 생각하면 엄마가 나에게 다가오고, 현수막이 흔들리고, 그렇다, 음악이 어김없이 들리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음악을 끄지 못하고, 현수막을 떼지 못하고, 엄마의 얼굴을 밀어내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모니터만을 바라보며 점, 점, 점, 점들을 생각하다가, 내 안은 말라버리고, 그리하여

   눈을 감는다.


꼭 써보고 싶었던 느낌의 소설이에요

길게 쓰기 어렵긴 한데 재미는 있네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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