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교양좀 있다는 집들은 백과사전 전집을 아이들 책장에 들여놓는 것이 유행처럼 여겨졌다. 인터넷은커녕 개인용 컴퓨터도 보기 어려웠던 1980년대, 컬러 사진과 양장본으로 고급스러움을 자랑했던 나의 학습용 백과사전 전집은 그 안에 담긴 방대한 자료뿐만 아니라 어른도 한 손으로 들기 무거울 정도의 무게를 자랑하며 거실 유리 책장의 로열층을 떠억 차지하며 마치 본인도 세대원인 양 몇 번의 이사에도 우리 가족과 십여 년을 동고동락했던 것이다.
지금도 생각나는 투박하지만 싫지 않았던 책 냄새. 학문과 지식은 태초에 문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고 열두 살짜리의 숙제를 훌륭히 도와주었던 과외 선생님 같았던 백과사전. 하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를 찾는 손길은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업데이트가 되지 않는 치명적 단점으로 인해 종이 백과사전은 무거운 짐덩어리로 퇴색하기에 이르렀다.
10년 전 그날은 이사를 앞두고 짐정리에 여념이 없던 화창한 오후였다. 책장 한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15년이 훨씬 넘은 백과사전은 시간이 멈춘 듯 오래된 사진과 방대한 페이지를 자랑하며 여전히그곳에 있었다. 이 물건을 또 함께 데리고 가기에는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당시에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샀을 책들이지만 이제는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망설이기도 했지만 오래 주저하지는 않았다. 이제 무겁기만 한 책들을 과감히 버릴 순간이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그렇게 비싼 쓰레기처럼 버림을 받고 만 것이다.
당시 빌라 2층에 살고 있던 나는 몇 번의 왕복 끝에 책들을 현관 앞에 내어 놓았는데 이것이 폐지인지 아닌지 확신이 없어서 만약 수거가 안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앉아 있었다. 그때 창 밖에서 흥분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오늘 횡재했네
빼꼼히 내다본 현관 앞에는 폐지 줍는 할머니 한 분이 얼굴에 함박웃음을 띠고 서 계셨다. 그리고는 본인의 작은 손수레로 무거운 백과사전을 모두 옮기기에는 역부족이었는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눈치였다. 내가 버린 백과사전이 폐지 줍는 할머니에게 횡재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조금 전의 걱정이 무색하게 누군가 책 냄새를 맡은 양찾아왔고,밀도 높은 무거운 백과사전은 그에게하루 일당을 한방에 벌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던 것이다.
책을 버린 극심한 후회가 밀려온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부터였다. 소각장 혹은 재활용 분리수거장에서 뒹굴고 있을 백과사전을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아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폐기물처럼 버릴 필요는 없었는데 왜 다른 대안을 생각해보지 않았을까?무겁다는 것은 그만큼 소장가치가 있다는 것인데 20년, 30년 뒤에도 백과사전을 보관하고 있다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었을까? 최소한 중고서점에 내어 놓아서 나한테는 필요 없을지라도 누군가에게 보물이 될 기회를 만들어 주면 좋지 않았을까?무엇보다 종이 기록물에 담긴 인류의 위대한 지식, 인문학, 자연과학, 사회적 가치를 폐기한 것 같아서 기분이 언짢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종이 시대의 거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출판 244년 만에 중단
코즈 사장 “인터넷으로 계속 업데이트… 사라지지 않아” 2012. 3.14. 한겨레
미니멀라이프가 큰 인기를 끌고 나도 거기에 상당히 동조하는 부류이지만, 유서 깊은 오래된 백과사전 전집을 보관하는 것쯤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지 않았을까? 자식이 생기고 보니 책을 엄마의 선물이자 골동품으로 물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후회한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내 손을 떠났고 나는 지금도 종종 그때의 선택을 자책하고 있다. 지금은 단종되어 나처럼 종이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 추억과 향수를 가져다주는 기록물이 되어버린 이 책처럼 얼마나 많은 것들이 또 인터넷 속으로 사라져 버릴까? 어쩌면 브리태니커의 가장 큰 주적은 위키피디아가 아니라, 종이 활자를 투박하고 거추장스럽다고 여겼던 나 같은 독자들이 아닐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