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급 국가직 공무원시험을 치렀던 7년 전,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국어 문제 하나가 있는데 외래어표기법에 관한 것이었다. 2번과 4번 선지를 두고 마지막 마킹의 순간까지 치열하게 고민했는데 정작 내가 정답을 맞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채점 후 대기업 P사 광고에 속았다는 엄청난 배신감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나의 정답 유무는 화려한 피자 광고 속의 탱글탱글한 새우 저편으로 사라진 것 같다.
이 날 이후 나는 쉬림프라고 쓰인 피자나 샌드위치 상품명을 볼 때마다 심한 불편함을 느낀다. 대한민국에서 새우를 뜻하는말이 쉬림프가 아니라'슈림프'가 정확한 표기법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런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또는국립국어원에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럴까?
흔히 공무원시험은 합격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공부라고 한다. 대부분의 시험이 그렇겠지만 뚜렷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 한 수험기간이 경력이나 스펙이 될 수 없기에 국가고시나 전문 자격증에 도전하는 것은 청춘이나 시간을 담보로 한 꽤 용감한 거래임은 틀림없다. 시험을 위한 과목들이 '만약 고시를 포기했을 때 얼마나 유용할까?'라는 질문을 했을 때 공무원시험은? 역시나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기 힘들다. 공무원 시험은 공무원 조직과 많이 닮아서 뭔가 융통성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굳이 비유하면 순수 과목을 공부해서 결정적 변별력을 가진 학생들이 소수점의 차이로 승리하는 엉덩이 싸움이다. 공통과목은 국어, 영어, 한국사. 이 얼마나 친근하고 정직한 학문이란 말인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응당 알아야 할 우리말과 역사 그리고 필수 외국어이다. 그리고 당시 내가 선택한 과목은 행정법과 행정학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나마 참 잘한 선택이었다.
과연 공무원 시험과목은 고시 공부를 그만두거나, 플랜 B를 계획할 때 얼마나 쓸모가 있을까?
(지극히 개인적인 활용도 분석)
국어 ★★☆☆☆
교양 있는 사람인 척하기에 좋다. 브런치 작가를 꿈꾼다면 소소한 자신감 쌓기에도 괜찮다. 그 외에는 오직 공무원 합격을 위한 과목으로 묻어둘 확률이 높다. 합격만을 위한 과목으로 투자하기에는 난도가 꽤 높아서 공부 시간이 억울할 수도 있지만, 자동 맞춤법 검사기 없이도 보고서나 자기소개서, 에세이를 쓸 수 있는 자신감을 키울 수 있다. 한글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수험기간이 끝난 후 한글의 우수성을 찬양하고 세종대왕을 최고의 천재 위인으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된다. 한국인으로서 기본 소양을 쌓은 기분이랄까.
영어 ★☆☆☆☆
공무원 영어는 다른 영어 테스트와는 다른 별개의 장르라고 말하고 싶다. 영어에 꽤 자신이 있는 사람도 초기 진입 시 진땀을 흘릴 수 있다. 회화 문제가 몇 개 출제되기도 하지만 실용 영어와는 꽤 거리가 멀어서 토익과 같은 대중적인 어학시험 점수가 필요할 때 공부한 것이 크게 도움이 안 될 수 있다. 공무원 영어가 선호하는 지문과 어휘는 가끔 안드로메다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생소하고 어려웠는데 익숙해지면 요령이 생기기도 한다. 비실용적이고 학구적인 문제가 주로 출제되기 때문에 '영어를 책으로만 공부했어요'가 가능하다. 당연히 외국인을 만나도 공부한 것을 써먹을 수 없다.
한국사 ★★★★★
한국사는 실무에는 도움이 안 되지만 공부량을 축적해서 다른 채용 시험에 활용하면 참 유용한 과목이다. 많은 공기업과 공단에서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점수를 가산점으로 인정해 준다. 직렬을 바꾸어서 경찰, 소방, 군무원, 임용고시에 도전한다면 지원자격으로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점수가 필수이다. 따라서 공부한 것이 휘발되기 전에 한국사능력검정시험 3급 이상을 취득해 두면 혹시 모를 상황에 효자 노릇을 할 수도 있다. 취업을 위해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인생에 한 번쯤 우리나라 역사를 심도 있게 공부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렵기로 소문난 독립운동투쟁기를 공부하다 보면 처절하고 가슴 아픈 역사에 숙연해지기도 한다. 일본 상품 불매운동에 자연스럽게 동참하게 된다.
행정법 ★★★☆☆
법학을 전공하지 않는 일반인이 법을 공부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기 때문에 행정법은 공부해 두면 고급 상식을 쌓을 수 있고 시야가 넓어진다. 공직에서 가장 활용도가 높고, 민원인을 상대할 때도 도움이 된다. 공무가 아닌 개인적 소송에 휘말리거나 법적 다툼이 생길 시에는 민법이 더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행정법을 공부해도 소송절차나 법리에 대해서 대충 감을 잡을 수 있기 때문에 나쁘지 않다. 공인노무사, 행정사, 변호사 시험 등 전문 자격증 과목에 행정법이 포함되므로 고급 자격증에 도전한다면 행정법을 공부한 것이 커다란 무기가 될 수 있다.
행정학 ★★☆☆☆
행정학은 범위도 넓고 이론도 추상적이라 공부한 것이 금방 휘발된다. 정부가 행하는 정책 및 관리활동을 공부하는 것이니 공무원의 소양으로서는 꼭 필요한 과목이나 일상에서 체감하는 실용성은 매우 낮다. 경영학 같기도 하고, 경제학 같기도 하고 과목에 대한 호불호가 확실한 만큼 공부한 것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는 개인차가 심할 것 같다. 행정사, 사회조사분석사, 공인노무사 등 자격증 시험과목에 일부가 포함되므로 행정학을 공부했다면 심한 거부감 없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