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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파별 Oct 10. 2019

빨강머리 앤 전시회 후기

전시회 관람을 좋아한다. 관람 당시 커다랗게 몰려오는 감동이 금세 수그러들까 아쉬워 곧장 기록하러 왔다. 아무리 사진을 찍어 남기고 노트에 기록해두어도 전시장을 벗어나는 순간 현장의 감동이 큰 폭으로 줄어든다. 그게 언제나 아쉬웠다. 그래서 브런치로 달려왔다.


최근 백영옥 작가의 에세이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을 읽었기에 전시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솟아있었다.


선독서 후전시

작가는 힘든 시절 빨강머리 앤 애니메이션을 보며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그러다 앤의 대사를 받아 적게 됐고, 수동적으로 보고 들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다가오는 대사들을 곱씹으며 작가 본인의 이야기와 앤의 이야기를 감미롭게 섞어 따뜻하게 풀어냈다. 책에 대해 별 기대하지 않았는데, 위로가 되는 따뜻한 문장들이 많아서 좋았다. 힘들 때마다 꺼내볼 듯한 책이다. 현실에서도 앤처럼 맑고 순수하고 정이 많은 친구를 곁에 많이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앤 전시 관람을 앞두고 예습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앤을 만든 캐나다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

앤은 고아였다. 작가는 앤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투영했다. 앤을 만든 캐나다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 또한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고 조부모에게 양육되었다. 직업도 학교 선생님으로 같았다. 허구성 짙은 소설 장르이지만, 결국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기초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의식하기 힘들 정도로 그녀가 창조한 앤이라는 캐릭터는 넘치게 매력 있고 개성 강한 존재였다. 천방지축 발랄함, 슬픔과 기쁨을 큰 폭으로 느낄 수 있는 감수성, 순수하고 맑은 영혼,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무엇보다도, 사랑스러웠다.



 꿈을 가진 고아 소녀

다채롭고 선명한 색감이 마음에 들었던 곳 <LEEGOC 작가님 작품>

이 공간은 무지개 빛깔처럼 알록달록 예쁘고 천진한 앤의 어린 시절이 담겨있었다. 혼자 놀면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가상의 친구까지 만들었던 앤은 어느 날 막역한 사이가 될 진정한 친구 다이애나를 만나게 된다. 내게도 다이애나 같은 친구가 몇 있다. 그 친구와 함께했던 소중한 추억들이 아련히 떠올랐다. 다채로운 색깔로 꾸며진 이 공간은 앤의 생기발랄한 어린 시절에 흠뻑 빠져들게 했다.


코르셋 이야기

앤이 살던 시대에 유행했던 옷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허리를 특징 있게 조은 형태다 보니 숨쉬기가 힘들어서 불편했음에도 꽤 오랫동안 '코르셋'은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호흡이 힘들어 산소부족으로 쓰러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앤에게는 드레스를 입은 채 가냘픈 모습으로 쓰러지는 것에 로망이 있었다고 한다. 패션의 전환점은 전쟁이었다.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면서 여성이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고, 옷은 점차 편리한 형태로 변해가서 투피스, 코트 드레스, 밀리터리 룩들이 탄생했다. 1920년대에는 샤넬, 랑방 같은 브랜드가 생겨나면서 코르셋은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현대에는 옷 유행이 빠르게 변하는데, 과거에는 유행 속도가 느렸다는 점에서 세상이 많이 빠르고 복잡해졌다는 걸 생각해보게다.



빨간색 콤플렉스

앤의 콤플렉스를 다룬 공간. 이 곳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박유나 작가님 작품>

온통 새빨간 강렬한 공간을 마주했다. 앤의 콤플렉스를 그림과 형상으로 표현한 곳이었다. 앤의 콤플렉스는 빨간 머리색이었다.

빨강과 검정을 활용해 빨강머리 콤플렉스로 괴로워하는 내면 심리를 그림으로 참 잘 표현했다는 감탄이 들었다. 자신의 머리 색깔이 싫어 검은색 염색도 시도했지만 되려 초록색 머리가 되어 더 보기 싫은 모습이 되어버린다. 엉엉 울고 나서는 단념한다. 앤은 빨강머리를 가진 자신의 모습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임으로써 콤플렉스를 극복한다. 세계 인구의 1~2%가 빨강머리를 갖고 있는데 실제 서양에선 이와 관련한 편견이 있다고 한다.  불같은 성격, 신랄한 말투, 성적으로 열정적이고 생기가 넘치는 사람으로 인식된다고 한다.

?.. 내 콤플렉스는 절대 0g이 아니다..

앤 : 빨강머리 = 나 : (         )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고 누구나 부족한 점이 있다. 특히나 우리나라처럼 남들과 다르면 색다른 시선을 보내는 문화권에서는 콤플렉스의 무게가 더 클 것 같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종이에 적고 빨간색 지우개로 지운 뒤에 글자가 흡수된 지우개 가루 무게를 저울에 매달아본 뒤 통에 버리는 재밌는 체험이 있었다. 참신했다. 0g이 나와서 당황했다. 열등감 많은 사람인데 말이다. 어쨌거나 유쾌한 위로였다. 



파란색 같은 친구, 길버트

앤의 두 번째 친구는 같은 반 남자아이 길버트이다. 로맨스가 펼쳐지겠거니 했는데, 아슬아슬 이어진 기대 끝에 남사친으로 남아서 아쉬웠다. 빨강머리 콤플렉스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관계 초반에 '홍당무'라고 놀렸다가 사이가 틀어진다. 콤플렉스는 남을 의식하다 보니 생기는 것이지만 정작 타인은 나처럼 예민하게 여기지 않는 게 참 아이러니다. 누구나 다른 지점에서 예민하다. 홍당무 놀림으로 어긋난 관계는 꽤 오래 유지되었고, 성적도 둘 다 비슷했기에 서로는 경쟁하는 관계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은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었고 콤플렉스를 극복한 앤은 끝에 길버트와 화해한다. 앤은 빨강, 길버트는 파랑 같았다. 서로는 반대에 놓인 색깔을 가진 존재이지만, 둘의 과감한 만남을 통해 더 새롭고 멋진 그림이 나올 수 있는!

<KATE 작가님 작품>


초록색 지붕 아래 한 가정

<안소현 작가님 작품>

초록 지붕 아래 살고 있는 매튜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  부부가 앤을 입양한다. 앤과의 만남을 통해 이 부부에게는 변화가 찾아든다. 매튜는 원래 사교성이 부족하고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앤과 함께 살면서 마음을 표현하는 법,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우게 된다. 마릴라는 경직되고 냉정한 사람이었지만 역시나 앤을 통해 웃음 많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간다. 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 가정에는 초록빛 안락함과 평화가 깃든다. 타인은 지옥이다 라는 웹툰과 드라마가 인기였다. 제목에서 많은 부분 공감된 게 사실이지만, 더 넓은 관점으로 보면 '타인'은 지옥의 경험과 천국의 경험을 동시에 주는 존재다.




테마 색깔을 따라 앤의 일생을 살펴본 전시였다. 화가 각자의 개성이 살아있는 일러스트 작품들을 즐겁게 둘러보았다. 인의 일생을 들여다보는 건 결국 거울을 마주해보는 것과 같다. 앤을 통해 나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세상에 지쳐 힘들 때마다, 잠재된 콤플렉스가 아리게 건드려질 때마다 앤을 찾을 것 같다. 좋은 친구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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