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x) =cos x + i sin x, 다양성은 생명 존중
가장 아름다운 공식
공식이 아름답다니? 수학에는 수도 없이 많은 공식이 있다. 공식이란 주어진 조건 아래에서 결과를 함축시켜 놓은 것이다. 쉬운 예를 들면 직사각형의 면적은 가로 곱하기 세로, 원의 둘레는 지름 곱하기 파이(또는 3.14) 등 실생활에서 필요한 공식도 엄청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공식 하나하나를 완성하고 입증하고 실용화하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수학자들이나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다. 그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그 공식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별 수고를 하지 않고도 너무도 편리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이익은 왕서방이 가져간다나? 왕서방의 곰처럼 누가 억지로 시킨 것도 아닌데 수학자들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결과를 공유하고 있다. 그 결과 인류는 바람직하든 못하든 오늘날의 문명을 즐기고 있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 했던가? 수학자들은 진실로 대가 없이 온전히 주는 보시에 익숙한 사람들 같다.
‘시가 아름답다’라는 말은 많이 한다. 아름답다는 것은 시를 이루는 단어들의 조합이 운율에 맞아 아름답게 들리는 경우도 있겠지만, 적은 단어를 사용해 많은 의미를 함축할 때, 또는 단어 하나하나가 심금을 울릴 때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공식이 아름답다는 것은 단순하면서도 그 의미가 강력한 것이라고 하면 안 될까? 예를 들면 에너지는 질량에 광속의 제곱을 곱한 것과 같다는 의미의 E=mC^2 같은 공식. 하지만 이 공식은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그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인류에게 주는 데 공헌을 했기에 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이 공식이 없었다면 아마도 원자폭탄이나 핵발전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힘은 질량에 가속도를 곱한 것이라는 F=ma는? 허긴 뉴턴이 발견한 이 공식도 음양으로 쓰임이 너무도 다양하니! 아무튼 인류의 문명에 지대한 역할을 한 아주 단순한 공식이다.
앞서 자연수부터 시작하여 실수까지 그리고 복소수까지 살펴보았다. 자연수를 대표하는 수는 바로 1이다. 이것은 하나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하나가 있기에 또 한 번 더 더할 수 있다. 그것을 둘이라 부른다. 여기에 또 하나 더하면 셋이라 한다. 이처럼 1에서 비롯된 수를 자연수라고 한다. 1에 1을 더한 것을 2라 하고, 여기에 또 1을 더한 것을 3이라고 한다. 이후 연속적으로 더하면서 자연수 4, 5, 6 등이 무한히 나온다. 이렇게 나오는 모든 수를 자연수라고 한다. 0은 정수를 대표한다. 0은 없다는 것이다. 주었다가 도로 뺐으면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준 것은 자연수이고 뺐은 것은 음의 자연수라고 한다. 그래서 0을 중심으로 좌우로 음의 자연수와 양의 자연수를 배열할 수 있다. 이처럼 정수는 0과 음의 자연수 그리고 자연수로 구성된다. 0은 없다는 뜻이지만 없다는 것이 존재한다.
π는 원주율을 뜻하는 무리수이다. 원의 지름에 이 π를 곱하면 정확하게 원의 둘레가 된다. 즉 지름이 1인 원의 둘레를 펼치면 그 길이가 바로 π이다. 무리수 π는 정수의 비인 분수로 나타낼 수 없는 소수로 일정한 순환마디가 없이 무한히 전개된다. 자연상수라고 부르는 e도 무리수이다. 이 수는 정확하게는 자연수 n이 점점 커질 때 수 (1 + 1/n)^n이 최종적으로 다가가는(또는 수렴하는) 그 값(또는 극한값)으로 약 2.718281828459045에 가깝다.
스마트폰에 있는 계산기 어플을 이용해 n을 1에서부터 차례로 크게 하면서 (1 + 1/n)^n의 값을 구해보라. n=1이면 당연히 2이고, n=2이면 9/4로 2.25이다. n=3이면? 등등 구해보면 점차 어딘가로 다가가는 것이 보일 것이다.
0이 아닌 모든 실수는 제곱하면 양수가 된다. 그런데 음수가 되는 수가 또 있다. 이러한 수를 대표하는 수는 제곱해서 –1이 되는 수이다. 이 수는 절대로 실수는 아니므로 허수라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라고 나타낸다. ⅰ는 제곱하면 –1이 된다. 즉 i^2=-1. 그래서 마치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가정이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듯이 실수와 허수를 결합하여 복소수라는 더 넓은 개념이 나왔다. 복소수란 실수 a와 b에 대하여 a+ib와 같은 형태의 수를 말한다. 실수가 직선에 대응한다면 복소수는 평면에 대응한다. 이것을 수식으로 나타내면 a+ib와 같은 형태의 모든 수의 모임으로 다음과 같다. 여기서 x, y∊R이란 x와 y가 실수라는 뜻이다.
{x+iy | x, y∊R}
모든 복소수 a+ib에 대하여 대응하는 원소가 평면 위의 점 (a,b) 단 하나에 대응하고, 평면 위의 모든 점 (a,b)에 대하여 대응하는 복소수 a+ib가 반드시 하나 있다. 예를 들어 평면 위의 좌표 (3,4)와 복소수 3+4i는 서로 대응관계이다. 그래서 복소수와 평면은 일대일 대응이 되어 서로 같다. 왼쪽을 복소평면, 그리고 오른쪽을 좌표평면이라고 부른다.
{x+iy | x, y∊R}={(x, y) | x, y∊R}
서로 전혀 공통점이 없는 이들 수 1, 0, e, π, i 들이 어울려 결합한 공식이 바로 오일러 등식이라고 알려진
e^(i*pi)+1 = 0
이다. 이 얼마나 단순하면서 명쾌한 결과인가! 완전히 다른 다섯 가지가 어울려 서로 창조하는 것이 보이는가? 이 얼마나 깔끔하고 아름다운가? 다양함이야말로 각자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고, 이로 인해 새로운 생명이 창조되는 거 아니겠는가?
오일러 공식
지수에 거듭제곱한 e^x는 2.718에 가까운 e라는 수를 거듭제곱한 것으로 그 수는 물론 실수이다. 그런데 e^(ix) 처럼 지수에 허수를 거듭제곱한다는 이 의미는 무엇인가? 실체가 없는 허수를 거듭제곱하다니! 이것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공식이 다음과 같은 오일러 공식이다.
e^(ix) =cos x + i sin x
어? 이게 뭐야? 삼각함수가 나오다니! 더 어려워졌네! 이 책은 수학책이 아니므로 그냥 인정하자. 분명한 사실이니까. 그래도 이해를 좀 돕기 위해 이것을 평면 위에 그림으로 나타내 보자. 좌표평면에서 흔히 x에 대응하는 축을 여기서는 실수축, 그리고 y에 대응하는 축을 허수축이라고 한다.
반지름이 1인 원 위의 중심각 x에 해당하는 점에서 직각삼각형을 그려보자. 그러면 cos x는 밑변의 길이를 빗변의 길이로 나눈 것이고 sin x는 높이의 길이를 빗변의 길이로 나눈 것이므로, 밑변에 해당하는 실수축의 크기는 cos x가 되고, 높이에 해당하는 허수축의 크기는 sin x가 된다. 오일러 공식 e^(ix) =cos x + i sin x에 의하여 e^(ix)는 원점인 O을 중심으로 중심각 방향의 크기가 1인 점이다. 한 바퀴 이상을 돌게 되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니 f(x)=e^(ix)는 중심각 x에 따라 반지름이 1인 원 위를 이동하는 함수로 2π의 주기를 갖고 있다. 단, 조심할 것이 있다. x가 한 바퀴 돈다는 의미는 0에서 360도가 아니라 0에서 원둘레의 길이인 2π까지 이다. 이를 호도법이라 한다. 호도법? 에이, 그냥 잊어!
오일러 공식에 x=π를 대입하면 오일러 등식
e^(i*pi)+1 = 0
이 성립한다.
다양한 것은 좋은 것이여
오일러 등식은 서로 다른 것들이 모여 새로움을 창출한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는 정말이지 너무도 다양하다. 너무도 다른 것들이 하늘, 땅 그리고 물에서 살아간다. 서로가 연계되어 한 개체의 죽음이 다른 개체의 생명이 되면서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생태계가 건강하게 유지된다. 비록 인간이 개입되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환경을 이용해도 이러한 생태계는 잠시 파괴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회복하여 지구는 큰 변함없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며 건강하게 지속되었다.
가까운 예로 농사와 가축을 보자. 비록 농사가 환경에 영향을 미치지만 예로부터 농사를 지을 때는 단일한 작목만 기르지 않고 이것저것 다양하게 함께 심어 길렀다. 가축을 키워도 한 종류만 기르지 않고 다양하게 키웠다. 작물과 가축을 키우기 위해 특별히 사료가 필요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비료가 필요하지도 않았고 그리고 특별히 약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한쪽이 병이 들어도 다른 쪽은 건강했다. 서로 다른 개체가 서로 다른 개체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어 특별히 버릴 것도 없이 자연의 순환이 가능해졌다. 모든 것은 이른 시간 안에 다 썩어 자연으로 되돌아갔다. 이른바 다품종 소량생산이며 소농을 일컫는다. 소농에서는 다양함이 잘 굴러간다.
자본주의의 발달로 모든 것이 이익 우선으로 되어 버렸다. 여기서 이익이란 자본을 가진 자의 단기간의 이익을 말한다. 짧은 기간에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다품종보다는 단일품종으로 나가야 한다. 대단위 농토에 한 품종만 심는 것이다. 제한된 구역에 동일한 가축을 밀집시켜 사육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건비를 포함하여 유지하고 관리하는 비용이 훨씬 덜 들어 단가가 싸지고 대량 판매로 이윤은 높아진다. 여기에 큰 도움을 준 것이 과학의 발달이다. 자본주의와 과학은 공생하며 이윤을 창출했다. 대가는 비료와 약품의 대규모 남용 그리고 유전자 조작으로 인해 발생한 회복이 거의 불가능한 자연의 파괴이다. 이익은 단기간에 소수의 개인에게 돌아가는 반면 피해는 오랜 기간에 걸쳐 불특정 다수에게 돌아간다.
대규모의 토지가 필요하므로 수많은 소농이 사라지고 대신 극히 일부 농부들만 기업농의 직원으로 전락한다. 다른 많은 농부들은 어디로 갈까? 또 다른 도시 문제를 일으킨다. 같은 종류의 비료를 뿌리고 같은 종류의 실충제를 사용한다. 토지는 황폐화되고 주변 환경은 극도로 나빠진다. 그러면 또 향상된 비료를 뿌리고 개선된 살충제를 뿌린다. 이러한 반복에 누가 승리할까? 자연일까? 아니면 인간일까?
가축도 단일품종 대량생산으로 한다. 넓은 곳에서 자라던 가축들은 좁은 공간에서 많은 수가 함께 생활한다. 심지어는 성장촉진제를 주어 빨리 자연에 반하는 빠른 성장을 이루게 하고 심지어는 가두어 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 근육은 없이 살만 찌게 한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와 병을 막고자 항생제의 남용은 물론 대량의 분뇨 등으로 인해 주변 환경은 썩어간다.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배설물이 엄청나게 모여 오히려 환경을 파괴한다. 생명이 아닌 물건으로서 단가는 싸지고 수요는 많아지고 이익은 늘어가지만 이 모든 이익을 상쇄할 만큼의 자연환경의 피해는 고려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이익은 자기 것이고 피해는 남의 것으로 후에 피해가 발생하면 그것은 세금으로 처리할 테니!
이 세상에 남자만 사는 것보다는 남녀가 같이 있는 것이 좋고, 사람만 사는 것보다는 동물도 함께 사는 것이 좋다. 동물도 사람이 필요한 동물만이 아니고 야생에 스스로 독립해 살아가는 다양한 동물이 함께 사는 것이 생태계에 바람직하다.
사회도 같은 의견만 있는 그러한 고리타분한 사회보다는 다양한 의견이 있고 서로 존중받아 시너지 효과가 발휘되는 그런 사회가 훨씬 진보적이고 생명력이 있다. 오직 자신의 의견만 중하고 남의 의견은 무시하는 그런 폐쇄적인 사회는 음침하며 발전이 없다.
종교도 다양한 것이 좋다. 하나의 종교가 그 사회를 지배하면 다양한 생각이 나올 수 없다. 성(性, gender)도 꼭 수컷과 암컷으로만 국한할 필요가 없다. 자연을 보면 암수 한 몸인 경우도 흔하다. 사람은 아주 오래전부터 태어날 때 오직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출생하는 것은 아니다. 외모는 여자 같지만 하는 짓은 남자 같고, 반대로 외모는 남자인데 행동은 여자 같은 사람도 많이 있다. 이것이 성적으로 심해지면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심지어는 양성을 모두 좋아하게 된다. 이것을 요즘 말로 성적 소수자라고 한다. 이것은 치료할 성질의 병이 아니다.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다. 특별히 그들이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도 않는다. 오직 전통적으로 박해를 받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박멸되지도 않는다.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주류인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억압할 필요가 있는가?
지금은 당연하지만 과거에는 용납되지 않는 것이 많이 있었다. 대표적인 곳이 노예제도이다. 과거에는 노예제가 당연한 것이었다. 노예 해방을 부르짖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여성 참정권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에는 여성에게는 참정권은 물론 경우에 따라 재산권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성소수자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에 그들의 성적 취향은 허용되지 않았고 심지어 심한 처벌을 받았지만 이제는 바뀔 수 있다. 성이라고 꼭 여성과 남성만 있는 것보다는 보다 다양한 성이 함께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사람이 사는 사회는 공동체이므로 다양한 생각을 서로 존중해야 한다. 그러한 면에서 오일러 등식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 자연수, 정수, 유리수, 무리수, 실수, 그리고 허수를 포함한 모든 것을 허용하니 완전히 다른 그들이 서로 결합하니 또 다른 서로를 만들어 낸다.
다양한 것은 좋은 것이다. 주류의 목소리만 내지 말고 비주류의 소리도 듣자. 재판에서 판결은 다수의 의견을 좇겠지만 소수의 의견도 필요하니 기록에 남기는 것이다. 오늘의 상식이 내일의 비상식이 될 수 있다. 오늘의 틀림이 내일은 옳을 수도 있다. 인간이 하는 일치고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 모두 상대적이다. 그래서 서로 존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