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온 남편에게 아기를 맡기고 외친다.
“여보 나 설거지한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을 것이니 불러도 난 못 들을 것이다라는 외침이다. 팟캐스트, 오디오북, 유튜브 중에 오늘 설거지메이트는 누가 될 것인가. 집안일 중 제일 싫어하는 게 설거지이지만 하루 종일 아기와 붙어 있다 보면 설거지하며 갖는 혼자만의 시간도 반갑다. '쏴아아' 하는 설거지 물소리와 함께 오더블앱에서 흘러나오는 성우의 목소리가 귀 안을 채운다. 이번에 읽고 있는 원서가 너무 재밌어서 오디오북으로도 듣기 시작했다.
육아휴직 기간 아이 키우는 것 외에 내가 가장 힘 쏟았던 것이 영어공부였다. 영어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만 회사 생활에 치여 영어는 내려놓고 살았다. 육아휴직 동안 회사를 쉬는 참에 다시 영어를 시작하기로 했다. 초보 엄마인지라 서툰 육아만으로도 힘이 부치는데 어려운 목표를 세우면 뭐든 금방 포기할 것 만 같았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으로 시작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가볍게 시작해 볼만한 것을 찾아보다가 블로그 이웃 분이 ‘마틸다’ 원서 읽기 모임을 연다는 글을 발견했다. 마틸다는 아이들을 위한 책이었고 한 달짜리 모임이어서 부담 없어 보였다. 큰 고민 없이 신청했다. 그렇게 보채는 아이를 아기띠로 안고 한 손엔 원서를 들기 시작했다. 원서는 책이 가벼워 손목에 무리도 없고 딱 좋았다. 낮잠 재우며 읽거나 밤잠 재워놓고 읽었다. 때론 신랑에게 맡겨놓고 읽고 단톡방에 인증했다. 마지막 챕터 인증을 하고 몰려왔던 뿌듯함을 잊을 수 없다.
혼자서 시작하거나 지속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이렇게 모임을 찾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혼자 뒤처지는 기분이 싫어 열심히 하게 되고 치른 돈이 아까워서라도 열심히 하게 되는 효과가 있다.
한 권을 읽고 나니 멈추고 싶지가 않았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긴 모임에 도전했다. 3개월 동안 30권을 읽는 모임이었다. 30권이라지만 어린이 책인 데다가 책이 아주 얇아 하루에 한 권을 읽는 것도 가능했다. 영어공부라는 자전거에 올라타기까지가 어려웠지 한번 페달을 구르니 그다음부터는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바퀴가 굴러갔다. 영어 원서의 맛에 빠지니 모임과 관련 없는 원서도 혼자 찾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완독 할 때마다 해냈다는 성취감이 차곡차곡 쌓였다.
영어 공부를 시작한 것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많은 엄마들이 관심 갖고 있는 ‘엄마표 영어’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영어를 갈고닦아 아이에게 영어책 한 권 읽어 줄 때 도움이 된다면 좋겠단 마음이 들었다.
그리하여 영어동화책 낭독 수업도 신청했다. 이건 타 지역에 계신 영어 선생님께 줌으로 배웠다. 인스타그램에서 엄마표 영어 관련 피드를 올리시는 분이 수업을 모집하신다는 것을 보고 바로 신청했다. 화면 속 선생님의 시범을 보고 열심히 연습하여 낭독 과제를 제출했다. 영어 발음 교정은 물론이고 동화책을 어떻게 읽어줘야 아이에게 재미있게 들릴지를 배울 수 있었다. 이때 배운 늑대의 울음소리와 숨 넘어가게 웃는 연기 그리고 등장인물 별로 목소리를 바꾸는 연기는 요즘 아이에게 영어책을 읽어주며 요긴하게 써먹고 있다.
이쯤 되니 ‘자고로 외국어는 외국어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었을 때 가장 느는 법이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남편에게 상의 후 온라인 테솔 수업을 등록했다. 영어로 영어 가르치는 방법을 배우면 영어가 더 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혹시 퇴사라도 하게 되면 자격증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두 달간 아이가 잠든 틈을 타서 수업을 듣고 퀴즈를 풀고 시험을 봤다. 수업 자체보다 수업 들을 시간을 내는 게 더 힘들었다. 수업 화면을 정지하고 우는 아이를 달래러 뛰어간 게 몇 번인지 모른다. 온라인 테솔자격증을 그렇게 손에 쥐었다.
테솔 수업을 들으며 두 가지를 얻었다. 테솔자격증과 나에 대한 깨달음이다. 수업을 들을수록 영어는 재미있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나와 맞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이를 계기로 회사생활이 힘들 때마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과외를 하면 어떨까 하던 생각은 쏙 들어갔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재미가 없지만 어른들과의 영어공부 모임을 리딩 하는 건 적성에 맞았다. 마침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라는 책을 읽은 참이었다. 영어회화 책 한 권을 통으로 외우면 정말 영어 실력이 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영어회화 모임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모집 중인 모임은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모임은 이미 모집기간이 끝나 있었다.
모임을 직접 꾸려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터디 모집 공고를 만들어 블로그와 맘카페에 올렸다. 한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손해 볼 게 없단 생각이 들었다. 걱정이 무색하게 일곱 명의 엄마들이 모였다.
스터디의 효과를 가장 크게 얻을 수 있는 건 스터디원이 아닌 스터디 리더다. 리더로서 모범을 보여야 했기에 가급적 제일 먼저 녹음 인증을 했고 단 하루도 거스르지 않았다. 아니 내가 리더기에 거스를 수가 없었다. 이 모임을 시작으로 복직 후에도 세 차례 더 회화 스터디 모집을 진행했고, 총 400일간 영어회화 모임을 이어갔다. 영어뿐만 아니라 모임을 기획하고 모집하고 운영하는 스킬까지 덤으로 배우 시간이었다.
아기 엄마라면 다 알 것이다. 엄마가 아기와 떨어져 외출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세상이 좋아져 온라인으로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다. 올 초 교육기업 에듀윌에서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자기 계발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어떤 자기 계발을 할 계획인가요?’라는 질문에 영어공부를 하겠다는 답변이 34.3%로 3위로 뽑혔다. (기사 참고) 영어 공부를 하려는 사람들이 이리도 많다. 그만큼 영어 관련 콘텐츠도 온라인 상에 많다. 유튜브에 검색만 해도 좋은 강의들이 넘쳐난다. 멀리 나가기 어려운 엄마들이 배우기 딱 좋은 세상이 펼쳐졌다.
복직한 지 1년 반이 지났다. 육아휴직 때 영어공부를 다시 시작 한 후로 아직까지 영어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휴직기간에 열심히 다져놓았더니 이젠 습관이 됐다. 앞에서 말했지만 휴직기간에 영어를 다시 시작한 건 내가 영어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꼭 영어일 필요는 없다. 다만 육아휴직이라는 기간을 아이를 돌보면서 엄마인 나 자신도 함께 성장시키는 시간으로 활용해보길 추천한다. 각자 좋아하는 것으로 가볍게 시작해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