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수의 고향집 방문기, 발리의 진짜 속살
발리에서 생긴 사람 ② 바뚜르, 뜨루냔 (Batur, Tetunyan)
2013-2014년, 3개월 여 동안 인도네시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당시 제 나이는 만 28세, 20대 끝자락을 인니에서 보내고 한국나이 서른을 그곳에서 맞게 되었죠. 이 여정이 둘도 없이 특별했던 이유는 당시 만 3세, 갓 기저귀를 뗀 아이와 함께였던 까닭입니다.
저는 아들 하나를 짐처럼 달고 자바, 수마트라, 파푸아, 술라웨시, 깔리만탄, 플로레스... 인니 모든 구석을 누비며 두 달째 '오지 여행' 겸 '육아 인내심 테스트 여행' 중이었습니다. 그런 제게 발리를 가는 목적은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첫째,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
둘째, 내게 필요한 물건들을 싸들고 잠깐 휴가 차 한국에서 발리로 오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이미 전기도 수도도 통신도 없는 오지에서 여러 날을 머물렀으니 '장기 여행자' 겸 '오지 여행자', 게다가 '엄마 여행자'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렇기에 발리는 '전혀 호기심 가지 않는, 사람 북적한 흔해 빠진 휴양지 겸 도시'라는 이미지일 뿐이었습니다.
지금부터 이 선입견이 어떻게 깨졌는지, 왜 발리를 사랑하게 되었고, 여기서만 3주나 머물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발리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일부는 10년 전 써둔 발리 여행기를 브런치에 옮기는 것이고요. 최근인 2024년, 10년 만에 다시 찾은 발리 여행기로 이어집니다.
쿠타(Kuta)에서 출발한 택시는 뭔가 고속도로처럼 잘 닦인 길을 달려 우붓(Ubud)으로 향합니다. 단체 관광객이 들를 법한 몇 개의 한식당을 지나쳤습니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어둑어둑한 꼬부랑 길을 좀 지나자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를 통과합니다. '여기가 우붓이구나!'
친구 카드로 긁은 우붓의 숙소는 1박에 13만 원가량 하는 나름 고급 리조트랍니다. 성냥개비 하나에도 럭셔리라고 쓰여있는 듯합니다. 우리는 숙소를 만끽하고자 리조트에 딸린 일식집에서 비싼 초밥을 주문합니다. 어... 음... 한국보다 비싸고 한국보다 양이 적네요 ㅠㅠ
아홉 시쯤 되었을까요? 배가 두둑하게 차고 나서야 우리는 슬금슬금 거리로 향합니다. 그러나 판단 미스! 밤새도록 시끌벅적했던 쿠타와는 달리, 우붓은 상당히 조용합니다. 내일 계획도 못 세웠는데... 이대로 오늘이 다 흘러가버리나 싶던 찰나! 길거리 좌판에서 투어 상품을 팔고 있는 한 청년을 만납니다.
우리: 우리는 발리가 처음이야. 당일치기로 어디든 가려고 하는데 여기서 뭐가 유명해?
청년: 코끼리 사원, 뭔 사원, 뭔 사원, 뭔 사원... 으로된 코스가 제일 유명해! 차, 드라이버, 가이드, 기름값 다 해서 오만 원이야.
우리: 그래 그럼 가이드한테 내일 아침에 우리 호텔로 와달라고 해줘~
청년: 내가 바로 그 가이드야! 내가 데리러 갈 거야.
우리: 그래? 좋지~ 그럼 내일 만나!
그것이 얀수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특별히 대안도 없고 사전 조사도 부실했으므로 내일의 고민은 내일의 우리에게 미루기로 하고 일단 차와 드라이버를 구한 겁니다.
날이 밝고, 픽업 온 얀수의 차에 초경량 유모차를 싣고 출발했습니다. 성인처럼 오래 걸을 수도 없고, 낮잠까지 자야 하는 아들을 위한 필수품이거든요.
발리는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는 인도네시아 가운데 유일하게 힌두교를 믿는 지역이랍니다. 그날은 마침 힌두교의 종교행사가 있는 날입니다. 보름달이 뜨는 날이라고 했나... 등교하는 학생들이 너도나도 전통 복장을 하고 이마에 쌀을 붙이고 다닙니다. 그러고 보니 무심결에 지나쳤던, 집집마다 나던 향내! 음~ 이 힌두의 냄새가 바로 발리구나!
얀수는 첫 번째 코스로 우리를 코끼리 사원으로 안내합니다. 동궁 같은 데도 들어가 보고 이리저리 미로 같은 길을 따라 사원을 구경합니다. 어릴 적 불국사에 수학여행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불국사엔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어떤 감흥도 못 느꼈습니다. 다만 선생님 몰래 꺼내먹을 금기 음료, 타학교 남학생들과의 은근한 눈 맞춤, 친구들과 며칠 동안 준비한 장기자랑만이 관심사였죠.
여기서도 마찬가집니다. 사원에는 별 흥미가 없습니다. 게다가 아이는 금세 지쳤고, 끝없는 계단을 보자마자 걷지 않겠다며 생떼를 씁니다. 아이를 달래어 차로 돌아오기까지 나와 친구, 그리고 얀수는 깊은 빡침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그동안 나 혼자 느끼던 뒤통수 지릿한 맛을 나눌 이 가 있어 정말 행복합니다.
이. 심. 전. 심
평소 코드가 잘 통하는 친구지만 이렇게 단둘이 오랜 시간 같이 다닌 적은 없습니다. 게다가 친구와의 여행 또한 처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건 아니야. 이 사원 투어는 아니야!!!' (결코 발리의 사원들이나 이곳의 정취들이 좋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냥 저희는 관광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발리 부심이 넘치는 얀수의 자존심을 긁지 않으면서도 뭔가 색다른 코스를 짜기 위해 묘수를 내야만 했습니다.
우리: 얀수, 다음에 가는 사원은 멀어? 혹시 관광객 별로 없고 한적하고 진짜 현지인들만 있는 곳이 있을까? 음... 내가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보고 메모해 놨는데, 혹시 뜨루냔(Terunyan) 마을이라고 들어는 봤니? 완전 깜풍(Kampung, 인도네시아어로 마을, 촌. 우리말처럼 완전 시골, 오지라는 뜻으로도 쓰인다.)이라던데...
얀수: 풋~
우리: (왜 비웃는 거지...?) 얀수, 너무 규모 있는 사원은 아이 때문에 힘들 것 같아. 아까도 봤잖아 ㅠㅠ 너 또 애 목마 태우고 계단 오르고 싶은 건 아니지?
얀수: 사실은... 내가 그 뜨루냔 출신이야!
우리: 대박! 그럼 너희 부모님한테 가볼래? 가보자 가보자~ 너 오늘 그냥 휴가라고 생각해!
얀수: 우리 부모님 댁은 차로 못 가. 거기는 길이 없어서 뜨루냔에서부터 걸어서 또 산을 넘어야 돼. 전기도 작년에 들어왔는걸. 대신 뜨루냔까지만 가도 좋아.
우리: 콜!
그렇게 우리는 원래의 관광 코스를 깡그리 무시하고, 뜨루냔으로 향했습니다. 뜨루냔에 가는 길에도 볼거리는 있습니다. 뜨루냔이 바뚜르(Batur) 화산 옆 바뚜르 호숫가에 위치한 마을이기 때문입니다. 얀수는 우리를 산 정상에 있는 맛 좋은 뷔페로 안내했습니다.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절경입니다. 우리는 차마 밝힐 수 없는 오물을 뒤집어쓰는 사건을 겪었는데, 마침 전망대 근처에 옷을 파는 몇몇 노점이 있네요. 셋이서 주황색 옷을 맞춰 입고 뜨루냔에 당도합니다.
뜨루냔은 정말 작은 마을입니다. 관광객이라고는 방금 노 젓는 배를 타고 떠난 서양인 한 커플뿐이네요. 동네 아이들이 맨발로 우르르 뛰쳐나와 세 살짜리 꼬마 여행객을 신기한 듯 바라봅니다. 그러고 보니 깔맞춤 한 세 사람이 이상하게 보일 법도 합니다. 그들이 아는 한국인이라고는 소녀시대와 우리들 뿐일 텐데... 한국인들은 원래 다 옷을 통일해서 입는다고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얀수: 네가 책에서 봤다는, 해골을 땅 위에 늘어놓는 무덤에 가려면 배를 타고 가야 해. 그런데 뱃삯이 좀 비싸. 6만 원이야.
우리: (고민하다...) 여기까지 왔는데 보고 가야지~ 가보자!
배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노 젓는 나룻배에는 사공 두 명과 다섯 살 남자아이 한 명이 타고 있네요. 이 배가 육만 원이라니 정말 멀~~~~~리 멀리 호수 반대편까지 가나보다 했지만, 무덤가는 정말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저 혼자 노를 저어서도 갈 법한 거리입니다. 그냥 아들이 오랜만에 또래친구를 만난 값이라 생각하고 꾹 참습니다. 둘은 파리 잡아먹는 흉내를 내며 어느새 친구를 먹습니다. 저절로 엄마 미소가 새어 나옵니다.
장례터에서 해골 몇 구와 기념사진을 찍고는 으스스한 마음을 안고 다시 배를 타고 빠져나옵니다. 쉽게 마주할 수 없는 진귀한 풍경이긴 하지만, 육만 원의 뱃삯에 속이 쓰립니다. 얀수 일당이 오만 원인데... 이깟 배 잠깐 타는 게 육만 원 ㅠㅠ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본 마을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분명 아까는 아이들 몇몇만 뛰어다니는 조용한 마을이었는데... 별로 시간이 오래 지나지도 않았는데 엄청나게 소란스럽습니다. 알고 보니 오늘은 5년에 한 번 있다는 축제날! 우리의 기우제 비슷하게 바다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풍요를 비는 세레모니가 있는 날입니다.
그 많고 많은 가이드 중에 뜨루냔 출신의 얀수를 만난 것도 신기한데 마침 딱 오늘, 딱 우리가 머무는 이 잠깐의 시간에 이 세레모니를 마주한다는 건 몇 번을 돌이켜봐도 별난 우연입니다.
마을 인파에 섞여 우리도 이마에 쌀 붙이고 춤추며 놀다가 행사가 끝나자 얀수는 우리를 마을 안으로 이끕니다. 그렇게 들어간 어느 가정집... 바로 얀수의 외할아버지 댁입니다. 할아버님은 여든이 넘은 나이이신데 마을의 최고 어르신 역할을 맡고 계신다 합니다.
아들 녀석이 늘 작은 축구공을 하나 가지고 다니는 덕에, 아들은 동네 아이들 무리와 어딘가로 사라졌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할아버님께 마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죠. 황송하게 차도 대접받고 말입니다. 수다로 한참을 보내니 뛰어노느라 땀범벅이 된 아들이 들어옵니다. 뒤따라온 십 수 명의 마을 아이들... 들어오라는 우리의 손짓에 처음엔 쭈뼛거리더니 금세 좁은 할아버지댁 거실이 우르르~ 아이들로 가득 찹니다.
왁자지껄한 시간이 지나고 간단히 마을의 사원을 둘러봅니다. 관광객으로 가득한 시내의 사원이 아니라, 진짜 마을 사람들이 늘 기도를 드리는 사원입니다. 내려다보이는 호숫가와 함께 고즈넉한 정취에 잠시 빠져듭니다.
돌아오는 길에 몇 군데 명소를 잠깐 둘러봅니다. 얀수와 함께한 마지막 코스는 얀수가 추천해 준 우붓 중심가 한 레스토랑에서의 저녁식사입니다. 얼마 만에 만난 진짜 서양음식 레스토랑인가 싶습니다. 10년 후 다시 만난 얀수에게 들은 바로는 얀수가 가이드하기 전에 알바했던 식당을 추천해줬던 것이라 합니다. 잘란 몽키포레스트(Jalan Monkey Forest)와 잘란 드위시타(Jalan Dewisita), 잘란 라야우붓(Jalan Raya Ubud) 등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에서 아이쇼핑을 하며 내일 살 아이템들을 찜해놓습니다.
돌이키고 또 돌이켜봐도 얀수를 만나고 얀수네 마을에 가서 세레모니도 함께 하고 마을 어르신, 아이들과 함께 어울린 시간은 신기하기만 합니다. 친구와 함께 "언빌리버블!"을 연발하다 잠이 들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