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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마 Jan 26. 2024

한인민박에서의 안심, 그리고 방심

발리에서 생긴 사람 ③ 우붓(Ubud)

2013-2014년, 3개월 여 동안 인도네시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당시 제 나이는 만 28세, 20대 끝자락을 인니에서 보내고 한국나이 서른을 그곳에서 맞게 되었죠. 이 여정이 둘도 없이 특별했던 이유는 당시 만 3세, 갓 기저귀를 뗀 아이와 함께였던 까닭입니다.
저는 아들 하나를 짐처럼 달고 자바, 수마트라, 파푸아, 술라웨시, 깔리만탄, 플로레스... 인니 모든 구석을 누비며 두 달째 '오지 여행' 겸 '육아 인내심 테스트 여행' 중이었습니다. 그런 제게 발리를 가는 목적은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첫째,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
둘째, 내게 필요한 물건들을 싸들고 잠깐 휴가 차 한국에서 발리로 오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이미 전기도 수도도 통신도 없는 오지에서 여러 날을 머물렀으니 '장기 여행자' 겸 '오지 여행자', 게다가 '엄마 여행자'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렇기에 발리는 '전혀 호기심 가지 않는, 사람 북적한 흔해 빠진 휴양지 겸 도시'라는 이미지일 뿐이었습니다.
지금부터 이 선입견이 어떻게 깨졌는지, 왜 발리를 사랑하게 되었고, 여기서만 3주나 머물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발리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일부는 10년 전 써둔 발리 여행기를 브런치에 옮기는 것이고요. 최근인 2024년, 10년 만에 다시 찾은 발리 여행기로 이어집니다.




벌써 두 달 넘게 한국을 떠나 있는 저를 만나러 친히 발리까지 와준 친구는 너무나도 고마운 보배 같은 존재죠. 오기 며칠 전부터 친구는 "언니~ 한국에서 챙겨갈 거 있으면 뭐든지 말해요."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친구 편에 들여올 물건은 많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친구 편에 한국으로 돌려보낼, 그동안 여행하면서 늘어나거나 괜히 가져왔다 싶은 짐들만 한가득이었죠. 네, 인도네시아는 그런 곳입니다. 그동안 집안을 한가득 채운 살림살이가 다 무슨 소용이냐는 듯, 적게 소유하고 가볍게 움직이는 단출한 삶을 허락해 주는 곳이요.


"아이 장난감 중에 '뽀로로 수륙양용차'라고 있는데, 그걸 매일 찾아. 우리 엄마더러 너한테 택배로 보내라고 할게. 그것 좀 갖다 줘. 그리고 내가 지금 쓰는 가방이 찢어졌는데 똑같은 걸로 하나 사다 줘. (아들과 깔맞춤 한 가방이라 이 가방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또 탐폰을 안 파는 것 같아 이 나라에! 그리고 또... 무겁겠지만 한국책이 너무 읽고 싶어 ㅠㅠ 좀 부탁해."


그렇게 짐 바꿔치기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친구가 가져온 물건을 담고, 그동안 자리만 차지하고 별 필요가 없던 짐들을 한가득 친구 편에 넘깁니다. 짐가방이 한층 가벼워지네요. 오후면 다시 한국으로 떠나는 친구는 짐을 이고 지고 갈 고생길만 남았습니다.


(저게 바로 한국에서 물 건너온 뽀로로 수륙양용차)



체크아웃 전, 마지막으로 럭셔리한 리조트 이곳저곳을 만끽합니다.






이제 어젯밤에 찍어 놨던 쇼핑 아이템 사냥에 본격 나섭니다. 유모차 하나를 달달달 끌고 달리며 몽키포레스트 거리(Jalan Monkey Forest)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닙니다. 우붓(Ubud)의 재래시장 역시 빠뜨릴 수 없습니다. 발리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전체를 통틀어 우붓은 쇼핑하기에 최고의 장소입니다. 아기자기하면서 세련된 수공예품들이 지천에 널렸습니다. 특히 정교하게 염색된 옷들이 예술입니다. 친구는 신나서 득템하지만, 앞으로도 남은 여정이 긴 저는 짐을 늘릴 수 없기에 친구 편에 달려 보낼 작은 소품들만 건졌습니다. 


택시를 부르려다 혹시 몰라 얀수에게 전화를 겁니다.

"얀수야 오늘 손님 있어? 없으면 우리 공항 가자~"


친구와 제 짐을 한국으로 돌려보내고 우리 모자는 다시 우붓으로 돌아왔습니다. 왜냐, 우리 아이와 동갑내기 아이가 있는 한인민박이 우붓 근교에 있다는 소식을 접수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행을 떠나오기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곳입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그만뒀던 회사 선배의 회사 선배, 즉 제가 입사하기 전에 다니셨던 분이 발리로 아예 건너가 한인민박을 하시는데 우리 아들 또래아이 '지후'가 있다고요. 민박집 이름도 '지후네 집'입니다. 

몽키포레스트 거리 한복판에서 짐더미와 함께 갈 곳을 잃은 저희는 사장님께 전화를 드립니다. 다행히 픽업을 와주신다고 하네요! 사장님은 얼핏 배우 곽도원을 닮았는데 그보다 좀 선해 보이는 인상이십니다. 아들 지후는 키가 크고 우리 아들보다 훨씬 뽀얗습니다. 우리 아들은 인도네시아에서 고작 두 달 살고 촌뜨기 피부가 됐는데, 지후는 발리로 이사 온 지 꽤 오래되었는데도 도시 사람 같네요.


지후네 집은 뉴꾸닝(Nyuh Kuning)이라고 몽키포레스트 사원 뒤편에 위치합니다. 우붓 중심가에서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아니... 생각보다 거리가 한참 됩니다. 물론 차로는 휙~ 금방 닿긴 합니다. 넓은 마당을 끼고 있는 깨끗하고 소박한 2층 집인데, 2층 방 전체를 게스트에 내주고 지후네 가족은 1층에서 생활합니다. 역시, 더운 나라 가옥이라 그런지, 현대식 건물이라도 시원하게 타일이 깔린 넓은 마루가 있네요. 아들은 마루에 널린 지후의 장난감을 보고 환호합니다! '역시 데려오길 잘했어!'

도착하자마자 염치없게 한국 라면도 얻어먹었습니다. 한국사람과 한국어로 나누는 대화는 그게 싸움이나 욕설, 고성방가일지라도 반가울 지경입니다. 발리생활 이야기, 아이 키우는 이야기, 여행 이야기 등 지후네 어머님과의 수다거리는 동나는 일이 없습니다.


지후랑 종이 찢기 놀이;



지후네 집 2층 게스트룸


지후네집 1층 마루



잠깐 눈을 붙였다가 지후네 식구들 외출할 때 차를 얻어 타고 다시 우붓 시내로 나옵니다. 인도네시아 곳곳에서 원숭이는 심심찮게 봤지만, 몽키포레스트 사원은 정말 압도적인 물량공세입니다. 족히 수백 마리는 되어 보이는데 사람보다 원숭이가 더 많습니다.


몽키 포레스트 사원


모자도, 티셔츠도 우붓 거리에서 득템



매일 저녁 우붓 궁전에서 열리는 전통춤 공연도 관람합니다. 역시나 아이의 짧은 집중력과 민폐력(?) 때문에 중간에 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저렴한 가격에 라이브로 연주하는 발리 전통 음악에 빠져들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렇게 우붓에서의 나날들이 평화롭게... 마무리된다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이날 저녁, 우리는 길 잃은 모자가 되는 희대의 빅 사건을 겪습니다.

언급했듯 지후네 집은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습니다. 분명 주인 사장님께서 차를 태워주실 때 '여기, 여기, 여기...' 여러 이정표들을 알려주시고 주소가 쓰여있는 약도도 한 장 쥐어주셨었는데... 저는 한국인을 만났다는 왠지 모를 안도감에 아무것도 귀담아듣지 않았나 봅니다. 평소 같았으면 영어로 의사소통하느라 온갖 신경을 곤두세워 집중했을 터인데, 사장님의 설명을 건성으로 듣고 '그래 거기~ 그래 여기~' 하고 말았던 거죠. 게다가 한국말로 설명을 들으니 영어나 현지어로는 더 기억이 안나는 초유의 사태;;;


집에 걸어가기로 마음을 먹고 몽키포레스트 사원 뒤편을 걷고 걷고 또 걸었습니다. 지친 아이를 실은 유모차까지 밀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낮에 차로 쓱 지나면서 봤던 광경은 보이지 않습니다. 시내에서 벗어난 거리는 말 그대로 칠흑 같이 어둡습니다. 인적도 없습니다. 가끔 개들이 짖어대며 쫓아와 냅다 도망치느라 공포감만 더할 뿐입니다. 

어느덧 한 시간 반 째 걷고 있습니다... 사장님께 전화를 해봤지만 현지어로 무슨 안내 멘트가 들릴 뿐 전화 연결이 안 됩니다. 아쉬운 대로 얀수한테도 전화해 봅니다. 역시 연결이 안 됩니다. 배터리는 거의 다 됐습니다. 아주 잠깐씩 지도 어플을 켜봐도 잡히지 않습니다. 터벅터벅... 이대로 끝인 건가. 이렇게 한국인네 집에 머문다고 방심한 순간에 미아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동안 여행하면서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늘 이 여행의 리더로서, 또 엄마로서 잘 버텨왔는데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눈물이 다 납니다.


그때 누가 나타납니다. 영어를 전~혀 못하는 아저씹니다. 한참 전에 우리를 봤는데 지금 우리를 또 마주치자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온 분입니다. 영어로 소통은 안되지만 저는 두 가지를 강조해 말했습니다. "오랑 꼬레아(한국인)"와 "레드 템플"

집을 나설 때 분명히 사장님이 그랬습니다. 이 빨간 건물이 보이면 그 골목에서 꺾으면 된다고. 그 빨간 건물을 마을회관이라 설명하셨는데 저는 사원이라 잘못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여하튼 오토바이 아저씨는 뭔가를 알아들으신 듯 우리를 오토바이에 태우셨습니다. 사람 셋에 유모차 하나를 태운 오토바이가 달리고 달려 어느 붉은 건물 앞에 섭니다.


오토바이 아저씨: 여기?

나: 아니야 ㅠㅠ 여기 아닌데 ㅠㅠ


그때 아저씨가 근처 식당에서 식사 중인 다른 아저씨를 부릅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분이네요. 조금 희망이 보여!


나: 저는 한국사람이고 한인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있는데 길을 잃었어요. 거기가 어딘진 모르지만 한국 사람들 몇 가족이 근처에 모여 살아요. 혹시 '미스터 박'이라고 아세요? 아들 이름은 '지후'고요.

영어하는 아저씨: 미스터 박은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 한국사람이 한 명 있어요. 일단 '미스터 권'한테 전화해 줄게요.
나: 미스터 권, 안녕하세요? 저는 지후네집에 묵고 있는 게스트인데 길을 잃었어요. 혹시 지후네집이라고 아세요?
미스터 권: 푸하하, 우리 옆집이에요. 지금 데리러 갈게요.


그렇게 하여 또 다른 한국인의 오토바이를 타고 우리는 무사히 지후네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권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 아저씨도 우리 회사 선배님 ㅋㅋㅋ 우리 회사 그만둔 사람들은 다 발리로 모여드나 봅니다; 사실은 이 분이 먼저 발리에 와서 지후 아버님을 발리로 오라고 꼬셨다고...


두 시간 반의 긴 여정이 끝났습니다. 돌아온 지후네 집에서 여쭤보니 제 현지 선불폰 유심의 크레딧이 다되어 전화가 걸리지 않았던 거라고; 


"내 우붓에 또 오게 된다면 다시는 걷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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