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 시간>읽기

예술, 어쩌면 인간.

by 회색고양이상점


작가 지그프리트 렌츠에 대해

렌츠는 1926년 북독 마주렌 지방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김나지움에 재학 중 2차 대전을 맞았다. 17세의 렌츠도 징집되어 해군으로 참전했으나 패망해 가는 독일군의 실상에 환멸을 느끼고 탈영을 감행하다가 연합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 생활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서독으로 귀환, 함부르크 대학에서 영문학, 철학, 문학을 공부하고 <<디벨트 Die Welt>>지의 문화부와 정치부 기자를 거쳐 문예란 책임 편집위원을 역임하였다. <첫 장편 창공의 보라매>(1951)로 작가적 명성을 얻은 후, 주로 향토색 짙은 작품을 써 왔다. 출간되자마자 독일 출판계를 뒤흔들었던 <독일어시간>(1968)은 권력과 예술의 갈등을 그린 소설로서 히틀러 집권 말기라는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현실에도 적절한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렌츠는 도스토예프스키, 포그너, 헤밍웨이 등을 정신적 지주로 삼았으며, 저널리스트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탄탄하고 건실한 창작 태도를 견지하여 그의 작품들을 세계무대에 끌어올렸다.


들어가면서

<독일어 시간>은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에밀 놀데를 모델로 쓰인 소설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 작가 렌츠는 그의 책에 화가 막스 루드비히 난젠과 그의 친구였던 올레 예프젠의 갈등을 통해 놀데에게 창작 금지를 내린 나찌와 이에 저항하며 몰래 그림을 그려가던 에밀놀데를 중심으로 이 글을 써내려 간 듯하다. 책의 전반에 걸쳐있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와 배경에 대한 치밀한 기술(記述)은 권력의 내면화 문제와 의무 그리고 이에 저항하려는 예술을 향한 의지를 두 개의 큰 봉우리로 상정한다. 더 나아가 예술과 권력의 갈등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죽어가며 비참해지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화석이 된 인간.

<독일어 시간>에서 올레 예프젠은 의무를 정확하게 수행하려고 한다. 그의 24시간은 오로지 의무로 시작해서 의무로 끝나야 한다. 아들 지기 예프젠에게 회초리를 들 때, 그러고 나서 아들의 엉덩이를 어루만질 때, 이제는 친구라고 할 수 없는 화가를 대할 때, 자전거를 세워 둘 때 등 어떤 것 하나 올레 예프젠의 목소리와 숨결을 들을 수 없고, 그저 루크뵐 파출소장의 그것들만 들릴 뿐이다. 그런데, 의무감의 화신인 올레 예프젠에게서 눈 여겨볼 점은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에 패배한 후에서 드러난다. 독일이 패전한 이후라면 당연히 그동안 독일의 전체주의를 향해 짜인 의무감은 폐기되어야 마땅하지만 그는 독일의 패전 후에도 그는 창작 금지라는 의무를 놓지 못한다. 계속해서 난젠을 감시하는 일을 한다든지, 영국군에게 경계를 한다든지 하는 행동은 그가 여전히 자신에게 깃들어 있는 의무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올레 예프젠의 아들 지기 예프젠은 권력과 의무감의 관계를 명민하게 감지하고 있다.


… 즉 루크뵐의 파출소장을 대신하여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제 생각으론, 쿠르트헨 역시 그 어떤 사람들, 예컨대 루이제 아줌마나 빌헬름 아저씨를 대신해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어쩌면 이곳의 모든 소년수들이 누군가를 대신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중략)……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심판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이곳에 보낸 겁니다. 소년들을 말이에요. 이렇게 해야 그들은 안심이 되겠지요. 자유스러워지겠지요. 옳지 않은 양심들을 배에 실어 이곳에 날라놓는 것입니다. 그래야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밥을 먹고 밤에는 그로그주(酒)를 홀짝거릴 수 있겠지요. (독일어 시간 2, 285 page)


지기 예프젠은 누군가를 벌하고, 교화한다는 것의 심리적 이면에는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게 두려운'사람들의 방어기제가 드리워져 있다고 말한다. 권력을 통한 교화와 통제야 말로 자신을 '보는 게' 두려운 사람들의 뒤틀린 심리적 일면의 발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올레 예프젠의 멈출 수 없는 의무감에 대한 집착은 곧 권력의 편에 서서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운 판단을 연기하고 기만하는 뒤틀린 올레 예프젠의 마음이다.



예술, 끊임없이 흐르는 물.

막스 루드비히 난젠은 '창작 금지'를 당하지만, 끊임없이 그림을 그려간다. 그는 이젤 앞에 앉아서 자신이 그려 넣은 인물들과 대화하기도 하며, 화를 내기도 한다. 한편, '보이지 않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며, 언뜻 보기엔 말도 안 되는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그에게 있어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감정을 그대로 끄집어내어 색깔로 표현하는 일이며, 영혼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다. 그는 올레 예프젠에 맞서 그림을 숨기기도 하고, 지기 예프젠과 올레 예프젠이 가져간 그림을 내놓으라고 찾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예프젠 부자를 찾아가서 그림을 달라고 요구한 것이 자신의 그림에 대한 소유욕은 아니다.


… "손실이 따르는 수도 있다는 사실에 너도 익숙해져야겠다., 삣-삣. 어쩌면 그것이 다행스러운 일일는지도 몰라.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것에 너무 집착해선 안 돼. 늘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야. 그래야만, 우리는 또 다른 무엇을 우리 자신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거라구. 나는 아직 한번도 만족해 본 적이 없단다. 지기야, 내 충고를 들어라. 만족해선 안 된다. 늘 가능성을 찾아 나서야 한다 …….(독일어 시간 2, 214 page)


위의 인용문을 본다면 그가 없어진 그림을 요구하는 것은 그림을 되찾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그림을 요구하는 것일까? 아마도 의무감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간' 올레 예프젠과 그림을 지키려는 강박에 사로잡힌 '인간' 지기 예프젠을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예술가 막스 루드비히 난젠은 영혼의 목소리를 색깔로 그려내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의무감과 그림을 지키겨는 강박에 결박되어 있는 두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자신의 그림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을까? 무언가에 집착하는 순간이 곧 집착 대상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화가는 예프젠 부자를 대항마로 여긴 것이 아니라 그들을 묶어버린 비인간적인 모든 것을 찢으려 하고 있었다.



권력과 예술이라는 폭력의 사생아.

앞서 살펴보았듯이 권력은 사람의 마음을 조각내고, 예술은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마음이게 하기 위해 부딪힌다. 이처럼 인간을 둘러싼 권력과 예술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데 <독일어 시간>에서 지기 예프젠은 반대로 움직이는 두 힘의 간극에서 정신적인 고통에 신음한다. 지기 예프젠은 '어린아이'로 등장하는데, 그는 어릴 때부터 올레 예프젠과 막스 루드비히 난젠의 집을 왔다 갔다 하며 두 사람을 자신 세계의 부분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화가와 아버지 둘의 세계는 결코 접합될 수 없는 세계이다. 두 세계의 갈등과 분열은 마켄토르가 논문에서 썼듯이 그림에 대한 편집증으로 발전하게 되고, 편집증의 상징물이 바로 '날개 없는 풍차' 아지트였다. 그는 아버지와 화가 난젠의 세계의 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무장지대'로 아지트에 그림을 숨겼다.

지기 예프젠이 어린아이라는 사실은 이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 이유는 어린아이가 가진 특징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심리적인 방어기제가 어른에 비해 약하기 때문에 외부의 자극을 그대로 받아들이곤 하는데, 렌츠는 어린아이 지기 예프젠을 통해 예술과 권력의 갈등을 극대화해서 보려 주려고 한 듯 보인다.


예술, 어쩌면 인간.

'날개 없는 풍차'아지트가 불에 타서 없어지고 난 후에, 다시 말하면 그의 정신이 완전히 산산조각 난 후에, 그는 어떻게 살아야 했을까? 이 질문은 지기 자신이 대답하고 있다.

… 등화관제를 했던 사람, 늪 속에서 뽀글거리는 수프를 만들었던 사람, 안개를 어깨에 둘러썼던 사람, 냄비로 휘파람 소리를 내어 들판 위를 나는 까마귀들을 내몰았던 사람. 그들에 관하여 나는 물어볼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왜 그들은 낯선 사람의 출입을 금지하고 그의 도움을 경멸했던가? 왜 그들은 중도에 방향을 바꾸어 더 나은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일까? …… (중략) …… 이런 것들에도 나는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들의 걸음, 그들의 섬, 그들의 시선, 그들의 말에 질문을 던질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나는 만족할 수가 없다. ……(중략)……내게 남아 있는 건 , 답변을 받지 못한 질문들뿐이다. 화가도, 아버지도 답변해 주지 않은 질문들뿐.(독일어 시간 2, 304 -306 page)


그는 화가도 아버지도 답변해 주지 않은 질문들을 좇으려고 하고 있다. 다시 시작하려는 것이다. 진짜 지기 예프젠의 모습을 보기 위해 그는 아버지와 화가의 그림자에서 고통받고 신음하던 지기 예프젠의 세계에서 한 발짝 나와서, 이제는 또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을 지기 예프젠의 모습을 상상하고, 질문하는 것이다. 지기 예프젠은 예술을 닮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가의 모습도 닮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흘려가려는 것. 그 길은 예술가의 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은 아닐까?


지명과 놀데에 관해


독일어 시간은 독일의 북쪽 주(州)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州)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책에 나오는 지명 중에 후줌은 실제로 있는 도시지만 루크뷜, 블레켄바르프를 포함한 다른 지역들은 실존하지 않는 지역이다. 마크가 표시된 지역은 이 책의 모델이 되고 있는 에밀놀데 미술관이 있는 쥐벨(Seebuell)이다. Tønder 오른쪽에 붉은 동그리마는 놀데가 태어난 지역이며, 지역 이름은 놀데(Nolde)이다. 사실, 에밀놀데의 본명은 에밀한센이었지만, 후에 지명을 그대로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혹시 북독일 지방을 가게 된다면, <독일어 시간>을 읽었으니, 놀데 미술관을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