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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파감자 Apr 14. 2022

넷이 되어 함께 배운다

보이글방 수업일지 03.

     두 명으로 시작한 수업이 4주차에 접어들며 세 명으로 늘었다. 나의 영업력은 아니고, 기존 친구가 데려 온 것인데, 사실 그 친구 마저도 3주 동안 단 한 차례의 수업만 했을 뿐이다. 2주 동안 10살 어린이와 1:1 수업을 하면서 우리 둘은 부쩍 친해졌다. 얌전히 글에 집중하는 시간 동안은 글방 건너편 놀이터에서 노는 어린이들의 목소리에 마음이 간지럽고, 가림막을 만든 왼손과 서걱서걱 연필을 쥔 오른손, 연하고 윤기있는 정수리는 나의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는 그새 그런 시간을 공유한 사이가 된 것이다.


     힘 좋은 어린이들을 제압하지 않고도 스스로 글쓰기에 힘을 안배시키는 방법, 자기 의지가 아닌 거의 모든 학습에 필요한 동기부여를 주기 위해 나는 게임을 준비한다.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도입을 정하는 것과도 같은 일. 일단 시작만 하면 그 다음은 술술이다. 오늘의 수업 재료인 그림책 ⌈내 마음 ㅅㅅㅎ⌋을 읽기 전, 초성만 적힌 단어를 표정과 몸짓으로 설명하는 게임이다. '궁금해'라는 단어를 표현하기 위해 갖고 있던 빈 노트를 펼쳐 눈동자를 굴리다 허공을 바라보며 갸웃하는 어린이, '억울해'는 양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펴들고 무언가를 달라는 듯 재촉하며 소리없는 아우성과 찌푸린 미간을, '행복해'에서는 두 팔을 번쩍 든 채 손목에 힘을 빼 마구 흔드는 모습으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고 또 상대에게 공감하며 단어를 추측하고 맞혔다. ⌈아이들의 배움은 어떻게 깊어지는가:배움의 공동체 수업 실천서⌋의 저자가 주창하는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는' 현장을 만들고 싶다. 일방향으로만 학습받던 나의 경험과 달리 각각의 때에 어린이 스스로가 교사와 학습자의 다중 역할을 수행하며 그들의 색이 기성의 것에 흐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8살 어린이들을 상대로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는 방구라던가 똥 따위의 단어들은 50분 수업 중에 스무 번은 넘게 배설된다. 그 중 두어 번 정도 교사인 나의 입으로 해당 단어가 나오면 어린이들의 흥분 감도는 올라간다. 은밀한 이야기는 뒤에서 혹은 속으로만 낄낄대는 어른들의 원초적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림책을 가까스로 읽(어주)고 어린이 각자 마음에 드는 ㅅㅅㅎ를 골라 그 감정을 일으킨 경험을 쓰는 것이 오늘의 글쓰기 주제였다. 그 어떤 ㅅㅅㅎ이 나오더라도 이 어린이들은 빵꾸똥꾸같은 된 발음을 내며 거친 공상을 힘껏 외친다. 체구도 몸짓도 아담한데 그 기세는 부러울만치 활활댄다. 나는 그 자리에서 적절히 진화 작업을 벌이며 연필을 쥔 손에 힘을 옮기게 만들어준다. 효과가 2분도 못 가는 게 흠이긴 하지만  점차 내 시간을 줄이고 어린이들의 시간을 늘려주니 딱 그들에게 알맞은 속도대로 나아간다. 그렇게 쓰여진 결과물을 받아들 때면, 모든 과정에 참여하고 있던 나도 '언제 이 어린이가 이런 글을 완성했나' 싶을 정도로 놀라워한다.


     아무튼 8살 남자 아이 2명의 시너지는 엄청났다. '혼자 하니까 따분하다~'라며 그 날 배운 표현을 바로 활용하던 지난 주의 10살 어린이도 오랜만에 활기가 도는 글방 물결에 유연히 서핑하며 역시 어린이는 어린이구나, 자각하게 해주는 들뜬 모습을 보였다. 그만큼 이 악동들의 주목을 이끌어내고 행동으로 옮기게 하기 위해 나는 3배 만큼의 에너지를 내야했다. 하지만 수업 끝에 자신의 글을 낭독할 때는 낯설만큼 결연한 어깨와 빵꾸똥꾸 같은 자극에도 엄숙할 것만 같은 경청의 태도가 있었다. 역시 내가 이들에게 해야할 역할은 기폭제일 뿐임이 명확해진다. 어린이들은 순수하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준다. 심지어 나는 그 황홀한 장면을 독차지한다. 교사의 역할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극하는 것이라는 이오덕 선생님의 말씀을 연신 읊조린다. 그 분의 조언이 나의 다짐이 되고 내 생각이 되어 눈에 보이게 만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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