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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정우 Mar 27. 2016

봄이 그리운지 사람이 그리운지

강진, 유배지의 봄 풍정




어쩌자고 나는 엄동설한 야심한 밤에 다산초당이 그리웠을까?

강진의 봄 풍정이 그리웠을까? 동백꽃 붉게 뚝뚝 떨어지던 그 숲길.. 아니면,

유배지에서 벗과 책과 차와 꽃향을 음미하던 유배자의 한갓짐이 부러웠을까?

봄이 그리웠다는 것은 겨울이 힘겨웠다는 것. 돌이켜 보니 지난 겨울도 꽤나 퍽퍽했구나..

드디어 봄은 왔고, 강진 땅으로  떠나 나는 따사로운 햇살과 바람을 쬐어야겠다는 것..






 나의 남도 여정은 늘 밤 열두시에 출발이다. 밤새 길을 달려 다다른 새벽의 남도는 푸근하고, 몽환적이었는데, 몽환적인 것은 밤샘 운전의 여파도 한몫 하였을 것이다. 백련사 동백 숲 가득 붉게 꽃망울이 터졌다. 이즈음의 산하 곳곳에 동백꽃이 피지만, 남도의 동백만큼 처연하지 않다. 남도의 동백이 처연한 것은 아마도 유배온 자들의 여한이 묻어있기때문이라고 비몽사몽 간에 잠시 생각해보았다..




 백련사 문간, 만경루에 이르면 등을 돌려 바다를 본다. 저 풍광은 배롱나무 가지로 그린 것인가? 배롱나무도 함께 그린 것인가? 참 절묘한 어우러짐이다. 배롱나무에 붉게 꽃이 피는 여름철 풍광은 또 어떠할까? 그러나 나는 봄의 이 풍광이 더 좋다. 그윽하고 그윽하고 그윽하도다..





강진 만덕산 백련사. 신라 문성왕 1년(839) 무염선사에 의해 창건된 유서깊은 사찰이다. 원래 이름은 산의 이름을 딴 만덕사였다. 백련사의 전성기는 고려 무신정권 때였다. 최씨정권과 줄이 닿았던 이 지방의 호족 최표, 최홍, 이인천 등이 월출산에 머물던 원묘국사 요세(了世) 스님을 초빙하여 대규모의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다. 고려 희종7년(1211) 부터 고종3년(1216) 까지 80여 칸의 규모를 지닌 큰 절집으로 변모하였다. 요세스님은 참회하여 업보를 멸하는 참회멸죄(懺悔滅罪)와 괴로움이 없는 정토에 태어날 것을 바라는 정토구생(淨土求生)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았고, 대규모의 수행결사 체계를 세웠다. 이때부터 백련사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이후 백련사는 120년 동안 번창하면서 8명의 국사를 배출하였다. 고려말, 백련사는 왜구들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몇몇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 초입에 제법 너른 차밭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어슴프레 강진만 구강포가 내려다 보인다. 한동안 머물며 멍하니 바라본다. 겨우내 쌓여있던 번민의 먼지와 내면의 세균들이 씻겨지고 살균되는 느낌이다. 수면으로 튕겨져나온 빛에 잠시 눈이 아렸으나, 숲과 차밭의 연두빛이 이내 보듬어주었다.


"아아.. 극락정토(極樂淨土)가 따로 없구나.. "




 약간의 오르막이 있지만 만덕산은 부드러운 육산으로 발품이 편하다. 오르는 길 좌우로 여린 잎들이 신생의 봄을 알려주고 있다.  봄햇살이 숲을 관통하는 오솔길 위에서 나는 다산과 혜장의 인연에 대해 생각해본다.


다산보다 열살 아래였던 혜장은 백련사의 학식높던 주지였다. 다산이 동구밖 사의재에 머물던 1805년에 알게되어 인연이 시작되었다. 둘은 나이와 신분과 종교와 처지를 떠나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다산은 유배초기 주역에 몰두하였는데, 유교와 주역을 혜장에게 알려주었고, 혜장은 불교와 차(茶)에 대해 알려주었다. 다산은 이때부터 차에 심취하게 된다. 혜장과 차를 만난지 얼마안된 어느 겨울, 한파가 심해 차가 동이 난 적이 있었다. 다산은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듯 혜장에게 걸명소(乞茗疏)를 보낸다.


" 나그네는 근래 차버러지가 되었으며, 겸하여 약으로 삼고 있소. (중략) 아침에 달이는 차는 흰 구름이 맑은 하늘에 떠있는듯 하고, 낮잠에서 깨어나 달이는 차는 밝은 달이 푸른 물 위에 잔잔히 부서지는듯 하오. 다연에 차 갈때면 잔구슬처럼 휘날리는 옥가루들, 산골의 등잔불로서는 좋은 것 가리기 아득하지만, 자주빛 어린 차순 향내는 그윽하고, 불 일어 새 샘물 길어다  들에서 달이는 차 맛은 신령께 바치는 백포의 맛과 같소. (중략) *용단봉병등 왕실에서 보내준 진귀한 차는 바닥이 났소. 이에 나물캐기와 땔감을 채취할 수 없는 병이 들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차 보내주시는 정다움을 비는 바이오. 듣건데 죽은 뒤, 고해의 다리 건너는데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이 뭉친 차 한 줌 몰래 보내주시는 일이라 하오. 목바르게 바라는 이 염원, 부디 물리지치 말고 베품 주소서."

(*다산은 혜장을  차에 관한한 왕으로 비유했다. 왕실에서 보내준 진귀한 차란 혜장이 보내준 차를 의미한다)

걸명소를 받아 본 혜장은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어 부처님께 드릴 비상차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1808년 초봄, 다산은 유배지의 거처를 초당으로 옮긴다. 백련사에서 불과 삼십분 거리니 둘 사이의 오고감이 얼마나 빈번했을까? 초당으로 옮긴 후 다산은 정신적인 안정을 찾게 된다.


초당가는 길, 풍광이 트이는 곳에 자리한 해월루.  오솔길이 다산의 강진유배길로 지정된 이후, 새롭게 만들어졌다.
해월루에서 바라본 강진만 풍경

 해월루가 있는 야트막한 산고개를 너머 길은 이제 완만한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푸른 대숲이 나타난다. 대숲 바람 풀풀 흩날리며 혜장에게 달려가던 다산이, 다산에게 달려가던 혜장이 눈에 선하다..


다산은 자주 천일각에 올라 먼 남쪽을 바라보곤 했다.  저 바다너머 남쪽 섬 흑산도에는 그의 형 정약전이 유배 가 있다.



다산초당.
유배지를 옮긴 후, 다산은 손수 연못을 파고 가운데는 섬을 만들어 나무를 심었다.
다산초당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해 만든 것이다.  


정석(丁石). 다산은 18년의 유배생활을 끝낼 즈음 초당 뒤편 바위에 이같이 쓰고 새겼다.  정은 자신의 성을 쓴 것이다. 유배를 온 자는  이름을 말하거나 쓰지 않았다.


 다산으로부터 주역을 접하게 된 혜장은 어릴 적 섣부른 출가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바뀐 것에 대해 후회를 많이 한 모양이다. 자주 술을 입에 댔고, 폭음까지 마다하지 않더니 급기야 1811년 갑작스레 세상을 뜨게 된다. 다산은 큰 충격을 받는다. 이전까지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고, 차를 달여 마시는 일로 소일하던 그에게 이 사건은 인생의 또다른 전환점이 된다. 아끼던 혜장이 떠난 후, 의지할 곳도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벗도 없어진 유배지에서 오로지 저술활동에 몰입하게 된다. 해배가 되던 1818년까지 7년 여 동안, 쓴 책이 무려  500여권에 이른다.


그러고보면 다산의 삶도 참 퍽퍽하였다.  한때는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다가 신유박해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그 자신은 장장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지에서 또한 아끼고 아끼던 벗을 잃었으니, 퍽퍽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이다.  그러나 유배의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비록 어린시절 꿈꾸었던 이상을 모두 펼쳐보지 못했으나, 조선의 최고의 대학자로 영원한 이름을 남겼으니 말이다..





 팔자좋은 유람자의 허영일 수 있겠으나, 다산초당을 들르거나 남도의 다른 유배지들을 방문하고 나면,  나는 대체로 유배자의 시간이 부럽다. 현실세계에 대한 미련만 버릴 수 있다면,  이 풍광 좋고 고요한 유배지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오롯이 가꿀 수 있으니 말이다.

초당 마당 그늘진 곳에는 벌써 동백꽃이 지고 있다. 꽃이 피는 것도 잠깐, 사람의 삶도 잠깐일텐데,

근심에 묻혀 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으니.. 다산의 유배지에서 봄볕이나 잔뜩 묻혀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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