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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하게 Jun 14. 2024

달리기는 시가 된다


달리기를 하면 생각이 많아진다. 뜬금없이 시를 연재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다. 문득 올려본 하늘이 분홍빛이었고, “어제의 그믐/ 희석된 핏물”이라는 시구가 별안간 떠올랐다. 어쩌다 그런 연상을 하게 되었는지, 왜 하필 그 리듬이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떠올랐고, 이거다 싶었고, 잊지 않기 위하여 반복적으로 읊었다. 토씨 하나가 달라져도 이거다 했던 마음이 사라진다. 음절 하나에 발을 한 번 구르며 그날의 달리기가 끝날 때까지 주문처럼 외웠다. 붉어지다 어두워지는 하늘을 노려보며. 아무도 모르는 밤에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가느다란 달을 상상하며.


그날의 달리기는 시가 되었다. 하지만 잃어버린 시도 많았다. 너무도 많은 장면이, 문장이 떠올라서 하나도 제대로 외울 수가 없었다. 그런 날에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골키퍼가 된 기분이 든다. 허벅지가 터질 만큼 뛰었는데도 잃기만 한 패배자가 나였다. 오늘은 20분을 내리뛰었다. 달리기를 다시 시작한 후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쉬지 않고 20분을 뛰는 동안 머릿속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모처럼 음악을 들으며 뛰었더니 그러잖아도 부지런한 상상력이 앞뒤 모르고 튀어 다녔다. 상상이 많아서 통증을 잊었다. 달리기에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머릿속에 잘 비워지지 않았다.


남자가수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흐느끼듯 노래를 부를 때, 절정으로 올라가는 사운드를 따라 고개를 높이 쳐들었더니 저 위에서 사람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연인이 바닥에 누워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울음과 미소. 교차. 가속도. 연인이 포옹할 때 맞부딪힌 심장이 터졌다. 크리스털처럼. 이 장면을 시로 쓰고 싶었는데, 트레이닝은 끝났고, 나는 남은 체력이 없었다. 시가 되지 못하면 처음부터 다시 뛰고 싶어 진다. 못할 것을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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