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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하게 Aug 17. 2023

좋은 친구는 이정표가 된다

친구 M의 집을 다녀와서


M의 집에 초대를 받아 다녀왔다. 8월에 들어 외출다운 외출은 처음이라 설렜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도 체력이 바닥에 가까웠던지라 갑작스러운 외출 일정에 컨디션이 따라줄지 걱정되었다. 걱정만큼 몸이 무겁지는 않았다. 9시가 훌쩍 넘어 집을 나섰는데, 피부에 닿는 공기가 뜨겁지 않아서 신기했다. 입추가 지났다더니.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산책로는 선선했다. 햇빛이 눈부셔서 곧 더워질 걸 알았지만, 산책로를 걷는 동안은 가을의 기운을 미리 음미해 볼 수 있었다. 곧 좋아하는 계절이 온다. 공기의 냄새를 맡으며, 철마다 어김없이 떠오르곤 했던 몇몇 추억들을 헤아려봤다. 그중 몇 개나 기억하고 또 몇 개는 기억하지 못한 채 한 해를 지날지. 곱씹지 못한 추억은 빠르게 잊힌다. 과거가 초라해지는 데는 스스로의 무심함도 있었다. 아껴 쓰지 못한 물건이 먼지만 먹다가 제 기능을 잃듯이, 돌아보지 않은 과거도 일상적인 나의 무관심 속에 허무하게 사라진다. 그러니 지금 내가 기억하는 이름들은 얼마나 특별한지. 가끔 그 이름들을 불러본다. 미움도 원망도 없이. 내가 지나온 길 그 어귀에서 만났거나 헤어진 적 있다는 이유로. 과거는 미화되게 마련이고 나는 그 일을 애써 막으려 들지 않으려는 편이다. 늙지 않는 불화보다는 막연한 애틋함이 낫다는 생각이다. 밉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지만, 미움만이 그 사람의 전부인 적도 없었으므로.


친구 M의 집은 생각보다 더 가까웠다. M의 집 앞 정거장에서 바로 내릴 수 있는 버스가 있었다. 비록 나는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지만, 좋아하는 풍경을 실컷 감상할 수 있었기에 이편도 좋았다. 한 시간은 넉넉히 잡아야 닿을 수 있는 거리가 바로 옆 동네인 것처럼 느껴졌던 건 지하철을 타고 왔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M의 집으로 가는 길은 온통 초록이었다. 그의 집 문 앞에도, 집 안에도. 좋아하는 색에 초록색을 우선적으로 꼽아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초록색은 내게 특별한 영향력이 있었다. 초록은 나를 온화하게 만든다. 푸릇푸릇한 논마지기와 숲, 들풀 같은 것들을 보면서 나는 한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 시간 동안은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평화로울 수 있었다. 그런데도 초록색을 제일 좋아하는 색으로 꼽지 않는 건 희지도 검지도 않은 어중간한 영역에 고여서 썩고 있기 때문일까. 삭이지 못한 울분이 피처럼 붉기 때문일까. 그러니까 노란색을 인생의 테마색으로 써야 한다. 터무니없는 쨍함이, 조화되지 않는 명랑함이 나에게 필요하니까.


B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두 번의 약속을 어긋난 후에 만난 터라 더욱 반가웠다. M도 나도 B도 따져보면 다 오랜만이었지만, 그에 대해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떠들지 않았다. 간간이 이어 온 연락으로 저마다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지내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지난 만남 후로 줄곧 오늘의 만남을 기다려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알고 있지만 알고 있음을 자만하지 않는 관계. 맨 처음 안면을 트던 날처럼 마냥 신기하고 황송해서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를 만큼 정신이 없어지는 소요가 우리 주위를 세차게 휘돌다 사라졌다. 식탁을 가득 채운 상차림을 보니 내가 뭐라고 이런 귀한 대접을 받나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나라는 주어를 우리로 바꾸니 이만한 대접은 얼마든지 누려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좀처럼 놓지 못하는 사람에게 주어 바꾸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그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 얻는 세상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식사를 하고, 평소 즐겨 먹던 음식들로 후식을 이어가면서 우리가 나누는 건 재미 이상의 것들이었다. 한 사람이 가족과 환경과 동물과 음식과 친구와 책을 대하는 태도나 고민 같은 것들. 기껏 태어난 생명들이 하필 인간이어서 생겨난 문제들 마주하기. 그러고 있는 우리 역시 인간이었기에 저질러버린 일 부끄러워하기. 부끄럽지 않은 길 모색하기. 1년 뒤를, 10년 뒤를, 우리가 없어지고 난 뒤의 미래를 마땅한 우리의 몫으로 껴안기. 책임지기. 무겁지 않게. 감당할 수 있게. 오늘 당장 실천하도록. 말뿐인 다짐은 시간 낭비니까. 시간은 흐르고 말은 고이고 우리는 깊어지는 순간. 순간의 이음.


책쟁이들 아니랄까 봐 B도 나도 M의 작업실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친구의 책장을 볼 수 있다니. 얼마나 스페셜한 이벤트인가. B와 나는 그 방을 둘러보는 걸 무슨 숭고한 의식처럼 여겨서 바로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아끼는 과자를 가장 나중에 먹는 사람들처럼, “밥 먹고 책방 가야 돼”, 식사하는 도중 두어 번 눈짓을 주고받으며 결의를 다지기까지 했다. 그걸 본 M이 “(우리) 책방 가요?” 묻기까지 했으니, 방 주인 앞에서 우린 또 얼마나 진지했던 건지. M의 작업실은 책쟁이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공간이었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책장에 책상, 그 사이에는 오래 사용한 듯 보이는 유리문 책장 두 개가 포개져 있고. 독서용 의자와 간이 테이블까지. 발을 들여놓는 순간 책상 앞이고, 의자고 바닥이고 앉아서 책을 읽고 싶어지는 공간이었다. 시대, 분야를 넘나드는 소장 목록에도 새삼 놀랐지만, 그 많은 책들이 주인의 인성을 하나하나 다 말해주고 있어서 더욱 감탄했다. 방 안엔 작은 물건 하나를 허투루 들여놓은 게 없었다. 가장 좋아하는 걸 고르고 골라서 남겨놓았다는 느낌. 어딜 보아도 M의 것이라는 걸 알게 하는 사물들만 그 안에 자리했다. 올웨이즈 템으로 펜 하나를 겨우 찾은 나로서는 그저 경이롭기만 한 공간이었다. B의 작업실을 처음 보았을 때와는 또 다른 충격이 내 머리에 도끼처럼 꽂혔다.


나는 작업실이 없었다. 하지만 그려볼 순 있었다. 이미 작업실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친구들은 자꾸 나를 상상하게 만든다. 멀찍이 나의 꿈을 던지도록 하며, 그곳을 보라고 너의 것은 저기 있다고 자기 일처럼 신이 나서 떠민다. 너의 집, 너의 작업실, 너의 책, 너의 성공. 그곳에 자신들이 있을 거라고 의심하지 않으며. 나는 그곳을 향해 가는 듯 가지 못하는 듯, 결국은 가까워져 가는 것 같다. 좋은 친구들은 이정표가 된다. 갈 길이 너무 분명해 보여서 지금 여기 있는 내가 어처구니없게 느껴질 정도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B가 열불이 나서 이야기하던 책 제목이 묘하게 변주되며 귀가하는 내내 귓가에서 울렸다. 매미 소리 아득해지고 내일의 나는 선명해졌다. 숨이 턱 막히는 더위도 기꺼워지는 마음이었다.



2023. 0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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