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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긍정아가씨 Dec 21. 2024

발레 하는 나무늘보(2)

그래서 발레

몰랐을 때는 몰랐는데 발레의 문턱이 제법 낮아져 있었다. 지금은 성인 취미발레 대표적인 커뮤니티의 회원 수가 2만 명이 넘을 정도.


"몸이 많이 뻣뻣한데 제가 발레를 해도 될까요?", "그럴수록 더 하셔야죠." 이미 마음을 먹고 학원을 찾은 나에게는 별 의미 없었지만 이런 대화들을 주고받으며 주 3회 반을 등록했다.


나랑 같이 등록하는 분에게는 할인이 되는 3개월 등록을 권유하던데 나는 별로 오래 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지 굳이 3개월 등록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3개월 등록을 고민하는 나에게 한 달 해보고 결정해도 된다고 말했다.(나랑 같이 등록한 그분은 한 달 보고는 못 본 듯)


"발레슈즈는 반드시 신으셔야 하고요 복장은 편하게 하세요. 굳이 초보반에서는 발레복 안 입으셔도 돼요. 다만, 몸을 잘 봐야 하니까 붙는 옷을 입는 게 좋고요."


레깅스만 입으면 엉덩이가 도드라져 보여(내 안에 예의세포 계셔서ㅋㅋ 레깅스 만은 아니 되오!!) 그 위에 쇼츠를 겹쳐 입고, 상의는 최대한 몸에 핏 되어 보이는 걸로 골랐다. 발레슈즈는 온라인 쇼핑몰을 봐도 잘 못 고르겠어서 그냥 학원에서 파는 걸 사서 신었다.


이럴 때의 추진력은 꽤 빠르다. 2월 중순에 마음먹고는 상담부터 등록, 첫 수업까지. 3월 초 신학기에 맞춘 듯(뭔가 새롭게 시작하기에 딱 좋은 타이밍!) 그렇게 불과 보름여 만에 발린이 세계에 입문했다.


지난 여름부터 외출할 때면 모자를 빼먹고 나간 적이 없다가 삐죽 솟은 까까머리를 남들에게 보인다는 게 약간은 두려웠다. 그래서 가을과 겨울을 지나는 내내 모자로 머리를 가릴 수 있는 야외운동만 주구장창 해왔다.


그러나 인생에서 큰 일 한 번 치른 나에게 조금은 용기가 탑재됐나 보다. 모르는 누군가가 보면 머리스타일만큼은 무용고수로 보겠지 뭐~(그러기에 내 발레 실력은 금방 뽀록나는 왕왕왕 초보) 하면서 쿨내 나게 수업에 참여!


라고 하기엔 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에는 다소 오래 걸리는 편이라 쭈뼛거리면서 수업에 참여했다. 정말 쉬워 보이는 동작들인데 그걸 못 따라 하는 나, 못하는 나에게 스트레스 받기 보다는 너무 못 따라 하는 내가 웃겼고 그 과정에서도 땀이 뻘뻘뻘나는 게 신기했다. 수업시간이 80분이나 된다. 그런데도 음악을 들으면서 따라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네? 어느새 끝!


주 3회 반의 수업을 해당 월에 다 소진하려면 absolute beginner(완전 왕초보)반 수업만 들어서는 불가능했다. 왕초보반 보다 한 단계 높은 초급반 수업을 들어야 했는데 요가수업에 어울릴 만한 옷차림으로 초급반 수업에 들어갔더니 다들 레오타드에 발레용 타이즈, 스커트까지. 전부 다 내가 보아 온 발레 하는 사람들 옷차림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앞으로 계속 발레를 배울 거면 옷차림도 갖추라고. 그게 과해져서 ‘지네병에 이어 장비병도 획득하셨습니다’가 되긴 했지만. 몸에 붙는 요가복 상의를 구입할 돈으로 발레장비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오운완처럼 이발완(이번주 발레 완료) 기념으로, 한 달 잘 다닌 기념으로, 핑계는 많았다.


또 내가 사는 곳은 신도시에서도 이제 막 조성되기 시작한 동네. 발레학원까지는 집에서 가까운 곳을 골랐음에도 2킬로미터 정도는 떨어져 있었다. 당시 나는 휴직 상태.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라 발레 학원을 오고 가는 방식으로 걷기를 택했다.


발레수업 80분에 왕복 도보 5km 50분. 이 정도 운동량을 주 3회 하니 살도 빠졌다. 발레로 살 빼기 힘들다고 하던데 빠졌다. 시작하고 20여 일 만에 인바디를 측정했는데 평생 표준이상이었던 체지방률이 표준 범위에 들어가 있었다. 이건 아프고 살이 제법 빠졌을 때도 변화가 없던 거였는데.


2달 뒤 잰 인바디에서는 발레 시작 시점으로부터 4kg의 몸무게가 빠져 있었다. 인바디는 체성분에 따라 C자, I자, D자로 구분하는데 근육형 D자란다. 내 몸이. 발레 한 지 3달도 안 됐는데 말이다.


(TMI, 다시 일하면서 도보 걷기는 편도 걷기, 겨울에 접어들면서는 그 마저도 못하게 되면서 몸무게는 솔직하게도 늘어가는 중! 요 근래에는 인바디도 안 재어봐서 결과가 어떠려나 모르겠다.)


사람들이 다이어트를 할 때 눈에 보이는 효과가 있어서 계속하게 되는 원동력이 된다고들 했는데 나에게 발레가 딱 그랬다. 아마 식단 관리의 노력도 더해졌겠지만 그것도 그렇게 철저하게 하던 것은 아니었으니. 여튼 평생 인바디에서 보지 못하던 결과물을 시작 20여 일 만에, 3달여 만에 내 눈으로 보면서 못해도 지속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주변 지인의 귀띔으로 성인 취미발레인들의 커뮤니티가 있다는 소식도 접했다. 그게 또 새로운 세계였다. 각종 발레장비 정보와 취향을 공유하며 혼자 학원만 다니면서 찾은 정보들에서 한 차원 넓어진 범위로의 장비 세계를 알게 됐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발레 커뮤니티를 들락날락하며 중고 스커트도 사고, 레오타드도 사고. 그렇게 발레복 갯수가 늘어나면서 내 드레스룸 한 공간을 떡하니 차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산 장비들을 착용하기 위해서라도 해야 하는 이상한 논리.


그렇게 발레수업을 들은 지 어언 10개월 차가 되었다. 그럴 때의 나는 꽤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맞아, 내 어린 시절 좌우명은 '도전'이었지?


그리고 아주아주아주 더디지만 더디게라도 느는 나를 보면서 나머지 연습을 하는 애정도 보이고, 발태기도 겪고, 해볼 건 다 하고 있다. 여전히 힘들지만 재밌는 발레.(얘깃거리가 또 생기면 3편도 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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