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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코끼리 Nov 23. 2023

결혼을 하기는 했는데요

대충 한 결혼의 이야기

라파엘은 내가 만 스물여덟에 일본의 컨설팅 회사로 처음 이직했을 때 같이 일했던, 런던 사무실에서 출장을 온 동료였다. 내가 처음 한 프로젝트의 리더이기도 했고, 눈매가 날카로운 얼굴은 좀 나이가 들어 보이기도 해서 적어도 30대 중후반일줄 알았는데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보다 한 살 어려서 좀 놀랐던 기억이 있다.


라파엘은 결혼을 좀 일찍 했다는 사실을 일에서 아주 유용하게 활용했다. 컨설팅 회사에서는 나이가 들어보이기 위해서 뽀송뽀송한 20대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수염을 기르는 친구들이 있는데, 라파엘은 다른 전략을 활용했다. 어느 하루는 회의 중간에 클라이언트가 초콜릿을 권할 때, 이렇게 말하는 거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거 먹으면 아내한테 혼날 것 같아서요.”


그 한 마디에 오래 한 결혼생활, 잔소리 하는 아내, 중년의 비만, 성인병 등등 나이 든 느낌이 드는 이미지들이 차라락 펼쳐졌다. 20대 후반의 건강해 보이는 라파엘에게 아내가 식습관을 조절하라고 잔소리를 한다는 건 좀 믿기 어려워서, 우리 회사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물어봤다.


“초콜릿 이야기, 혹시 나이 들어 보이려고 일부러 그랬어?” 라파엘은 역시나, 흐흐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파엘은 알고 보니 정도 흥도 많은 친구였다. 그 프로젝트는 라파엘이 지난 6년간 한 프로젝트 중에서도 탑으로 꼽을 만큼 고된 프로젝트였다는데, 그렇게나 힘든 프로젝트에 생 초짜를 팀 멤버로 맡게 된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라파엘은 귀찮은 기색 없이 농담과 웃음을 섞어가며 일을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져서, 프로젝트가 끝나고는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셨다. 그때의 나에게는 결혼이 아직 아주 멀고 먼 미래처럼 느껴졌었는데, 나보다 한 살 어린 라파엘은 벌써 결혼이 3년차라는게 신기해서 물어봤다.  


“너 결혼 좀 일찍 한 편이잖아. 결혼 일찍 하면 어떤 것 같아?”

“결혼하면 어떻냐는 질문, 다른 사람들도 물어보더라고. 근데 결혼은 정해진 하나의 무언가가 아니라,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만들어나가는 그런 거라고 생각해 (marriage can be what you want it to be. It doesn’t have to be this fixed thing.)”


아직도 가끔씩 라파엘이 그 때 했던 말을 생각한다. 그 이야기를 나눈 3년 후 나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내가 인생에서 이룬 게 도대체 뭔지 고민하게 되는 서른 여섯살이지만, 아무래도 결혼 하나는 좀 잘 한 것 같다.


내가 한 결혼이 어떤 결혼인지를 말하자면, 아무래도 ‘대충 한 결혼’인 것 같다. 같이 살던 6살 연하의 남자친구와 시부야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서를 냈다 (임신을 한 것은 아니었다). 혼인신고서를 내기로 한 것도 그 날 이틀 전 저녁에 결정한 일이라, 전날은 증인이 되줄 사람들의 도장을 받으려고 신고서의 종이를 들고 동분서주했다. 증인 1은 우리 둘 다 사랑해 마지않는 친구인 신짱이었지만, 나는 타로의 대학 친구라는 증인 2를 아직 만난 적이 없다. 그날 저녁에 시간이 있는 근처에 사는 지인이 그 친구 뿐이었다. 게다가, 혼인신고서 제출 후 구청에서 걸려 온 전화에 따르면, 신짱이 증인란에 자신의 본적지 주소라고 적어낸 주소는 존재하지 않는 주소였던 것 같다. 하마터면 혼인신고서가 반려될 뻔 했다…


게다가 아빠한테 분명히 혼인신고서를 낸다는 이야기를 전화로 가볍게 했는데, 아빠는 내 말을 잘 안 들었던 것 같다. 그 후로 3년간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몰랐던 아빠는 어느 날 화들짝 놀랐다. 상견례? 물론 안 했다. 결혼 반지? 그것도 안 했다. 타로에게는 미국 영주권이 있어서 나도 신청을 했는데, 영주권 심사 때도 좀 걱정을 했다. 혹시 이 정도 마음가짐으로 결혼을 하면 가짜 결혼일까, 발각되면 어떡하지, 하고.


근데 이제는 결혼 6년차이다. 우리는 그 동안 두 번 같이 회사를 그만두었고, 함께 있기 위해서 미국으로 한 번, 한국으로 한 번 국제 이민을 했다. 서로 함께 있기 위해 큰 변화를 감수하고, 같이 짐을 싸고 짐을 풀고 함께 모험을 하던 중의 그 언젠가부터, 결혼은 다른 사람들에게 갖는 의미와는 다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뭔가 크고 소중한 것으로 변한 것 같다.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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