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고모는 수녀님이다.
지금은 100세를 향해 달려가는 엄마(내겐 친할머니)를 돌보고 있다.
몇 달 전부터 할머니 집에 예전 동료 수녀님 한 분이 같이 머물고 있다.
그 수녀님은 특별한 수도원에 계셨기에 오랫동안 세상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허리 골절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회복하는 동안 갈 곳이 없어 작은 고모가 오라고 했다.
추석이 다가오자 고모는 고민이 생겼다.
큰아들과 작은 아들이 방문하면 수녀님은 어디에 있지?
고모는 큰아들인 우리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의 끝에 아빠는 추석 전에 방문하여 엄마를 뵙고 잠은 근처 호텔에서 자기로 했다.
그리하여 어제 나는 엄마 아빠를 태우고 양양에 도착했다.
평일이라 숙박료가 저렴해 방 두 개를 잡았다.
엄마는 같이 자면 되는데 왜 돈을 낭비하냐고 했다.
나는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
아침 3시간을 달려 양양에 도착하자마자 들어간 곳은 밥집이었다.
바다가 코 앞이었지만 먹는 게 우선이었다.
황태국밥을 파는 식당이었다.
나는 황태도 국밥도 좋아하지 않지만 그 집이라면 투덜거리지 않을 것이다.
양양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 중 하나라 월요일이었음에도 대기번호를 받아야 했다.
상호명은 감나무식당.
하지만 앞마당에는 감나무 대신 목련나무가 있다.
송이버섯이 들어간 국밥을 시켰다.
국밥이라기보단 황태죽에 가깝다. 버섯 향이 어찌나 진한지. 국물이야 말할 것도 없고.
두둑해진 배를 두드리며 송전 해수욕장을 걸었다.
파도가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서핑 슈트를 입은 남자 여럿이 파도를 타려 애쓰고 있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빵집.
커피도 한잔 마시고 내일 아침에 먹을 빵도 사야 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댁은 언제 가냐고 물으신다면 아직 멀었다.
고모가 오후 5시에 들어오라고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원래는 함스 베이커리에 가려고 했다.
거기 빵이 저렴하면서도 맛있다.
커피도 마실만한 곳을 찾다 새로운 곳을 발견했다.
여운포리 빵집. 칭찬이 난무하기에 가보기로 했다.
빵집은 논밭 옆에 있었다.
밖에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여럿 있었는데 등받이도 없고 아무 볼 것 없는 풍경이었다.
모과랑 왔다면 다른 카페를 다시 검색했을 거다.
하지만 부모님이 먼길 오느라 지친 상태였기에 그냥 거기서 쉬기로 했다.
아빠는 통밤고구마 깜빠뉴를 골랐다. 나는 소금빵과 송화버섯 치아바타를 집었다.
그리하여 다음 날 아침 내 앞에는 세 가지 종류의 빵이 놓여 있다.
호텔이라 식기 도구가 없기에 집에서 스테인리스 접시와 포크를 챙겨왔다.
집에서 가지고 온 원두와 핸드밀로 커피도 한 잔 내렸다.
이건 곰팡이균을 제거한 비싼 원두라 몸에 나쁘지 않다고 엄마를 안심시켰다.
배가 불러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는 엄마는 빵 하나를 맛보더니 달지 않다며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엄마 말대로 빵은 하나도 달지 않았다.
통밤고구마 깜빠뉴는 찐밤과 찐고구마가 꽉꽉 채워져 있어 무늬만 빵인 것 같았다.
빵 껍질도 고소하고 쫄깃했다.
솔직히 시골 빵집이라 기대하지 않았다.
맛있는 깜빠뉴 찾는 게 쉬운 건 아니니까. 여기가 그 집이었다.
정말 빵을 잘 만들었다. 소금빵도 버터향이 진했다.
치아바타는 아쉬웠다. 내가 원한 건 좀 더 기름진 맛이었는데 여기 빵은 담백하고 순수했다.
모든 빵이 건강함을 온몸으로 풍겼기에 엄마는 칭찬을 거듭하며 빵을 집어 먹었다. 엄마 그거 내꺼야.
아빠가 고른 건 ‘철판 제육 덮밥’이었다.
안타깝게도 방문한 편의점에 즐겨먹던 ‘참기름 김치볶음밥’이 없었기 때문이다.
빨간 양념에 흰밥을 싹싹 비벼 드신 아빠는 밖에서 파는 건 다 맛있다고 선언했다.
엄마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밖에서 파는 건 다 몸에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엄마에게 그 말은 그저 허공에 흩어 사라지는 연기와 같았다.
엄마가 내 빵을 절반이나 먹어버렸기에 나는 배가 고팠다.
덕분에 점심 때 고모가 준비한 LA 갈비를 굽는 족족 입안에 집어넣을 수 있었고, 고모의 흐뭇한 표정을 선물로 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