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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Mar 06. 2020

다수결, 그게 최선입니까.

이해가 먼저, 표결은 나중에.


 최근에 집을 이사했다. 직장과는 거리가 좀 멀어졌다는 단점이 있지만, 지은 지 4년도 안된 신축 아파트 단지인 데다 인근에 녹지가 조성되어 있는 환경이라 무척 만족스럽다. 단 하나 단점이 있다면, 21층인 우리 집에선 전화가 잘 터지지 않는다는 것.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면 마치 엘리베이터에서 통화하는 것처럼 끊기다 이내 두절되고 만다. 


 통신사에 문의를 했더니, 같은 단지에 나와 같은 문의가 있어 SKT, KT, LG 등 3사가 관리사무소에 단지 내 기지국 설치를 제안했다고 한다. 이 문제는 입주민 대표자 회의에 상정되었고, 전 세대에 걸쳐 찬반 의사를 취합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주민들의 과반수가 반대하여 부결되었다며, 통신사 상담 직원은 연신 죄송하다고 할 뿐이었다.




 어떤 시골 부락에 13가구가 살고 있었다. 읍내와 비교적 가까운 아랫마을에는 10가구가, 좀 떨어진 윗마을에는 3가구가 살았다. 교통이 매우 불편했던 이 마을에 읍내까지 버스가 다닐 수 있는 신작로를 내는 기로 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어디까지 길을 내야 하는지 논쟁이 벌어졌다.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윗마을까지 길을 내면 읍 재정에 부담이 되고, 가구별 부담도 늘어나는 것이 문제였다.

 아랫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자기네 마을까지만 신작로를 내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간의 불편함을 누구보다 잘 알던 마을 사람들이기 때문에, 윗마을 사람들도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같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최소한도의 예산 증액으로 윗마을까지 연결할 수 있는 건설 계획을 고안해 냈고,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었다.

'사회과 탐구 5-1'(1989), 문교부 中 (내용 요약)


 위 사례에서 충분한 토론과 이해를 거치지 않고 바로 표결에 들어갔다면 어땠을까. 아마 신작로는 아랫마을까지만 놓이고 말았을 것이다. 다수의 논리에 의해 소수가 입는 불편은 묵과되기 십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수결의 원리’가 가장 민주적인 의사결정 방법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복잡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다수결만큼 빠르게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수많은 절충안들은 묵과되고, 충분한 토의와 공감이 결여된 다수결은 ‘다수의 횡포’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 아파트 사례도 마찬가지다. 동별 대표가 각 세대를 돌며 "'무선전화 기지국 추가 설치'에 대해 찬반 투표를 받고 있어요.”라며 문을 두드릴 때, 통화에 별 문제가 없는 저층 세대들은 “우리 집은 문제없는데? 기지국 많아지면 전자파만 많이 나오고 뭐가 좋아.”라며 반대표를 던졌다. 이에 따른 장단점이 제대로 고지되지도 않고, 고층 세대의 불편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졸속으로 이루어진 찬반 표결의 결과는 너무나 뻔하다.

 



 비단 찬반투표라는 형식을 거치지 않더라도, 이와 유사한 사례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살 만하니 소외계층에게 쓰이는 복지 예산을 ‘퍼주기’라고 폄하하는 목소리는 여론의 탈을 써 정부를 압박하고, 기본적인 권리를 지키기 위해 단체행동을 하는 소수자들에게 다수의 기득권 층은 냉소적인 시선을 보낸다. 이는 사회가 점점 각박해지면서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해진 우리 사회의 풍조와도 무관하지 않다. 계층 간, 성 간, 세대 간의 단절은 타인의 사정에 대해 무서울 정도로 냉정한데, 이와 같은 사회에서 공동체적 가치가 설 자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노인들을 위한 대중교통 무상 정책,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방학 중 식비 지원, 장애아를 위한 학교 설립과 이동권 보장, 여성을 위한 복지 정책 등은 충분한 정책 토의가 이루어지지 전에 여론을 빙자한 다수에 의해 선동되고, 때론 묵살당한다. 


 “몸도 성치 않은데 왜 밖에 기어 나와서 폐 끼치고 지랄이야.”

 “내가 낸 세금이 저런 애들 밥 주는데 쓰인다고? 이 빨갱이 새끼들.”


 인터넷에 난무한 이러한 언행들은 얼마나 우리 사회가 나와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단절되어 있는지 잘 보여준다. 심지어 같은 아파트 단지에는 인구통계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동질성 있는 사람들이 살아간다. 하지만 층과 층, 호와 호로 구분된 아파트에서조차 타인과의 단절은 심하고, 그 결과 앞서 언급한 문제들이 발생한다.




 물론 다수결은 매우 편리한 방법이다. 서로 언성을 높여가며 싸울 필요 없고, 다수의 힘을 무기로 손쉽게 소수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다수결에 의한 문제 해결은 미봉책에 불과할 뿐 장기적인 관점에서 집단의 통합을 이끌어 낼 수 없다.


 예를 들어, 저층 세대를 위한 방범 시설을 설치한다고 했을 때, 나를 포함한 고층 주민들은 그들을 위해 찬성표를 던지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돌아오는 실익 없이 관리비만 오르는데, 굳이 찬성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면 공동체는 분열될 수밖에 없다. 이해관계가 갈리는 모든 이슈에서 특정 소수는 항상 패배하고, 자신들의 고충을 이해 못하는 불특정 다수의 누군가를 원망할 것이다. 다수결보다 나은 해결책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이슈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어야 한다. 

 기지국을 어디에 설치할 것인 지, 아파트 내의 평균적인 통화품질이 어느 수준이며, 설치 이후 얼마나 개선되는지, 그리고 상시 발생하는 전자파에 비해 추가적으로 노출되는 전자파는 어느 정도인지 등등 판단에 필요한 정보가 엘리베이터나 게시판에 공지되었어야 했다. 팩트에 기반하지 않은 막연한 추측과 우려는 올바른 의사결정을 가로막는다. 그 이후에 입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결정하여도 결코 늦지 않았다.


 그다음 필요한 것은 입주민 상호 간의 이해와 교류다. 

 요즘에는 아파트 같은 동에 살더라도 이웃이라는 개념이 희박하다. 우연히 마주쳐도 그냥 모른 척 스쳐 지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서로를 이웃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윗집 사는 사람이 겪는 불편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다.


 만약, 이름까지는 모르더라도 몇 층에 사는지 알고, 평소 가벼운 목례 정도는 건넬 수 있었다면, 엘리베이터에서 최소한 이런 이야기는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게시판에 이런 게 붙었는데, 21층에는 정말 전화가 잘 안돼요?”


 구성원의 입을 통해 나오는 목소리는 팩트만큼이나 중요하다. 팩트가 이슈의 중요성과 효과를 객관적으로 알려준다면, 실제 불편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는지”, 공감하고 일깨워주는 계기가 된다. 팩트와 목소리, 둘 중 하나라도 결여된다면 구성원들의 정확한 판단과 합리적인 의사결정은 기대하기 어렵다.




 문제 해결을 위해 나는 일단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했다. 관리사무소장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이미 결정 난 사안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할 뿐이었다. 그와 논쟁을 벌이는 건 큰 소득이 없을 것 같다. 일단 엘리베이터나 공동현관에서 마주치는 이웃들과 인사를 나눠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0층이나 19층에 사는 분들께는 같은 문제가 있는지 기회가 있으면 여쭙고, 이러한 불편이 나 혼자 겪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관리사무소와 입주민 대표에게 전달하려고 한다. 다수결에 의해 이루어진 결정의 오류는 소수의 연대를 통해 바꿔나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나아가 앞으로 비슷한 사안이 있을 경우, 좀 더 바른 방법으로 소통하고 결정할 수 있길 소망해 본다. 소수가 겪는 불편이 그들만의 문제로 치부될 경우, 공동체의 존재 이유는 사라진다. 지금은 다수에 속할지라도 역시 언젠가 외면받는 소수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이 있을 때, 그리고 타인의 고충에 공감할 수 있을 때, 우리 사회는 조금 더 성숙해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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