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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Jan 01. 2021

편지

보고 싶은 친구야.


 친구야. 잘 지내고 있니.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다면 너도 서른아홉이 되었겠구나. 결혼은 했니, 너도 아빠가 되었니. 궁금하구나. 쉽사리 서른아홉 살이 되었을 너의 얼굴이 상상되지 않는다. 나에게는 여전히 열아홉 살 너의 모습이 마지막이었으니. 너는 무척이나 머리와 눈썹 숱이 많았었지. 지금도 그렇니. 나는 머리칼이 많이 빠지고 모질도 많이 가늘어졌어.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나는 너의 무성한 머리숱을 보고 겨우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 않을까.

 비가 많이 오던 88년 어느 여름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옆 집으로 너희 가족이 이사 왔던 때가. 옆 집에 살았지만 너희 집은 우리 집과 많이 달랐어. 너희 집은 개가 많았지. 특히 ‘촐랑이’라는 잡종견은 동네 골목을 지나다니다가 아무 수컷과 짝짓기를 하고 그 조그만 몸으로 아홉 마리, 열 마리씩 새끼를 낳곤 했어. 너를 따라 어두컴컴한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던 생각이 난다. 그곳에 고무 대야 안에서 열 한 마리나 되던 새끼를 품에 안아 젖을 물리던 촐랑이가 있었지. 어떻게 그 작은 몸으로 그렇게 많은 새끼들을 뱃속에 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해. 너를 졸라 그중 한 마리를 데리고 집에 왔다가 나는 강아지와 함께 쫓겨났어. 우리 엄마는 개를 싫어하셨거든.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여름이면 털 갈이 하는 개들 때문에 너희 어머니와 많이 싸우셨다고 해.

 항상 궁금했었지. 어린 내가 봐도 너희 부모님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 보이셨거든. 왜 고등학생이었던 너의 형은 너는 물론이고 골목에 사는 네 친구들에게 한 번도 살갑게 대해주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이 있으면 좋았을 것 같았는데, 너에게 형에 대해 들은 적은 별로 없었지. 너희 집에는 그 시절 흔치 않았던 가정용 노래방 기기와 큰 전축도 있었는데 연로하신 네 외할머니는 왜 폐지를 줍고 다니셨을까. 나중에야 알게 되었어 너희 집에는 복잡한 가정사가 있었다는 것을.

 어릴 땐 네가 부러웠어. 너의 어머니는 네가 갖고 싶은 걸 다 해주셨지. 너는 나보다 더 좋은 유치원에 다녔고, 네 방에 있는 어린이 전집들과 장난감은 우리 집에 있는 것보다 비싸고 세련된 것이었지. 내가 고모나 삼촌에게서 조립식 로봇 세트를 선물 받으면 다음 날 네 손에도 똑같은 것이 들려있었어. 나처럼 비슷한 또래의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하나를 가지고 형제끼리 다툴 일도 네겐 없었지.

 우린 참 많이 싸웠어. 초등학교 3학년 때 놀이터에서 같이 놀다 싸움이 붙었던 일 기억하니. 나는 네 주먹에 코를 정통으로 맞았고 코피를 줄줄 흘렸지. 다른 아이들의 부축을 받으며 엉엉 울며 집에 돌아왔던 날을 기억해. 그날 밤, 너희 어머니가 우리 집에 사과하러 오셨어. 평소와 달리 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와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너희 어머니가 말씀하셨어. 너희 어머니 말씀을 들으며 나는 눈물을 뚝뚝 흘렸어. 코피가 나고 싸움에 져서 분했던 눈물만은 아니었을 거야. 그렇게 싸워놓고 너도 마냥 의기양양했던 건 아니었단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지.

 우린 그렇게 싸우고도 언제 또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같이 어울려 놀았지. 그 골목에는 유독 우리와 동갑인 친구들이 많았어. 여름이면 긴 해를 핑계 삼아 놀이터와 공사장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얼음 땡을 했고, 겨울이면 연탄재를 굴리며 눈사람을 만들었어. 지금 생각해도 그때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지는데, 그 당시에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기억을 담을 수 있었을까.

 너는 몇 안 되는 나의 초중고 동창이었다. 우린 동창들이 많지 않은 중학교에 진학했지. 3년 후, 대부분의 중학교 친구들이 대단지 너머에 있는 남고에 배정받을 때, 우린 또 함께 산 밑에 자리 잡은 공학에 입학하게 되었어. 12년을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우린 세 번 같은 반이었지. 성일 국민학교 5학년 10반, 한산중학교 3학년 8반, 그리고 둔촌고등학교 3학년 2반.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너는 우리 옆 집을 떠나 이사를 갔어. 물론 다른 도시로 간 건 아니기 때문에 전학을 가진 않았지. 학교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정 반대 방향에 살았는데 너는 굳이 아침마다 우리 집까지 와서 초인종을 눌렀어. 초등학교 때처럼 나와 같이 학교에 가고 싶었던 거지. 아침잠이 많았던 나는 네가 우리 집에 올 때까지 등교 준비를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거의 먼저 가라며 너를 돌려보냈어. 그땐 몰랐어. 그게 그렇게 고마운 일인 줄.

 너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심성 좋은 아이였지만 안타깝게도 그다지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어. 중3 때 담임 선생님은 네게 공고에 가라고 했지. 하지만 겨우 너는 턱걸이할 수 있는 내신 성적으로 일반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어. 딱히 너를 멀리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아무 생각 없이 같이 뛰놀던 벌거숭이 어린 시절 때는 몰랐던 우리 사이의 간극이 생긴 게. 머리가 커진 우리는 더 이상 학교가 끝나면 집에 와 동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어졌지. 학교에는 서로 외에도 다른 친구들이 많았고, 관심 주제나 꾸는 꿈이 비슷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게 되었어. 어느 날부터 너는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고, 나도 서운해하지 않았지. 집 방향이 달랐으니 같이 걸으며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고, 딱히 그 기회를 만들지 않았어.

 고등학교 2학년 때 딱 한 번 무단 외박을 한 적이 있었다. 아침에 아버지께 크게 혼나고 집에 들어가지 않은 날이었지. 속옷도 칫솔도 없이 교복차림이었던 나는 네가 생각났어. 예전처럼 가깝지는 않지만 그래도 너라면 재워줄 것 같았거든. 오랜만에 찾은 너희 집은 뭔가가 달랐어. 주소와 건물은 예전 그대로이지만 너는 나를 꼭대기에 있는 옥탑방으로 안내했다. 옥상 문 앞 빈 공간에는 어디서 많이 본듯한 가재도구들이 비닐을 덮은 채 쌓여있었어. 한참을 쓰지 않은 듯한 가정용 노래방 기기와 커다란 TV, 게임기와 컴퓨터. 내가 한 때 부러워했던 너희 집의 아이템들이었지. 그 넓은 집 거실을 장식하며 영광을 뽐내던 그것들은 마치 폐기를 기다리는 고물들처럼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뿐이었지.

 책상도 없는 너의 조그만 방에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면서도 나는 네게 묻지 않았다. 너희 집 어떻게 된 거냐고. 그리고 너도 먼저 말하지 않았지. 사실 너의 말을 듣는다고 해도 위로해 줄 자신이 없었어. 사실 홧김에 무작정 무단 외박을 감행하긴 했지만 그때 내 머릿속은 뒷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꽉 차서 너희 집 사정을 시시콜콜하게 들을 수 있는 여유가 없었거든. 어쩌면 나는 네가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몰라. 아니, 확실히 그랬어. 해가 뜨기도 전에 나가는 나에게 너는 더 자고 아침 먹고 같이 학교에 가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어. 아침에 너희 부모님을 뵙는다면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랐거든.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우리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같은 반이 되었지. 그리고 그 해는 우리의 학창 시절 마지막 해이자, 내가 기억하는 너의 마지막 모습이 남은 시기이기도 해. 그럭저럭 상위권을 유지하던 나에게도 그 해는 무척 힘든 해였다. 너와 내가 다니던 학교는 확실히 입시에 신경 써주는 곳은 아니었어. 2학년까지 거의 방치되다가 3학년이 되니 알아서 각자 갈 길을 찾아야 했지.

 그 무렵 나는 독서실이 문 닫는 새벽 두 시까지 공부를 했고, 학교에서는 거의 잠을 잤어. 그러면 너는 한 시 무렵에 전화를 하곤 했다. 아마 너도 공부를 하다가 답답해서 수화기를 들었겠지. 눈을 비벼가며 공부하다가 너의 전화를 받았다. 통화는 짧지 않았어. 전화를 하다가 문 닫는다는 소리에 독서실을 나서기도 해야 했지. 처음에는 들어주다가 나중에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전화 통화하려고 그 시간까지 깨어있는 게 아니었으니. 그러다 결국 너에게 화도 몇 번 냈어. 그게 확실히 효과는 있었어. 너에게 전화가 걸려오는 빈도는 점점 줄어들었고, 여름방학 무렵부터는 걸려오지 않았으니까.

 ‘다음’에 우리 학교 학생들만 모여있는 카페가 있었지. 네게 전화가 더 이상 걸려오지 않을 무렵, 너는 거기에 꽤나 긴 글을 올렸어. 당시 네가 나 말고 누구누구에게 비슷한 하소연을 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 글에 수신자가 여럿 있었다면, 1번 수신인은 분명 나였을 거야. 너는 그 글에 너의 목표 대학과 학과를 적었어. 그 학교는 나도 끝까지 열심히 해야 갈까 말까 한 곳이었기 때문에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너는 분명 진지하고 절망적이었겠지만 나는 그때 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어. 이제 와서 말한다. 정말 미안해.

 그때까지의 인생을 한 번 더 살아본 지금에야 그때의 네 마음을 헤아려 본다. 사람은 어려운 시기에 처해야 과거의 잘못을 뒤늦게 후회하나 봐. 꼭 나 역시 상처 받고 힘이 들어서야 뉘우치는 나란 사람은 참으로 비겁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내가 완전군장에 소총을 메고 행군을 하고 있었다면, 너는 거기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60미리 박격포를 머리에 짊어진 채 걷고 있었을 거야. 나는 내 갈길 급하다는 핑계로 너의 아픔을 보듬어주지 못했지. 사실 마음만 먹으면 왼쪽 다리에 찬 모래주머니 정도는 내가 들고 가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때 난 너무 모질었어.

 생각해보면 늘 그랬다. 여섯 살 때부터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13년간 친구였으면서 더 많이 베푼 건 항상 네 쪽이었어. 너희 집에 가면 너는 네가 갖고 놀던 장난감을 내게 주었지. 먼 곳으로 이사를 간 후에도 같이 학교에 가자며 온 것도 너였다. 반대로 나는 한 번도 먼저 너희 집에 간 적이 없었어. 먼저 불러서 같이 놀자고 한 것도 너였고, 그날 밤 거리낌 없이 재워준 것도 너였다. 너는 모범생 축에 끼어 선생님들한테 인정받는 나를 자랑스러워했지.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 오히려 익살을 떨며 달래주던 것도 너였다.

 9년 전 외국에서 근무할 때, 네가 어쩌다 내 동생과 우연히 만났다는 걸 전해 들었어. 외대 앞에서 작은 삼겹살 집을 하고 있다고. 생전에 많이 편찮으셨던 아버지는 너의 극진한 노력과 무관하게 숨을 거두셨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는 유산을 두고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이복형과 분쟁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참으로 안타까워 연락해보려 했지만 동생도 연락처는 없다고 하더라. 하지만 그때 연락처를 받았더라도 나는 네게 전화를 걸 수 있었을까.

 그제 라디오를 들으며 퇴근하는 길에 015B의 ‘나의 옛 친구’가 흘러나오더라. 그 노래를 들으니 네 생각이 나 잠시 나는 눈물을 흘렸다. 비록 너는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키가 아주 작지도’, ‘얼굴도 귀엽게 생긴’ 친구는 아니지만 어릴 적에 늘 붙어 다닌 친구였지. 지금에서야 말한다고 해서 네게 닿지도 못하겠지만, 친구야 정말 미안하다.

 어디선가 너도 30대 후반의 고된 짐을 지고 아침을 맞았겠지. 친구야. 언젠가 다시 만날 때 알아볼 수 있도록 너무 고생해서 늙지 않았으면 좋겠다. 빽빽할 정도로 풍성했던 머리칼도, 익살스러웠던 너의 눈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끄럽지만 33년 만에 처음으로 말해 본다. 보고 싶다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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