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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Oct 16. 2018

노동의 원죄

과연 과학기술은 노동을 구원할 것인가.


 얼마 전 회사 일로 22년 전인 1996년에 작성한 품의 복사본을 찾아 읽은 적이 있다.


 반듯한 바탕체에 단순한 표 편집. 문서 우측 위에 '담당, 과장, 부장, 임원' 순으로 가지런히 나열된 결재 확인란. 아마도 '아래아 한글'로 작성되어 끼익 끼익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도트 프린터로 출력되었을 것이다. 당시에 비하면 오늘날을 살아가는 지식노동자의 업무 생산성은 얼마나 혁신적인가. 오늘 내가 했던 일을 22년 전에 똑같이 했다고 가정해 보자.




 1996년 10월 어느 월요일, 요제린 대리는 지난주 싱가포르에 송신한 팩스 문의의 답장을 받았다. 팩스를 꺼내 영한사전을 펴 놓고 더듬더듬 내용을 파악하고, 파악한 내용을 아래아 한글로 다시 옮기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기대했던 것보다 내용이 충분치 않아 아무래도 데이터 보충이 필요할 것 같다. 아무래도 오후에는 외근을 나가야 할까 보다. 점심을 먹고 국회도서관에 외근을 나가 관련 자료를 복사해 사무실로 돌아오니 어느덧 오후 다섯 시. 복사해 온 시장 데이터를 하나하나 계산기에 넣어 성장률 계산, 그리고 아래아 한글 표에 숫자 입력. 참, 타 부서 사람들이 저녁 먹으러 가기 전에 후다닥 플로피디스크를 가지고 뛰어가 업무 관련 문서를 복사해 온다.


 "먼저 갈게. 얼른 들어들 가."

 

 보고를 드려야 하는데 과장님은 퇴근하신다. 결국 아홉 시 조금 넘겨서까지 독수리 타법으로 두 페이지짜리 보고 문서를 완성하고 도트 프린터로 출력했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한다. 배가 고프다.


 다음 날. 업무가 시작되자마자 과장님께 보고를 드렸다. 다행히 한 번에 성공! 자, 이제 피드백을 다시 싱가포르에 보내야 한다. 영작은 물론 영타로 타자를 치는 건 80년대 학번인 요 대리에겐 어려운 일이다. 영문과를 졸업하고 올해 갓 입사한 92학번 신입사원에게 대충 이런 내용으로 써달라고 지시한다. 부장님께 결재를 올리기 위해 문서를 조금 수정하고 결재판에 끼우는 사이, 후배가 넉 줄짜리 영어 메일을 써왔다. '디어 수잔, 땡큐 포 유어 피드백. 블라블라 블라.' 싱가포르에 팩스를 전송하고, 보고문서는 복사하여 유관 부서에 전달하고 오니, 과장님이 말한다.


 "자, 요 대리 왔으니 밥 먹으러 갑시다. 오늘은 도가니탕 어때?"


참치 한 마리 접대비 결재 올립니다.




 2018년 10월 어느 월요일, 또 다른 요 대리는 주말에 뉴스에 난 '한-아세안 무역협정' 때문에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싱가포르 지사에 메일을 보내 몇 가지 사항은 문의한다. 오전 10시, 지사 직원들이 출근할 시간. 담당자가 메신저에 접속하자, 요 대리는 미안한데 urgent라며 빠른 회신을 재촉하였다. 그 사이 그는 구글에 접속하여 밤 사이 올라온 뉴스들을 검색하고, 코트라 사이트에 접속하여 몇 가지 데이터와 법령을 수집한다.


 점심시간 직전, 싱가포르 지사에서 피드백이 도착했다. 전문용어들이 섞여 있어 문장이 좀 난해했지만 구글 번역기를 돌리니 대충 문맥은 파악이 가능하다. 정말 어려운 단어는 네이버 영한사전으로 뜻을 찾는다. 생각보다 자사에 대한 영향도가 높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결론이다. 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문서 작성에 돌입한다. 수집한 데이터를 엑셀에 넣어 가공한 후 인터넷 데이터와 싱가포르 지사의 의견을 첨부하여 한 장 짜리 문서로 만든다. 오후 세 시, 팀장님께는 간단히 보고 후 메일로 보내드린다. 유관 부서 사람들은 해당 메일에 참조로 공유하고, 싱가포르 담당자에는 간단히 메일로 감사 인사 메일을 전송한다.


 이렇게 한 건 해결하고 나니 오후 네 시. 수고했으니 커피나 한 잔 하러 가야겠다.





 96년의 요 대리는 14시간, 2018년의 요 대리는 6시간 걸려 같은 일을 끝마쳤다. 시간의 양뿐 아니라 물리적인 에너지 소모량도 차이가 크다. 96년의 요대리는 외근으로 20km를 이동하며 다른 사람의 시간도 빌려 썼지만, 2018년의 요 대리는 자리에 앉아서 혼자 모든 것을 해결했다. 또한, 96년의 요대리가 플로피 디스크, 계산기, 영한사전, 도트 프린터, 내선 전화, 팩시밀리, 복사기, 결재판 등등 많은 사무용품을 필요로 할 때, 2018년의 요대리는 자기 자리에 있는 노트북 컴퓨터 한 대와 복합기로 모든 업무를 수행해 냈다.


 그런데, 이렇게나 노동 생산성이 증가했음에도 난 왜, 오늘도, 야밤에 퇴근하는가!




 1993년, 국민학생 시절에 방문했던 대전엑스포를 기억한다. 더운 여름날, 여섯 시간 줄 서서 입장했던 '테크놀로지관'에서 우리는 터치 스크린에 깜짝 놀라고, 공중에 떠서 느리게 운행하던 자기 부상 열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 과학기술은 우리의 미래를 이렇게 제시했다.


 미래에는 통신기술의 발달로 재택근무 환경이 마련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른이 된 21세기, 사람들은 집에서 편하게 일할지도 모릅니다.


 오오, 네 말이 맞았네요. 우리는 지금 사무실 밖에서도 일하고 안에서도 일하고 있습니다! 메일과 전화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모바일 메신저는 주말 영화관에서도 '까똑'하며 울어댄다.


 어쩌면 기술의 발달이 인류로 하여금 적게 일하고 많이 쉬게 해 줄 것이라는 환상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따먹고 평생 일해야 하는 원죄를 짊어진 이후,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를 짓던 노예나, 중세 유럽 장원의 농노나, 산업혁명 시대 영국 맨체스터 소년 광부나, 2000년대 지식노동자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뼈 빠지게 일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난 걸까.



 얼마 전 브런치에 소개한 TED 강연에서, 연사인 前 구글 차이나 사장 리카이푸(李開復)는 AI와 머신러닝의 미래를 말하면서 루틴 하고 반복적인 일들을 담당하는 기술 덕분에 인간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 내다보았다. 물론 그런 세상이 올 수도 있고, 그러길 진심으로 바란다. 실제로, 8, 90년대 과학자들이 내다본 2000년대의 모습은 이미 대부분 현실화되었다. 오늘날 로봇은 집 청소를 맡아주고, 사람들은 개인 무선 단말기를 가지고 다니며 언제 어디서든 필요한 지식을 얻는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2, 30년 전에 비해 행복하고 더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는가. 이 물음에 답을 한다면, 자신 있게 'Yes'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AI와 머신러닝이 머지않은 미래에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더 인간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지, 이 역시 지켜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퇴근길 밤공기를 마시며 하늘을 바라본다. 이러한 인간들의 노력을 비웃듯, 하늘 위의 신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과학기술의 바벨탑이 쌓아 올려질수록, 노동의 기대 수준도 함께 높아질 것이니, 너희 인간은 편할 생각하지 말고 노동의 원죄 속에서 평생 고되게 일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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