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두바이』 출간 작업 비하인드 스토리
출판사에서는 퇴고 작업을 함께 시작하며 세 번의 피드백과 보완 작업이 이루어질 거라고 했습니다. 사실 당시 그것은 말이고 열을 이룬 단어들의 행진일 뿐, 어떤 여정이 될지 저는 알지 못했어요.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그를 결코 알 수 없는 모든 일들이 그런 것처럼 이요. 그러니 더 큰 두려움이 덮치기 전에 그저 한 발을 더 내디뎌 보는 수밖에요. 퇴고 작업 1차에는 써둔 원고를 틀에 맞춰 넘기기에 바빴습니다. 2차에서는 분홍 센서가 작동하더니 그 속에 적나라하게 벗은 나를 지워 갔어요. 그리고 3차, 그녀가 내게 다시 온건 그 마지막이라는 라벨이 붙고 난 후였습니다. “네가 보이지 않잖아." 놀란 그녀가 달려들어 나를 칠해 넣기 시작했죠. 긴 글을 써낸다는 것은 짧은 글만 뚝딱이던 저에게는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었을 거거든요. (단거리 선수가 장거리를 뛰면 일반인이 아닌가요?) 그저 멀쩡한 머리와 몸뚱이, 발을 달기에 바빠서 좋아하는 옷을 골라 입히고 단화를 신켜 머리를 땋거나 스카프를 둘러 주는 일 같은 건 하지 못했다는 게 그제야 보였습니다. 신기하죠. 마침내 작업이 설레고 재미있어진 건 저에게 큰 위안이었어요. 그렇게 퇴고의 과정은 신비로운 여정이었습니다. 달려야 한다는 압박감, 잘 해야 한다는 부담감, 그걸 지나고 나니 결국은 오롯이 나여야 한다는 탁 소리가 차례로 날 찾아왔던 것이. 마치 삶처럼요.
비가 내리던 어느 금요일 밤.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새까만 공항 리무진에서 『금빛 두바이』를 맡아 함께 작업하게 된 편집자분으로부터 처음 연락을 받았습니다. '안녕하세요, 금빛 작가님. 방금 메일을 보내드렸습니다. 확인 부탁드리며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즐거운 여행 되시고요.' 왜 하필 케냐행이 시작되는 활주로에서부터 퇴고 작업은 시작되어야 했는지, 그 절묘한 타이밍에 대해서 많이 의아했었거든요. 그렇게 케냐에 도착하자마자 몰아친 두 달간의 퇴고 작업을 마치고 이제 출간이 코앞에 와있습니다. 존재조차 몰랐던 십 년 전에 쓴 한 일기가 오늘에서야 번뜩이며 생각이 난 건 뭘까요.
십 년 전에 쓰던 블로그엔 수많은 비공개 글 중 이런 글이 하나 있어요. '금빛 작가님, 방금 메일 하나 전달드렸어요. 공항이신 거죠? 이따 편하실 때 검토해 보시고 말씀 주세요. 좋은 비행 되시고요.'
십 년을 돌아왔다는 사실보다는, 그 어떤 오글거림도 뛰어넘고 저런 글을 써두었다는 제 자신의 뻔뻔함에 대해서, 그리고 결국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저는 오늘 하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새해부터는 조금 더 뻔뻔하고 더 용감하게 꿈꾸며 살아도 되지 않을까요. 다음번엔 공항 말고, 마치 꼬모 호수의 고대 빌라들이 떠오르는 돌로 지어진 커다란 창을 가진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편안한 베이지 흰색 천으로 짜인 커튼이 자연스레 휘날리고 있어야 해요. 다음 편은 그렇게 천국에서 시작하는 걸로 해요.
그래서 당신의 책이 나에게 무얼 줄 수 있는데요?
세상 가장 냉랭하고 싸한 독자가 된 나 자신을 마주하고서 이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던 날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 글들을 왜, 어떻게 팔겠다는 거죠? 사람들이 왜 당신의 글을 읽어야 하느냐고요. 그날 깨닫고야 말아요. 때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한 최고의 파이터가 되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요. <불량공주 모모코>라는 영화를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인간은 분에 넘치는 행복이 눈앞에 있을 때 갑자기 깊은 병에 걸리곤 해요. 행복을 붙잡는 일은 불행에 안주하는 것보다 용기가 필요하대요.' 우리가 한걸음 더 행복해지려 할 때마다 어제의 나와 그곳에 있던 주변 이들은 익숙한 곳에 머무르라고 우릴 잡아당길 겁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귀를 막고 용기를 내 한 걸음 더 내딛고 나아가는 거예요.
넌 악마구나? 너에게 나의 무해한 글이 와닿을 리 없지. 자극적이고 목적 있는 글만 읽는 게 요즘 우리라지만, 그건 우리들의 문제라는 걸 기억해. 또렷이 가던 이들도 때론 길을 잃기 마련이란다. 그저 아무런 이유 없이도 글은 빛이 나. 존재 그 자체로 말이야. 마치 우리 모두처럼. 내 글 속에 무엇이 들었나 다시 한번 잘 보렴. 그리고 미안하지만, 난 장사치가 아니란다. 난 글을 쓰는 작가야.. for god's sake.
편집자분이 있어서 저는 그저 든든했지요. 야생화 같은 저의 원고의 가시를 다듬고 필요한 가지와 이파리들만 남겨 멋진 정원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을 상상했어요. 하지만 그것은 고스란히 저의 일이었지요. 원고의 교정, 표지, 목차, 디자인 결국 모든 것에 저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스크랩한 것들을 보여주며 이런 느낌이면 어떨까요? 가 아닌, 원하는 그것을 만들어 이것을 원해요 여야 했고, 출판사가 함께 틀을 맞추고 맞춤법을 고쳐주고 어색한 표기법을 교정해 줄 수는 있지만 이야기 그 자체는 오롯이 저의 몫이어야 했던 거지요. 마무리 단계에 다다르니 가드닝은 그보다는 수술에 가까워졌습니다. 급박함을 알고서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메스를 꺼내 들고 함께 수술실에서 싸워줄 사람은 저에게 단 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만큼 글과 가깝고, 마치 자신의 일처럼 제 일에 나서서 관여해 줄 수 있는 같은 뿌리를 달고 세상에 온 한 사람, 바로 저의 친언니요. 언니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그녀의 한 손에는 꼭 묵직한 책을 함께 그려 넣어 주어야 할 겁니다. 그런 그녀의 앞에 서는 것이 대중 앞에 서는 것보다 덜 무서워질 무렵이 저에겐 바로 그 마무리 단계였겠지요. 언니는 자유롭고 개성 있는 이 정원에 가위를 두르는 것이 죄책감이 든다며 조심스럽게 구간들을 알려 줬어요. 그 가지들을 잘라버릴지 그대로 둘지, 그조차도 저의 일이었죠. 언니 덕분에 시급한 가지들을 쳐내고도 사실 몇 차례나 더 수술실에 홀로 입장할 수 있는 시간들이 주어졌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아직은 수수한 그 모습이 남았으면 했을까요. 아님, 사실 가장 소중해서 두려웠던 산을 이미 넘어버린 것일까요.
출간 준비를 하면서, 나의 서랍 속 글들이 책으로 출간된다고 하니 왠지 출렁이는 부담감이 밀려와 휘청할 때가 있었거든요? 사람들이 왜 내 책을 읽겠어, 그럼 좀 더 힘줘서 멋진 걸 넣자 하고.
"의전 얘기를 넣어야 하지 않을까? 막, 브이아이피들 통역해 주던 얘기들을 다 때려 넣어야지 않을까?”
"Ick. 난 그런 책들 때문에 독서를 멈췄던 사람이야."
그 순간, 나에게도 대단하다는 한 통역가분의 책을 읽다 그만 덮어 버린 그날이 떠올랐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말하는 대단하다는 거 말고, 가장 사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들로 채워보자. 그렇게 산으로 갈 뻔한 걸음을 다행히도 그 처음 마음이 다시 또렷이 다가와 잡아줬어요. 그리곤 쓸데없이 힘준 문장들, 힘 들어간 에피소드들은 다 거두어 가버렸습니다.
이곳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바다.
그대, 노 저어 오세요.
빛줄기 같던 시간들이 책이 된다면,
그 글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가 빛이 되지 않을까요?
제가 함께 어둠 속을 빠져나온 이 등불을 이제 그만 당신에게 드립니다.
with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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