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살이의 시작
여행이란 일상에 기분 좋은 바람을 실어줍니다.
반복되는 일상을 버티는 일에 저는 일찍이 잼병이었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일들을 벌이곤 했어요. 예를 들면, 학창 시절 기획사 오디션장을 얼씬거리곤 하는 것이었죠. 시외버스를 타고 다른 도시에 있는 백화점 상설 공연장이나 대학교 공개홀을 찾는 것은 나름 그 나이에 획기적인 일이었던 겁니다. 실은 성인이 된 후로도 잦게 사고를 치며 살아왔지만, 그 모든 걸 만천하에 떠벌리는 일은 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요. 하지만 여행이라는 설레는 친구를 만난 후로는 더는 엉뚱한 일을 벌이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엉뚱한 이가 아니라 그저 너른 세상이 보고픈 탐험가였단 사실은 저에게 커다란 위안이었죠.
시칠리아 시라쿠사에 마음에 드는 에어비앤비를 만나지 못했다면 저는 결코 이번 여행을 결심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곳으로 가는 환승장이 아니었다면 로마라는 도시에 한 달을 거쳐가지도 않았을 일이죠.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시라쿠스에 있는 한 작가의 집을 만나고 시작됐어요. 시칠리아에 무더운 여름이 찾아오기 전, 그는 여행을 떠나기로 합니다. 두 달 정도 집을 비울 터라 에어비앤비에서 렌트할 여행가를 구하기로 해요. 그걸 마침 한국의 창원에 걸쳐있던 한 여행가가 발견합니다. 그녀는 늘 시칠리아가 궁금했지만, 홀로 선뜻 나서지 못했거든요. 에어비앤비 어플 지도 속을 돌고 돌던 그녀에게 그의 집이 눈에 들어온 건 그곳이 그의 집이자 한 작가의 작업실이기도 하다는 문장에서부터였습니다. 그의 영감이 모인 서재, 그가 걸터앉아 상상의 나래를 펄럭였을 테라스, 그 공간에 머물면 제게도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 무엇보다도 작가이고 여행가라는 동질감 같은 것이 저를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보냈던 메시지는 보기 좋게 묻히고 말았지요.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은, 그들에게 닿으려면 그 메시지는 이탈리아어로 번역된 것이어야 했어요. 아니, 그보다도 더 중요했던 건 온라인으로 일을 하는 디지털 노마드인 제게는 광섬유 인터넷이 설치된 집이 필수였다는 점입니다. 하루는 전기가 끊겨서 아무것도 못하던 날이, 그리고 코트야드의 공사 소음으로 한 달이 내내 괴로웠던 밀란에서의 날들이 스르르 떠올라줍니다. 그렇게 시라쿠사의 한 작가가 점화시킨 에어비앤비 렌트 헌팅의 방향성은 자연스럽게 바뀌어 갔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야단법석의 트리거는 바로 그 작가분이라는 사실은 저에게 커다란 한 획이 되죠.
웬 아시안 중년 여성의 야단법석인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선뜻 인터넷 속도 테스트를 공유해 준 로마에 가든이 달린 사랑스러운 초록집, 이 디지털 노마드를 위해 선뜻 광섬유 인터넷을 설치해 준 시칠리아의 푸른 바다 앞 집의 사랑스러운 두 여인은 저의 호스트가 되어주기로 합니다. 한 달 전까지 무료 취소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저에게 이 여행에 대한 확신을 자꾸만 얹어줬어요. 로마행 비행기 티켓을 사면서 한걸음, 시칠리아행 내항기 티켓을 사며 또 한걸음, 그렇게 다음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매일같이 저에게 묻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한번 해보겠다는 거였어요.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 내내 그때 가지 않았던 여행을 후회하며 남은 생을 사느니, 펼쳐지게 두고 그것이 무언지 한번 보겠다고 하면서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보겠다는 그녀의 대답이 저는 참 마음에 들어 자꾸만 묻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해보겠다 말하는 그 걸쭉한 끝이 좋아서, 휘핑크림 같은 걱정을 자꾸만 얹고 또 얹는 거예요. 이렇게 조금만 더 묻고, 또 흡족하길 반복하다 보면 저는 어느새 비행기 속에 올라타 있겠지요? 시간이라는 그 환상의 속도를 이제는 알거든요.
2025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