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관람 후 만끽한 잊을 수 없는 평양냉면의 맛
오늘은 추석이다. 아침에 차례를 지내고 토란국을 먹었다. 그리고 과일을 만지작거리며 케이블TV를 보는데 북한 관련 소식이 나왔다. 대북제재 및 국경 봉쇄 등으로 상당한 경제난이 예상된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북한의 실질 GDP니 대외 교역액이니 하는 전문적인 해설이 나왔다.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용이 어려워서라기보다는 북한과 관련한 옛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그 어느 날 접한 마법과도 같았던 북한예술단의 공연....
코로나가 세상을 덮치기 이전의 어느 주말이었다. 별로 가고 싶지 않은 모임에 참석했다가 별로 치고 싶지 않은 테니스를 쳤다. 내 평생 테니스는 서너 번 쳐 봤나? 잘 치지도 못하는 걸 분위기 맞추겠다고 바둥거렸으니 쉬이 지쳤다. 모임은 뒤풀이 술자리로도 이어지려 했다. 나는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빠져나왔다.
무작정 거리를 걸었다. 일찍 자리를 박차고 나왔으니 시간 여유는 있었다. 나는 여기저기 시선을 주며 발걸음을 옮겼다. 주말 오후, 시내로 몰려나온 젊은 남녀의 모습이 싱그러웠다. 뭐가 그리 좋은지 전봇대 앞에서 수다를 떨며 깨알 같은 웃음을 터뜨리는 청춘들.... 그런데 그들 옆에서 나는 눈에 띄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전봇대 사이에 꽂혀 있는 한 묶음의 초대권이었다.
‘북한예술단 무료특별공연’
아항, 이 초대권.... (보신 분들 꽤 있으시죠?)
당시만 해도 거리를 걷다 보면 뿌려진 듯 널려 있는 북한예술단 초대권을 쉽게 볼 수 있었다(요즘은 코로나 여파로 예전보다는 보기가 어려워졌지만). 나는 전봇대로 다가가 초대권을 뽑아 들었다. 공연 장소는 인근 대학교 공연장이었다. 현 위치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얼마 후면 오후 공연 타임이었다. 관객에게 사은품도 준다고 했다.
‘사은품? 이건 또 뭔 소리여?’
공연을 무료로 보는 것만도 황송한데 사은품까지 주다니, 대체 이게 무슨 조화일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가볼까? 말까? 곧 결정을 내렸다. 황금 같은 주말을 시답잖은 모임에서 허비한 것 같아 기분이 찜찜했었는데, 색다른 공연을 보면 마음이 풀릴 것 같았다. 가보기로 했다.
나는 잰걸음으로 공연장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관객이 많았다. 대부분 60대 이상 노년층이었다. 내가 제일 젊은 것 같았다. 불이 꺼지고 무대의 막이 올랐다. 연기가 피어오르며 공연이 시작됐다.
여자 무용수들이 나와 부채춤을 선보였다. TV에서 늘 보던 그런 부채춤이었다. 다만 눈앞에서 보니 다채롭고 생동감이 느껴졌다. 무용수 퇴장 후 남자 가수가 등장했다. 그는 아코디언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북한 노래 한 곡, 남한 트로트 한 곡이었다. 전반적으로 북한의 공연이라기보다는 남한의 70~80년대 악극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게 20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공연이 멈추고 무대에 환하게 불이 올랐다. 이어 양복 입은 50대 남자가 등장했다.
“막간을 이용해 좋은 금융상품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남자가 말했다. 갑자기 흥이 깨지는 느낌이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신호를 주자 슬라이드가 펼쳐졌다. 슬라이드 화면엔 각종 보험 상품이 나열돼 있었다.
'뭐야, 이건!'
짜증이 났지만 일단 참았다. 공연을 더 보고 싶어서였다. 잠시 후 남자의 설명이 시작됐다. 실버보험이니, 종신보험이니, 간병보험이니.... 상당한 말빨을 가진 자였다. 당장 보험을 들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관객석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어르신을 위한 보험 상품은 많지 않다.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노인이 상당수이기에 보험가입이 어려워서다. 무대 위 남자는 틈새를 파고들며 뭉텅이로 청약서를 챙겼다. 그는 ‘막간’을 이용해 상품 소개를 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설명은 거의 1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완전히 주객이 전도됐다.
남자가 퇴장했다. 이후 잠깐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화장실에 다녀온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곧 공연이 시작됐다. 북한 민속무용이 첫 순서였고, 다음으로 가수가 등장해 기타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이어 무희들이 등장했다. 동작에 따라 옷 색깔이 바뀌는 사계절춤을 선보였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좋아하신다. 나도 좋았다. 그렇게 15분쯤 흘렀을까, 다시 공연이 중단됐다.
‘또?’
나는 불만스러운 눈으로 무대를 쳐다보았다. 이번엔 중년의 여자가 등장했다. 뒤에 슬라이드가 다시 펼쳐졌다. 그리고 진행요원들이 관객에게 자료를 나눠주었다.
‘이건 또 뭐야?’
읽어보니 상조회 가입 설명서였다. 곧바로 여자가 상품설명을 시작했다. 저희 상조회에 가입하시면 크루즈 여행권을 드리고, 각종 금융상품 혜택을 준단다. 믿고 가입해 달란다. 고객님 가족의 마지막 가는 길을 편안히 모시겠단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기가 공연장인지 영업장인지.
그나저나 대학 측은 어떻게 이런 공연에 무대를 내줄 생각을 했을까. 어르신들을 위한 자선 공연인 줄 알았나? 제기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한번 지켜보기로 했다.
상조회 상품설명도 1시간가량 이어졌다. 또다시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인을 했다. 여자는 청약서 뭉치를 받아 챙긴 후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준비한 공연은 여기까지입니다.”
잉? 이게 다야? 그렇게 북한예술단의 공연이 끝났다. 실제 공연 시간은 30~40분 정도였고 보험과 상조회 가입 설명이 2시간이었다. 황당해서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진행요원들이 돌아다니며 작은 박스를 나눠주었다. 사은품이란다. 열어 보니 싸구려 부엌칼이었다. 옆에 계신 할머니께 건넸다. 내 것도 쓰시라고. 고맙다고 가져가신다. 텁텁한 입맛을 정수기 물로 달래며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밖에는 저녁이 내렸다. 어두움 속에서 나는 허탈함을 느꼈다. 왜 공연이 무료인지, 왜 사은품까지 주는지 알 수 있었다. 공연장 계단을 내려오면서 예전에도 느꼈고, 현재에도 느끼고, 미래에도 느낄 분명한 진리를 다시금 마음에 새겼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거리를 걸었다. 30분쯤 걸었을까. 무슨 우연의 일치인지 우측 편에 평양냉면집이 나타났다.
저녁을 안 먹었기에 배가 고팠다. 평양냉면으로 끼니를 때우기로 했다. 공연으로 채우지 못한 북한의 향수를 평양냉면으로라도 메우기로 했다.
“여기 평양냉면 하나요.”
주문과 동시에 면수가 나왔다. 마셨다. 억! 맛없고 밍밍하다. 얼마 후 평양냉면이 나왔다. 잘 끊어지는 메밀면발 위에 차가운 편육이 고명으로 올라 있었다. 이리저리 섞은 후 젓가락으로 고기와 면을 동시에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에이....
역시 밍밍한 맛이었다. 평양냉면은 제대로 맛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나 즐길 수 있는 먹을거리 같았다. 어쨌든 공연도 면수도 냉면도 모두 밍밍했다. 그날, 북한은 내게 오로지 밍밍함만을 선사했다.
이후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오늘 생각한다. 아니 바란다.
김정은도 조금 밍밍해졌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