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밈없이 보이는 대로 그렸던 신념의 화가
요 몇 년 새 전시를 보러 미술관을 방문하는 일이 잦아졌다. 코로나 19로 인해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던 문화생활을 뒤늦게나마 누려보겠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미술 작품의 뒷 이야기 등을 공부하며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알아차리는 소소한 낙을 즐기게 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최근에는 나처럼 알아가는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진 덕분인지 좋은 전시가 많아진 것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올해만 해도 유명 일러스트 작가의 전시와 현대미술인 팝아트 전시를 보았고, 스웨덴국립미술관 컬렉션을 N차 관람하기도 했다. 특히, 5월에는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한 번쯤은 TV나 책에서 보았을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가 국내에서 전시된다는 소식에 개막일에 맞춰 전시장소인 '예술의 전당'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날 뭉크전을 관람하고 나왔을 때 바로 맞은편에서도 전시가 진행 중이었는데 충분히 관람할 수 있는 조건이었지만, 홍보를 위한 작품에서 풍겨져 나오는 기괴스러운 느낌 탓에 선뜻 전시를 관람할 용기가 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강렬했던 인상 탓인지 그 전시는 알게 모르게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결국 10일 만에 다시 예술의 전당을 방문하게 만들었다. 표를 발권하고 입장하기 전까지도 작품의 그로테스크함에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들었지만, 입장하고 나서부턴 온몸에 도파민이 돌기 시작했다. 이 전시의 주인공은 20세기 마지막 구상화가로 불리는 프랑스의 대표 화가 '베르나르 뷔페'였다.
베르나르 뷔페는 국내에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화가였다. 나 역시도 이번 전시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생소했고, 뷔페의 작품이 처음 국내에서 소개되었던 2016년의 <샤갈, 달리, 뷔페 특별전>에서는 '뷔페'라는 이름 탓에 ‘마르크 샤갈’과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을 보며 음식을 먹는 것으로 오해하는 관객이 여럿 있을 정도로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하지만, 뷔페는 20세의 나이에 <방 안의 두 남자>라는 작품으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비평가 상을 수상하였으며, 예술잡지인 <꼬네상스 데자르>에서는 뷔페를 전후 최고의 예술가로 선정하기도 했다. 또,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1971년과 1993년 두 번에 걸쳐 수훈받을 만큼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였고, 한때는 높은 인기로 피카소의 시기와 질투를 받았다고도 전해진다.
시대의 증인
사람들이 뷔페의 작품들에 열광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이번 전시의 홍보 그림에서 받았던 기괴함에 있었다. 뷔페의 그림을 보면 유독 뾰족뾰족한 직선과 두꺼운 윤곽선을 확인할 수 있고, 그가 그린 인물화에서는 사람들이 생기 없이 말라있는 모습과 슬픈 눈을 하고 있는 게 특징이다. 또, 정물화에는 냄비가 비어져 있는 등의 삶에 필요한 무엇인가가 채워지지 않았다던가 살아 있음이 상실된 느낌의 그림들이 대부분이다. 뷔페가 이런 화풍을 가지게 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직후에 시대의 '진짜 모습'을 반영한 결과이면서도 개인적인 문제가 투영된 결과물이었다.
뷔페의 유년기에 아버지는 외도로 가정을 내팽개쳤고 형은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징집되어 있었기에 뷔페에게는 ‘어머니’만이 유일한 안식처였다. 하지만, 하늘은 뷔페에게 이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뷔페의 어머니는 전쟁이 끝난 1945년에 뇌종양으로 갑작스레 뷔페의 곁을 떠나버렸고 뷔페는 세상 속에 혼자 남겨졌다. 그렇다 보니 뷔페는 정말 살기 위해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들 가운데 뷔페가 그린 그림들이 정상적일 리가 없었다. 다시 말해 세상이 뾰족뾰족하고 날카롭게 보일 수밖에 없던 상태였던 것이다. 이런 뷔페의 눈엔 종전의 기쁨보다는 전쟁 직후의 참혹한 모습이 먼저 보였던 것이고, 프랑스의 시민들은 불편했지만 자신들의 꾸밈없는 현실을 그렸던 뷔페의 그림에 빠져들게 되었다.
광대, 그는 그의 얼굴에 그림을 그린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또, 뷔페는 광대를 자주 그리며 인간을 되돌아보았다. 누구나 알듯이 광대는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하고 (자신의 현재 감정을 숨긴 채) 타인들에게 웃음을 주어야 하는 직업이다. 특히 뷔페가 그린 광대의 눈은 무대 위에서의 밝은 모습보다는 무대 아래에서의 울 것 같은 모습을 띄고 있었는데 이러한 광대는 뷔페의 자화상이었다. 뷔페는 이른 성공을 한 뒤에 28살에 백만장자의 반열에 올랐지만 여전히 그의 내면은 불안함과 공허함으로 가득했다. 뷔페는 광대를 그리며 광대의 짙은 화장 속 진짜 자신의 모습을 그려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뷔페의 광대그림은 지금의 SNS 속 밝은 모습만을 업로드하는 우리의 진짜 모습과 닮아있을지도 모른다.
구상미술(具象美術): 실제로 있거나 상상할 수 있는 사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미술.
추상미술(抽象美術): 물체의 선이나 면을 추상적으로 승화시키거나 색채의 어울림을 추구하여 조형적인 작품으로 구성하였다.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닌 마음이 보는 대로 작품을 그려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뷔페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다른 화가들과 달리 너무 일찍이 가져버린 자신만의 화풍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발전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일관된 화풍 이외에도 뷔페가 전쟁직후의 빈곤하고 참혹한 현실로 명성을 얻었음에도 고가의 자동차와 대저택을 구매하는 등의 사치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변했다는 이유도 한몫했다.
또한 당시의 미술사조가 구상미술에서 추상미술로 이동하고 있는 점도 한 몫했다. 전쟁이 끝나고 냉전시대에 돌입하면서 미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미술로 추상을 선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대미술의 중심국가가 되었다. 미국에게 미술의 중심국가 역할을 빼앗기게 된 프랑스는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를 중심으로 구상미술을 배제하고 추상미술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정부주도의 구상미술 배척으로 미술계와 비평가 들도 구상미술의 대가인 뷔페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뷔페가 세상을 떠나고 17년이 지난 2016년에서야 고국에서 첫 회고전이 열린 것도 이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나를 둘러싼 증오는
사람들이 나에게 준 훌륭한 선물이다.
하지만 뷔페는 이런 날카로운 시선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갔다. 추상을 그리고 싶지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원래 모든 그림은 추상적입니다. 구상화가 이해하기 쉽다 해도 관객이 그림에 담긴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추상화, 구상화를 떠나 모든 예술은 추상적인 것입니다."라며 미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만약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없다면
차라리 나는 죽음을 택할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뷔페가 그려오던 구상미술은 쇠퇴했지만 뷔페는 흔들림 없이 매일 하루에 12시간씩 그림을 그리며 일생 동안 8,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리고 뷔페는 파킨슨병에 걸리자 오른손으로 붓을 들고 왼손으로는 흔들리는 오른손을 잡아가며 6개월 동안 25점의 죽음시리즈를 남기고는 직접 자신의 서명을 남긴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사람들의 잣대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그림을 그렸던 베르나르 뷔페. 이런 뷔페의 모습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자극을 주기에 충분했다. 또, 2024년 여름. 멀리 동양의 한나라에서 자국민들도 외면했던 본인의 작품에 공감하는 우리의 모습을 뷔페가 볼 수 있었다면 뾰족뾰족한 그림이 아닌 새로운 신념으로 다른 화풍의 그림을 그려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