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일주일에 하루는 영화관에 갑니다.

혼영을 좋아하는 30대 남자의 주절주절

by 이종원

이럴 거면 영화과를 가지 법학과를 왜 갔을까?


지인들이나 제3자가 보기에 나는 엄청난 영화광이다. 올해만 해도 재개봉작을 포함해서 52편의 영화를 관람했고, 2023년에는 68편, 2022년에는 40편, 코로나가 극성이던 2021년과 2020년에도 각각 15편을 보았을 만큼 극장이 놓치지 말아야 하는 충성고객 중의 한 명이다. 이렇다 보니 영화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영화를 전공한 친구와 극장에서 만날 때면 친구는 나에게 "전공은 내가 했는데 왜 네가 영화과 같냐?"라는 웃지 못할 얘기를 하고 나는 그 친구에게 "넌 왜 내가 법대 가는 거 안 말렸냐"라며 되묻곤 한다.


친구에게 말은 저렇게 했지만, 내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법학'과 관련이 깊다. 고등학생시절 '법학과'를 희망하면서부터 무형적인 지식을 보호하는 '지식재산권'에 관심이 있었고 특히 「저작권법」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렇게 대학에서 「저작권법」을 실제로 학습하고 한국저작권위원회의 '모니터링단'에도 참여하는 등 커리큘럼과 상관없이 대학생활의 절반이상을 「저작권법」과 동행했었다. 이렇게 저작권과 오랜 시간을 함께하다 보니 다양한 '저작자'들이 공동으로 제작한 저작물인 영화와 친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영화관은 훌륭한 '도피처'가 되어주었다.


「저작권법」에 한창 빠져있다가 직장인이 되어서는 또 다른 이유 때문에 영화에 빠져들었다. 어떻게 보면 지금부터가 내가 '영화광'이 되어버린 '진짜' 이유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평균적으로 2시간, 짧게는 1시간 30분에서 길게는 3시간 동안 이어진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외부의 간섭 없이 오롯이 '영화'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영화관을 자주 찾게 된 시점이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2018년부터였는데, 그 당시만 해도 근무시간 외에 업무연락이 오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특히나 중소형의 공공기관 직원에겐 저녁이나 주말에 감독기관으로부터 요구자료가 오는 것은 그렇게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외부연락을 조금이나마 물리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물론 이미 받아버린 '요구자료'는 어쩔 수 없었지만, 퇴근하고선 곧장 '영화관'이라는 도피처로 도망친 것이다. 좌석에 앉아서 스크린만을 쳐다보며 영화에 집중할 때면 그 시간만큼은 '내면의 평화'가 찾아왔다.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다시금 휴대전화를 켤 때에는 심장이 조마조마했지만, 머 어쩌겠는가? 영화를 보느라 휴대전화를 꺼두었다는데? 연락할 거면 일찍 했어야지. 그렇게 나의 소심하지만 옹골찬 업무 디톡스와 내면의 평화를 위한 도피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화는 '대화의 소재'와 '영감'이었다.


또, 영화는 내향형인 나에게 대화의 소재를 끊임없이 알려주는 '선생님'과 같은 존재다. 내향적인 성격 탓에 대화의 소재가 떨어지면 당혹스러운 경우가 많은데 영화는 여기서 훌륭한 안주거리 혹은 디저트가 되어준다. 사람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 보면 "최근에 재미난 일 없어?"와 같은 질문이 항상 나오곤 하는데 "영화관에 갔어요"라고 답하면 그 뒤엔 당연스레 어떤 영화를 보았는지와 내용은 어땠는지를 묻는 대화가 이어진다. 그리고 나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감상평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게 되고, 이 감상평은 영화에 대한 나의 주관적인 평가이면서 동시에 깨달음의 결과물인 ‘영감’이었다.


영감(靈感)「명사」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기발한 착상이나 자극.

영화관에서 영화는 한 번 관람하지만, 실제로는 두 번의 경험을 얻게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고편만을 본채로 혹은 아무런 정보 없이 극장 좌석에 앉아 영화를 보며 만든이들의 의도를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첫 번째 경험이고, 관람을 마치고 나서 배우의 연기나 대사 혹은 연출에 여운이 느껴지면 그 여운을 다시금 떠올려보며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씹고 맛보고 즐기는 두 번째 경험을 하게 된다. 쉽게 말해 감독과 다양한 스태프들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 과정을 통해 삶의 영감을 얻는 것이다.


등장인물이 왜 저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는지, 저 선택이 최선이었는지 등을 생각하다 보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이런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배경지식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어 공부를 하게 되거나, 일상생활 중에 비슷한 상황이 있었을 때를 생각해 보며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보기도 한다. 또, 다음과 같은 장면을 통해 일상 속에서 작은 울림느끼기도 한다.

2019년에 개봉한 영화 '가장 보통의 연애'에서 감정이 격해진 두 주인공이 싸우다가 나이로 말다툼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나는 이 장면에서 지금껏 가져온 나의 '성 인식(認識)'에 뜨끔하면서도 통쾌함을 느꼈다.

선영: 너도 짠한 노총각이야. 그냥 딱 봐도 아저씨. 나이는 뭐 나 혼자 먹니?
재훈: 어디! 남자랑 여자랑 같애?
선영: 같지! 다르다고 배웠니? 너는!


이렇듯 영화는 성인(聖人)이나 저명한 사람의 입이 아닌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만들어낸 작품을 통해 영감을 전달한다. 영화의 기초가 되는 시나리오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시나리오를 구현하기 위한 배우의 감정과 또 이를 뒷받침하는 촬영기법과 음악 등으로 저작자들이 가장 최선의 장면을 만들어 선물하면 나는 선물의 포장지를 벗겨내고 사용하며 선물과 함께 생활을 이어나갈 뿐이다. 그러므로 영화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 몰랐거나 경험하지 못했던 타인이 가진 최선의 생각을 체험하는 행위라고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체험을 잘하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위에서 언급한 '가장 보통의 연애'의 장면에서 '아? 나는 다르다고 배웠는데?'라고 생각한다면,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박물관 수장고에 있어야 될 법한 고리타분한 고정관념 또는 편견들을 미리미리 조금씩 깨부수어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깨짐이 있고 나서야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마련해 준 넓은 체험공간에 입장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비로소 진정한 감동과 영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이런 게 진짜 '선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