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채식주의자>
어려서부터 폭력에 예민했다. 타고나길 예민한 사람이 있는 거 같다. 세상물정 모르는 천진난만한 7살, 8살 그 어린 시절부터 나는 '사랑의 매'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어린 마음에도 '사랑'과 '매'가 어떻게 양립가능한 지가 이해가 안 갔다. 사랑하면 한없이 감싸주고 아껴주고 예뻐해 주기도 바쁠 거 같은데 '사랑하니 때린다'라고? 동시에 '맞을 짓 했다'는 말도 내겐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어른들이 먼저 날 짜증 나게 해서 몇 마디 했더니 말대꾸를 하며 맞았다. 맞을 짓 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말이다.
오래전 읽었던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꺼내 들었다. 워낙 읽은 지 오래라 정확한 줄거리는 생각이 안 났지만, 책을 읽었을 때 감정은 남아있었다. 불쾌함에 가까웠던 기억이 난다. 책을 읽는 내내 가슴속에 큰 돌덩어리 하나가 얹혀있는 느낌. 그래서 한 번 읽고는 다시 읽지 않았는데, '노벨상'이라는 건 이런 책도 꺼내 읽게 만든다.
책을 읽는 사람마다 저마다 다른 해석을 내놓을 것 같다. 같은 텍스트라도 읽는 사람마다 다른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책, 그래서 이 책이 그만큼 가치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폭력에 예민한 나는 이 책에 '폭력에 대한 저항'이 녹아있다고 느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채식주의자 딸(영혜)에게 아버지가 고기를 먹일 때다. 사랑하는 딸이 고기를 안 먹는다는 이유로 온 가족이 주인공을 몰아붙이고 고기를 입 속으로 욱여넣는다. 고기를 먹지 않으니 아버지는 주인공의 따귀를 올려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이 영혜를 구석으로 몰아넣는 상황의 묘사는 정말이지 끔찍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못하는 영혜가 선택한 건 스스로를 해치는 거다. 그렇게 그녀는 곧바로 부엌으로 달려가 손목을 그었다.
마지막 단편, <나무불꽃> 속 영혜 언니의 회상에는 영혜 어린 시절이 나온다. 한 번은 숲 속에서 길을 잃었는데, 동생인 영혜가 언니에게 말했다. '우리 집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나'라고. 그녀에게 집은 폭력 그 자체였다. 조용하고 우직했던 영혜는 아버지의 화풀이 대상이었다. 그녀에게 집은 자기를 항상 때리는 아버지가 있는 곳이었고, 그곳에서 그녀는 그렇게 마음속에 상처를 쌓아갔던 거다. 그리고 끼니를 제때 챙기는 '아내' 역할만 요구하는 남편한테서도 그녀는 가부장적인 폭력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랬던 그녀가 선택한 건, 고기를 먹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중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무(無)로 돌아가는 걸 택했다. 아무도 해치지 않는 나무가 되고 싶다는 게 그녀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사람들이 상처 입은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외부로 표출하는 것. 억울하다고 소리칠 수도 있고, 누군가를 밀치거나 때리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내부로 숨어 들어가는 것. 더 이상 상처받지 않게 위해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어 숨어드는 거다. 전자가 다른 사람을 향하는 거라면 후자는 본인을 향하는 거라, 그만큼 자기 파괴적이다. 주인공인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되길 선택한 것도 폭력에 저항하려는 자기 파괴적인 선택이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한 선택이 역설적으로 나를 포기하는 선택이 된 건 아닐지.
이 소설에서 좋아하는 또 다른 장면 하나는 단편 <몽고반점>에 나오는 마지막 장면이다. 온몸에 꽃을 그려놓은 남녀가 정사를 나누는 장면. 갓난아이의 상징인 푸른 몽고반점을 성인인 영혜에게도 있다는 거에 꽂힌 '나'는 결국 상상을 현실로 만든다. 혹자는 형부와 처제의 막장 사랑 이야기로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장면을 읽으며 많이 울었다. 세상의 시선에 맞춰 살아가기엔 연약한 두 인간이 꽃인 척, 나무인 척하며 서로를 안는 장면이 너무 안쓰러웠다. 방금 막 태어난 아이처럼 나체의 인간 둘이 상처로 뒤덮인 서로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내겐 그 장면이 선정적이라기보단 안타까움으로 먼저 다가왔다. 역시 사랑의 매따위 없다. 폭력만 존재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