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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Jun 28. 2021

김정기 - The Other Side

 “It is my hope to always be in bliss when facing a blank canvas, while reigning as the King of a world born from the tip of my pen…”


 “나는 언제나 백지 앞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있을 수 있기를 바란다. 손끝에서 펼쳐지는 또다른 세계의 왕으로 군림하면서…”


 롯데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만화가 김정기 전시를 소개하는 글이다. 그의 작품을 유튜브나 지면을 통해 만난 적 있다면 위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의 손과 펜에서 펼쳐지는 드로잉의 세계는 정말이지 놀랍다. 밑그림 없이 거대한 화폭을 순식간에 가득 채우는 세밀한 드로잉을 보면 인간의 한계를 묻고 싶어진다. 유튜브에서 ‘김정기’를 검색해서 그가 펼치는 놀라운 드로잉의 세계를 만나 보기를 적극 권유한다. 나도 화면에서만 그의 드로잉과 일러스트를 보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전시장에서 그가 실제 그린 그림을 눈으로 봤다. 종이에 펼쳐진 현세가 아닌 다른 세상의 모습은 감탄을 넘어 감동을 준다. 게다가 작품 내에서 일관된 스토리가 펼쳐진다. 마치 중세 종교화에서 한 화면 안에 성경 내의 특정 에피소드나 인물의 일대기가 펼쳐지는 구성과 비슷하다. 이야기, 상상력, 정밀함, 스케일을 한 번에 쏟아부을 수 있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동화 햇님달님을 재해석한 그의 작품, 동화의 스토리가 한 화폭에 담겨 있다.]


 전시를 다 보고 맨 처음 든 생각은 이렇다. 일필휘지로 그토록 세밀하고 정교하며, 화려한 상상력이 넘치는 그림을 거대한 스케일로 그릴 수 있는 힘은 엄청난 연습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이 모두 2,000여 점이다. 정말 놀라운 양이 아닐 수 없다. 이게 그의 작품 전부 다가 아닌 일부다. 같이 전시를 본 친구와 내내 이 말을 했다. “김정기 작가는 정말 엄청난 연습벌레야, 천재이기도 하지만 꾸준한 연습이 바탕이 되니까 저런 작품을 한번에 그려낼 수 있는거야.”


 감탄과 놀라움을 잠시 밀어두고 김정기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자. 그는 유년시절부터 만화가를 꿈꿨다. 좋아하는 만화가의 그림을 따라 그렸고, 대상을 잘 관찰해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연습에 매진했다. 남다른 시각적 기억력에 더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주변 세상을 머릿속에 담아 그림으로 표현했다. 서양화과에 진학했으나 만화가가 되기 위해 그만 뒀다. 2002년 당시 인기 있던 만화잡지 [영점프]에 <퍼니퍼니>라는 작품으로 데뷔했다. 2008년부터 네이버 웹툰 <TLT>를 스토리 작가 박성진과 협업으로 연재했다. 그가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2011년 부천만화축제에서 있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라이브드로잉이 처음 펼쳐져 엄청난 화제를 낳았다. 밑그림 없이 기억과 직관에 의지해 한 쪽 벽면을 가득 메운 드로잉을 선보였다. <우리는 어디론가 가고 있다>라는 작품이다.


[우리는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는 이후 2016년 파리에서 성황리에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세계적으로 명성을 쌓는다. 그리고 다양한 문화 예술 분야와 협업해 자신만의 세계를 확고히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마블과 협업한 <시빌워>, 봉준호 감독에게 아카데미 상을 안긴 <기생충>, 유명한 MMORPG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한국 힙합의 호랑이 타이거JK의 앨범등을 작업했다. 이번 전시에 위에 나열한 작품들이 소개되어 그의 다양한 작업이 얼마나 흥미로운지 알려준다. 


[블리자드와 협업,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기생충 드로잉]


 전시에서 직접 감상한 그의 그림의 특징을 나름대로 생각했다. 우선 그는 탈것(자동차, 비행기, 우주선, 오토바이 등)을 정말 잘 그린다. 그리고 액션 장면이 마블 영화 수준으로 실감나고 역동적이다. 만화 <총몽>의 세계를 연상시키는 세계관이 특히 독보적이다. 온갖 기계가 폐허처럼 나뒹구는 종말의 세계에서 생존을 위해 기계를 이식한 인체와 그들의 아귀다툼이 커다란 화폭에 펼쳐지면 좀처럼 눈을 떼기 어렵다. 내가 이런 세계관을 특별히 좋아해서 그런가 싶어 동행한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도 내 의견에 동의했다. 귀여운 캐릭터가 유머러스한 모습을 보이는 일상을 표현한 작품도 물론 좋지만, <베르세르크>나 <총몽>을 연상시키는 세계가 더욱 관객의 마음을 파고든다. 그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작가들이 역시 오토모 가츠히로(아키라), 키시로 유키토(총몽) 등이다. 그의 그림체와 취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품들이다. 나도 그런 영향을 바로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김정기 작가가 가장 재미있게 본 만화는 아다치 미츠루의 <터치>와 토리야마 아키라의 <닥터 슬럼프>라고 한다. 그의 귀여운 캐릭터나 일상을 표현한 작품들이 어딘가 낯익다 했는데 이제 납득이 간다. 


[종말의 세계에서 기계와 군대가 벌이는 생존을 위한 폭력이 보이는 작품]


 알고 보니 그는 밀리터리 덕후로서 군사 무기에 정통했는데 그 자신 군대를 특전사로 제대했다. 기계 부품이나 건물의 구조를 타고난 관찰력과 시각적 기억력으로 형태와 배치를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나와 다른 취향인 친구도 그의 장점이 어디서 드러나고 있는지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인체의 움직임과 자세가 사실적이면서 대단히 역동적이라 해부학을 공부한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렇단다. 그는 2002년부터 약 13년간 홍대 앞 미술학원에서 입시 만화를 가르쳤다. 뼈와 근육의 구조와 위치 및 역할을 깊이 이해하고 여러 번 연습하며 기초를 다졌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의 라이브 드로잉은 계속된다. 나는 일요일에 가서 직접 볼 수 없었지만 매주 목, 금, 토 일정한 시간에 그가 공개적으로 드로잉을 선보이는 작품이 전시장 벽면 길게 걸려 있다. 전시가 7월 11일 끝나니까 얼마 남지 않았다. 화폭의 90%는 채웠으니 곧 완성될 것이다. 전시에 나온 다른 어떤 라이브 드로잉 작품보다 크다. 역시 감탄할 수밖에 없다. 이정도 디테일로 이처럼 커다란 작품을 서사까지 갖추며 그릴 수 있다는게 보고 또 봐도 놀랍다. 같이 간 친구가 미술을 지망하는 딸과 같이 다시 보러 올거라고 했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보는 즐거움에서 이보다 더 나은 전시는 별로 없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제작 중인 라이브 드로잉 작품]

 

 계속 감탄하면서 전시장을 움직이니 어느새 밖으로 나왔다. 작가의 드로잉 화집이 아트샵에 보였다. 2011년, 2016년, 2018년 모음집이 각각 80,000원이다. <옴팔로스>라는 19금 모음 화집도 있다. 그의 작품에 감명을 받아서 하나를 꼭 사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래도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 더 끌렸다. 내가 좋아하는 종말의 세계에 펼쳐지는 폭력도 가장 많았다. 화집을 하나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그의 작품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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