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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Jul 02. 2021

당신의 안녕

소마미술관 전시


 올림픽공원을 좋아한다. 국내에 드문 50미터 레인이 있는 수영장, 수많은 콘서트가 열린 체육관, 각종 음악 페스티벌이 개최되는 드넓은 잔디와 숲, 고대 백제의 유적인 몽촌토성, 그리고 세계 5대 조각공원 중 하나로 손꼽히는 야외 조각품까지, 축복에 가까운 공원이다. 몇 번을 와도 볼거리가 가득하다. 언제나 질리지 않는 아름다움이 반긴다. 그리고 소마미술관도 있다. 몇 년 전에 밀레 전시와 ‘테이트 명작전 : 누드’ 전시를 인상 깊게 봤다. 이번에 열린 전시는 <당신의 안녕>이다. 코로나 시국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국내 작가들의 작품을 모았다. 제 1 전시실은 상처 입은 사람들의 어두운 영혼과 상흔이 새겨진 도시 공간을 담았다. 반면 제 2 전시실은 사람들이 힘겹게 살아가는 와중에도 솟구치는 삶의 에너지와 역동성이 돋보인다. 


 제 1 전시실에 들어가 처음 마주치는 작품은 림배지희 작가의 <잠식> 연작이다. 



 나는 ‘잠식’이란 단어를 만나면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는 영화 제목이 떠오른다. 독일 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1974년도 영화다. 이 말은 아랍 속담에서 유래했다. 영화는 60대 독일 여성과 20대 모로코 출신 청년이 사랑하게 되면서 마주하는 편견과 혐오를 드러낸다. 이 내용이 다가 아니다. 20세기 최고 걸작 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두 주인공과 주변 인물은 복합적인 사고와 행동을 한다. 다른 약자를 무시하거나, 바람을 피우며, 히틀러가 가던 식당에서 기념을 하는 등 역설과 아이러니가 가득하다. 영화 내내 주인공과 주변인들 사이 아득한 긴장감이 일어난다. 아이러니에서 비롯되는 현실이 아닌듯한 기묘한 느낌이 가득하다. 그러나 이런게 현실이며 삶이다. 너무 현실적이면 비현실적이란 아이러니다. 림배지희의 <잠식> 연작도 그런 느낌을 준다. 검은 외투가 얼굴과 몸통을 감싸고 있다. 인간의 마음이 어둠에 사로잡히면, 즉 불안과 공포에 잠식당하면, 외부와 소통을 할 수 없다. 상처를 받아 너무 아프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갈 관심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받아들일 여유도 없다. 잔뜩 움츠린채, 내 상처와 고통에 매몰된다. 그림은 분명 비현실적 묘사로 표현했는데 지극히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나도 2020년에 심하진 않았지만 코로나 블루를 느꼈다. 열심히 참여하던 모임에 나갈 수 없었고, 자주 만나던 친구와 술자리도 끊어야했다. 실제 현실에서 접촉이 줄어드니까 SNS에도 흥미가 떨어졌다. 외부와 소통이 단절되니 마음의 일부가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소통의 단절이 결과가 아니라 원인일 수 있다. <잠식> 연작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투영하지 싶다. 그리고 ‘나만 이런게 아니구나’ 위로를 얻지 않을까? 




 <잠식> 연작의 다른 그림이다. 가운데 사람 얼굴과 몸통 모양의 형상이 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보면 벽에 나있는 구멍처럼 보인다. 구멍이라고 하니까 옛날식 열쇠 구멍같기도 하다. 경계가 열쇠이든 사람이든 다양한 해석과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이다. 나는 음울한 주변 환경이 둘러싸, 마치 환각처럼, 경계만 남아 흐릿한 형태는 보이지만, 내용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 영혼을 잠식당한 사람으로 봤다. 같이 간 친구는 열쇠 구멍으로 보고 아직 열리지 않은, 소통의 의지가 없는 닫힌 마음을 보았다. 그림에서 공간이 열려 있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무런 접촉 없이 마음에 들어가면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흔적도 남지 않는다. 저 상태는 마음이 뻥 뚫려 있어서 유의미한 관계가 불가능하다. 열려 있지만 실제론 닫혀 있는 상태다. 상호작용이란 경계가 있어야 가능하다. 경계를 스스로 내어주어야 하며, 들어가려는 사람은 열리지 않은 경계를 두드려야 한다. 이 과정에서 상처를 입기도 한다. 상호작용은 그런 손상을 감수하고 벌어지는 일이다. 닫힌 사람은 지금도 너무 아파 더 상처받는다면 삶을 이어갈 수 없을 지경이다. 


 림배지희 작가가 보여주는 어둡고 닫힌 마음을 뒤로 하고 강경구 작가의 작품을 맞이했다. 엄혹한 흑백의 세상이 강렬한 색감으로 확 바뀐다. 


[강경구, 먼 그림자-아름다운 것들, 2018, 캔버스에 아크릴]


 바다가 아닐까 싶은 물에 다섯 명의 사람이 엉거주춤 있다. 하나같이 밝은 표정은 아닌데 그렇다고 슬프고 아픈 표정도 아니다. 나는 오랜 시간 바다 위를 표류하다가 해변에 다달아 마지막 발걸음을 옮기기 직전 잠깐 숨을 돌리는 장면으로 생각했다. 걷다가 잠깐 한숨을 내쉬며 허리와 무릎을 숙이는 장면같기도 하고, 쉬다가 이제 가야지 하면서 일어서는 모습같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지금 내 마음이 쉬고 싶은지, 가고 싶은지에 따라 해석이 열려 있겠다. 사실 이 작품은 전시를 소개하는 기사나 블로그에서 눈에 띄는 그림이었다. 실제로 보고 싶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화폭에 강렬한 푸른 색과 붉은 색, 남청색이 무표정한 인물과 어우러져 조금은 섬뜩한 기분이 든다. 기나긴 시련의 시공간을 헤매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이들의 눈 앞에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그림자는,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쪽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무엇을 만나게 되든지 사람들은 살아가야 하고, 헤쳐나가야 한다. 그것 자체로 좋은 것은 없다. 좋다 나쁘다는 결국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지나간 일이라도 어떤 관점에서 보면 나쁜 일이고, 다른 관점으로 회고하면 좋은 일이 된다. 미래의 일도 마찬가지다. 나쁘게 작용할거라 예상했던 일이 전화위복이 되고, 좋은 일이라 여겼는데 재앙인 경우가 얼마나 흔한가? 코로나 시국 후에 우리가 맞이할 세상은 그 자체로 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힘겨워도. 그 전에 잠시 숨을 돌려보자. 



 희망도 절망도 결국 내 마음 속에 있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김은숙 작가의 설치작품 signal이 자리한다. 뭔가 익숙한데 싶었는데 드라마 <시그널>의 작가가 김은숙이다. 물론 미술가 김은숙과 동명이인이다. 드라마는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지만 이 작품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다.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선박들의 신호가 있는데 이쪽 업계 종사자가 아니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신호 뒤에는 그 신호가 뜻하는 바가 적혀 있다. 사람의 말은 있는 그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이 숨은 의미를 숨겨두기도, 듣는 사람이 곡해하기도 한다. 언어 자체가 가진 불명확한 측면도 있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언어나 기호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눈빛, 손짓, 표정, 몸짓이 더해져야 우리는 간신히 알아챈다. 그나마도 오해가 끼어들 확률이 많다. 오히려 낯선 외국에 여행을 간 할머니가 말이 통하지 않는 그 나라의 다른 할머니와 손짓발짓으로 서로의 의도를 알아채는 경우도 있다. 확실한 정보를 전달하는 기호나 정해진 문법에 따르는 언어보다 다른 요소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비대면 접촉의 시대에 기호로만 소통한다는 일이 얼마나 역설적인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태범, 시리아-3, 2016, 잉크젯 프린트, 아크릴 패널 및 알루미늄 복합패널]


 하태범은 주로 사진이나 모형제작을 통해 전쟁과 폭격의 흔적을 미니어처로 제작하고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한다. 위 사진을 보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반전과 평화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폭탄과 총격으로 부서진 건물들의 잔해가 거리에 깔려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새하얀 색으로만 나타난 건물과 거리는 ‘백색 공포’를 느끼게 한다. 인간미가 전혀 없다고 느껴진다. 코로나가 세계를 휩쓸어도 시리아 내전은 계속되고 있다. 대규모 전투가 줄어서 전선이 교착상태지만 각 세력 점령지 내부에서 일어나는 테러는 오히려 증가했다고 한다. 


 한숨을 쉬며 다음 작품으로 향했다. 철거를 앞둔 낙후된 뒷골목 거리가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담벼락에 그리는 낙서같은 기법으로 작업을 하는 작가 GR1의 작품이다. 


[GR1, a better tomorrow 1~, 2021, 종이 위에 페인트 마커, 스프레이 페인트]


 낙서 치고는 굉장히 섬세하게 그린 작품이다. 오래전 철거 전에 살았던 아현동 뒷골목의 한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작가는 을지로 일대를 모델로 했다는데, 사실 한국의 뒷골목 풍경이란 거진 비슷하다. 코로나 시국에 고통받는 자영업자와 영세 상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대학 시절 선배를 따라 갔던 행당동 철거투쟁 현장도 생각났다. 작품의 제목이 ‘A better tomorrow’다. 철거 후에 ‘더 나은 내일’은 누구의 몫이 될지 우리는 안다. 최소한 저기서 살거나 장사했던 사람이 맞이하는 미래는 아닐 것이다. 이 제목은 전설적인 홍콩 느와르 <영웅본색>의 영문 제목이기도 하다. <영웅본색>은 사나이들의 의리를 강조하는 범죄 액션 영화로만 볼 수 없다. 1999년 홍콩 반환을 앞둔 1980년대 홍콩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작중 인물의 정서에 깊게 자리하고 있다. 배신과 갈등과 한탕을 바라는 욕망은 불안이 원인이다. ‘더 나은 내일’에 대한 욕망이 불안을 낳고 불안은 삶을 나락으로 이끈다. 희망의 역설이 아닐까 싶다. <영웅본색>과 함께 작품을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무겁다. 


 제 2 전시실로 갔다. 무겁고 어두운 제 1 전시실과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지기를 기대했다. 


[김병관, Polluted Evidence, 드로잉 영상]



 제 2 전시실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이 작품을 보고 기대가 어긋나지 않았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면에서는 드로잉으로 표현한 인물이나 캐릭터, 로봇이 자유자재로 변화하고 있는데 마냥 경쾌하거나 가벼운 느낌만 들지 않았다. 혼종이나 변종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모습이 섬뜩하기조차 했다. 오디오 가이드에서는 공공장소에서 가볍고 경쾌하게 모든 관람객들이 즐길 수 있을거라 소개했다. 이 말도 맞기는 하다. 어린이들도 관심을 가지고 즐겁게 볼거라 생각한다. 재기발랄하고 독특하다. 리듬도 흥겹다. 그런데 나는 왜  즐기지만 못하는 걸까? 쉽게 떠올리게 되는 생물학적 혼종에 대한 우려일까? 이건 아니다. 그러면 영화 <더 플라이>처럼 나와야지. 작품이 의도하는 바도 아닌것 같다. 음, 한 캐릭터가 순식간에 다른 캐릭터로 변화하는 과정이 우리 사회의 변화 같아서일까? 이제 변화를 따라가기에 지친 아재의 속마음이 빠른 변화에 저항하나? 설마! 잠깐 고민하다가 작품 제목을 봤다. ‘Polluted Evolution’ 타락한 증거란다. 


 제목과 작품이 쉽게 이어지지 않는다. 화면의 드로잉이 부피감 없이 주로 선으로 형태를 갖추어 앙상하고 폐허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인것 같다. 타락은 곧 오염으로, 변화 자체를 뜻하는게 아닐까? 기이한 느낌으로 다음 작품을 봤다. 거대한 스크린에 비치는 장면에서 수많은 사람(처럼 보이는)이 어딘가를 향해 열심히 가고 있다. ‘Drawing city’라는 제목이다. 이 작품은 이해하기 쉽다. 도시 속의 사람들은 저마다 주체성을 내세우겠지만 사실은 매체와 자본의 이끌림에 따라갈 뿐이다. 음, 제 2 전시실은 희망을 준다며? 오히려 이전 <잠식>만큼이나 어두운 주제가 아닌가? 다음 작품에서 느끼는 바도 비슷했다.



 이민혁 작가의 탱고 시리즈다. 이토 준지의 만화 <소용돌이>가 떠오른다. 얼굴에 표정이 없이 남녀 커플이 탱고를 추며 빙글빙글 돌고 있다. 오디오 가이드에서 작가의 취미가 탱고라서 자신도 즐거우며, 그림도 밝고 유쾌하다고 소개했다. 이토 준지의 <소용돌이> 이미지에 너무 투영이 되어서인지 나는 유쾌한지 잘 모르겠다. 한 군데에만 몰두한 사람들의 무심한 집중이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진다. 친하게 지내던 동기가 탱고에 빠졌는데 그 친구 생각도 났다. 일이 아닌 모든 여가를 탱고에 집중한다. 작가도 그런걸까? 코로나 시국에서 탱고 파티가 열리기 어려웠을텐데 탱고가 취미인 사람들은 어떻게 즐기고 있을지 잠깐 궁금해졌다. 그나저나 왜 제 2 전시실의 작품이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느낌이 아닌지 의아해졌다. 겉보기에는 분명 밝은데 조금만 생각하면 음울한 정서가 더 지배적이다. 그러다가 진짜로 밝은 작품을 만났다. 


[김원근, 순정맨, 2021, 레진, 에폭시, 아크릴 채색]


 조폭같은 인상이지만 수줍게 마스크를 착용하고 꽃을 들고 누군가를 절실하게 기다리는 순정맨이 나를 반긴다. 너무 반가워 기념 사진도 찍었다. 내 표정까지 밝아졌다. 우리가 코로나 이후를 기다리는 마음같다. 투박한 모습으로 조심스레 다가올 미래를 기다리는 마음이 잘 드러난 작품같다. 아까 미래는 우리의 몫이라고 했다. 순정맨의 조심스럽지만 다가올 누군가를 간절히 바라는 모습 속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할지 힌트가 된다.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험하게가 아니라 차근차근 실행해야 하지 않을까? 시종일관 무거운 느낌에서 벗어났다. <당신의 안녕>이란 주제에서 마냥 가볍고 흥겨울 수는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은 빛과 그림자의 이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우리가 안녕하기 위해선 안녕하지 못한 일과도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밝다고 소개한 작품도 이면에선 다른 감정을 보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 전시는 미술과 세계와의 접점을 고민하는 작품들을 만나게 되는 좋은 전시다. 


 <당신의 안녕> 관람을 마치니 직원이 미술관 소장품전 관람도 권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제 3 전시실은 드로잉 작품을 공개한다. 전통적인 펜이나 붓 드로잉과 확장된 개념에서 현대적 드로잉 작품도 소개한다. 평일 오후라 관람객이 별로 없어서 근처에 계신 직원이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셨다. 올림픽 공원의 역사와 야외 조각품들이 어떤 과정으로 이곳에 있는지도 말해주셨다. 몰랐던 사실을 알면서 올림픽공원과 소마미술관이 더 친근하게 다가오고 더 좋아졌다. 전시가 8월 말까지 이어지니까 공원을 산책하며 전시도 둘러보면 아주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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