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쟁이 역설이란?
기원전 6세기 무렵, 크레타 출신 철학자이자 시인인 에피메니데스는 성경(디도서 1:12)에도 인용된 유명한 말을 남겼다.
“크레타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만 한다.”
에피메니데스는 아마 당시에 크레타 사람들이 거짓말을 많이 한다는 악명이 높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서 자조적으로 말했을 것이다. 성경에서 이 말을 인용한 사람은 사도 바울인데 이 증언이 참되다(디도서 1:13)고 덧붙였다. 이처럼 유서 깊은 이 문장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 중의 하나다. 바로 ‘거짓말쟁이 역설’을 대표하는 문장으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역설이다.
위 문장이 참이라고 하자. 그러면 에피메니데스도 크레타 사람이기 때문에 거짓말만 해야한다. 따라서 그가 말한 위 문장은 거짓이 된다. 반대로 위 문장이 거짓이라고 하자. 그러면 크레타 사람은 진실을 말한다. 따라서 크레타 사람인 에피메니데스는 참을 말하므로 위 문장은 참이 된다. 문장을 참이라고 가정하면 거짓이 나오고, 거짓이라 가정하면 참이 나오는 역설이 생긴다. 아래에 나온 문장들이 같은 역설을 안고 있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 역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확립한 고전 논리학 체계를 위협한다. *배중률과 *무모순율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오면 거짓말쟁이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 배중률과 무모순율을 받아들이지 않는 학자도 있다. 고전 논리학 체계가 흔들리면 무엇이 진리인지 확신할 수 없다. *동일률, 배중률, 무모순율은 고전 논리학의 3원칙으로 우리가 쌓아올린 모든 지식체계가 여기에 근거해서 참이라는 보증을 얻는다. 거짓말쟁이 역설은 진리의 근간을 뒤흔드는 모순인 것이다.
*배중률 : 모든 명제는 참 아니면 거짓이다. 즉, 참과 거짓 둘 중의 하나이지 다른 진리값은 없다.
*무모순율 : 한 사물에 대해 같은 관점에서 동시에 그것을 긍정하면서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동일률 : 모든 명제(사물)는 그 자신과 동일하며, 다른 명제(사물)와는 다르다.
러셀의 역설
거짓말쟁이 역설과 비슷한 수학적 역설이 있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이 집합론에서 발견하고 해결(했다고 할 수 있는)한 ‘러셀의 역설’이다. 집합론은 어려우니까 대신 말로 풀어 쓴 ‘이발사 역설’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다.
어느 작은 마을에 한 명의 이발사가 있다. 그 이발사는 어느 날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앞으로 자기 수염을 ‘스스로 깎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수염을 깎아줄 것입니다. 대신 ‘스스로 깎는’ 사람은 깎아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이발사의 수염은 누가 깎아야 할까? 다른 사람이 이발사의 수염을 깎아준다면 이발사는 ‘스스로 깎지 않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자기가 자신의 수염을 깎아야 한다. 만약 자신이 직접 수염을 깎는다면 ‘스스로 깎는’ 사람이 되므로 자신이 깎으면 안된다. 이 상황도 역설이다. 이를 표현한 우리에게 친숙한 속담이 있다.
“중이 제머리 못 깎는다.”
거짓말쟁이 역설과 이발사 역설은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러셀의 역설’이 수학적, 논리적 역설이라면 ‘거짓말쟁이 역설’은 의미론적, 인식론적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해 보이는 이유는 두 역설 모두 ‘자기지시적’이기 때문이다. 에피메니데스는 자신이 포함된 크레타 사람에 대한 진술을 하고 있다. 그가 말한 문장은 자기 자신에 대한 언급이다. 이발사가 처한 모순적 상황 또한 자신의 수염을 깎아야 할 때 생기는 문제다. ‘이발사 역설’을 ‘러셀의 역설’로, 집합으로 나타내면 이 ‘자기지시적’이란 뜻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자기지시적이기 때문에 순환적이다. 두 역설 모두 문장의 내용을 먼저 분석하고 분석한 내용을 다시 그 문장에 적용해야 역설이 드러난다. 러셀은 ‘자기지시적’이고 ‘순환적’인 특성을 해결하면 두 역설 모두 풀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유형이론’을 도입해 역설을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불완전성 정리와 컴퓨터 과학의 탄생
‘러셀의 역설’은 당시 수학자들이 생각하던 바와 달리 수학이 허약한 토대에 서 있다는 점을 내보였다. ‘거짓말쟁이 역설’이 고전 논리학 체계를 위협한 일과 마찬가지다. 수학자들은 수학이 완전한 체계를 갖출 수 있는지 탐구했다. 힐베르트는 1900년에 열린 세계 수학자 대회에서 20세기에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수학문제 23개를 제기했다. 유명한 리만 가설을 증명하는 문제도 그 중 하나다. 이 중에서 두 번째 문제가 “산술의 공리들이 무모순임을 증명하라”다. “수학의 체계가 완전한가?”라는 질문을 이렇게 표현했다. 거칠게 풀어서 말하면 수학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명제가 기계적(논리적) 조작을 통해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해 보자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수학이란 철저하게 논리적 연산을 바탕으로 수식을 전개해 어떤 법칙을 만들거나 증명하지 않는가? 이 문제가 증명되면 수학적 법칙과 증명은 찾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아니었다. 쿠르트 괴델은 1931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수학체계가 완전하지 않다는 점을 증명해 버렸다.
괴델의 증명을 흔히 ‘불완전성 정리’라고 하는데 두 가지 정리가 있다. 제1정리를 풀어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자연수 체계를 포함하는 어떤 체계가 있고, 그 체계에 모순이 없으면, 이 체계 안에서 참인데도 불구하고 참인지 아닌지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 모순이 없는 체계이며 분명 참인것 같은 명제가 들어있는데 이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제2정리는 이렇다. 어떤 공리계가 모순이 없다면, 이 공리계 안에서 자신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 즉 수학 체계에 모순이 없다는 점을 이 수학 체계가 증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언뜻 ‘러셀의 역설’ 흔적이 보이지 않는가? 자신이 스스로의 무모순성을 증명한다? 괴델의 정리는 수학적으로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기계적, 논리적 조작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수학에는 증명 불가능한 명제가 있는 것이다. 수학 체계는 완전하지 않다!
괴델의 정리를 다른 방식으로 증명한 사람이 앨런 튜링이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튜링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치기도 했다. 튜링은 사고 실험을 통해 어떤 기계를 제안했다. 아주 간단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계산하는 기계다. 이것을 ‘튜링 머신’이라고 부른다. 원시적인 컴퓨터와 같은 동작 원리다. 긴 테이프에 기호를 기록하고 원통에 감아서 움직일 수 있게 한다. 머신은 원통이 움직일 때마다 기호를 읽는다. 그러면 기계는 한번에 하나씩 입력을 받아 작동 규칙에 따라서 한 칸씩 움직이거나 그대로 있는 등의 단순한 동작을 수행하고 그 상태를 기록(저장)한다. 이런 절차가 반복된다. 이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구동하는 기본적인 절차다. 수학적 논리가 작동하는 방식을 실제 구현가능한 기계에 적용한 것이다. 이 단순한 기계는 매우 복잡한 문제까지 계산할 수 있지만 ‘정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정지 문제는 “어떤 프로그램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를 판명할 수 있는가?”이다. 이 문제도 자기지시적이다. 귀류법을 이용해서 증명하기도 하고 대각선 논법으로 증명할 수도 있다. 결론은 판명할 수 없다! 정지 문제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함축하고 있다.
튜링이 제시한 튜링 머신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의 작동 방식 그대로다. 좀더 빠르고 저장 용량이 늘어났을 뿐이다. 컴퓨터가 튜링 머신이라는 사실은 컴퓨터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인공지능이 컴퓨터로 구현되니까 인공지능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만약, 인간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이 컴퓨터와 같다면 인간의 사고 능력도 한계가 있다. 인간의 뇌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러 가설이 많으므로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는 아직 이르다. 이처럼 수학자나 논리학자들이 ‘러셀의 역설’이 제기한 수학의 완전성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다가 파생된 결과가 ‘튜링 머신’이며, 곧 현대 컴퓨터의 발전이다. 일견 실생활과 전혀 관련이 없어보이는 집합론의 문제가 맥북과 갤럭시폰이 기능하는 구조의 핵심이 되었다. 기초 학문이 어떻게 실생활과 관련되는지 보여주는 극적인 예다. 그러므로 뜬구름같은 기초 학문이 어떻게 응용될지 미리 예견할 수 없다. 단지 인간의 창의성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분지 유형 이론
버트런드 러셀은 ‘러셀의 역설’이 자기지시적이고 순환적이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보고, 이를 봉쇄하면 해결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래서 도입한 방법이 ‘유형 이론’이다. 이 이론의 아이디어는 단순하다. 명제들에 위계를 설정해서 할당하는 것이다. 어떤 집합이 있다고 하자. 이 집합 전체를 다루는 명제는 이 집합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면 자기를 지시하는 명제는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n차수의 명제는 (n+1)차수에서만 참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다. 러셀은 이처럼 명제의 유형을 무한한 차수의 계층으로 분류하는 ‘분지 유형 이론’을 내세웠다. 왜 무한한 차수가 필요할까? 수학은 아니지만 다른 일상적인 상황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다.
한 쌍의 연인 A와 B가 있다. A는 어제밤 B에게 거짓말을 하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클럽에 가서 신나게 놀았다. 둘은 오늘 만난 상황이다. B는 A의 얼굴을 보고 A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클럽에 간 것을 눈치챘다. A는 B가 자신의 거짓말을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리고는 B가 자신의 거짓말을 눈치챈 사실을 모른척했다. B는 A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자신이 눈치챘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척 한다는 사실을 또 알았다……이런 인식은 이론적으로는(느낌으로 치면 실제로도)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다.
어떤 체계나 집합을 계층으로 분류해보자. 맨 아래에 자리한 집합 A 자체에 대한 언급은 그 위 차원의 계층으로 올라간다. A에 대한 언급에 대한 언급은 또 그 위 차원으로 올라간다. 이런 식으로 하면 무한한 차원이 필요하게 된다. 이런 식의 해결도 결국 유한한 한계 안에서 완전성을 보증하진 않는다. 다만 실제 현실에서는 어느 정도 자기지시 명제가 가진 모순을 보완할 수 있다.
결정론적 세계에서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거짓말쟁이 역설’과 ‘러셀의 역설’이 무엇인지 간략하게 살펴봤다. 이 주제에 관심을 둔 이유는 내가 세상을 보는 관점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자기인식’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자유의지가 없는 결정론적 세계라고 생각한다. 미래는 미로와 같다. 미로찾기를 할 때 미로는 이미 만들어져서 주어진다. 즉,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 미로에 들어가면 구조를 알지 못한채 더듬더듬 길을 찾아간다. 갈래길이 나올 때 우리는 선택을 해야한다. (자유의지에 따라) 어떤 방향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길이 달라진다고 여기겠지만 그렇지 않다. 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한 것)은 정신이 숙고한 끝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이미 뇌의 네트워크가 결정한 사항을 사후에 합리화하거나 해석하는 일이다. 결정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의식이 뒤늦게 이를 알아챈다. 우리가 결정을 인식하는 것은 의식이 알아채야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의식이 결정을 내린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러면 이런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고, 나의 사고와 행동이 뇌 신경세포의 전기적 신호의 결과에 불과하다면 내가 무엇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게 다 무슨 소용일까? 미래가 이미 정해졌는데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한 시도를 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정해진 미래인데 뭐하러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서명에 동참해야 할까?
과거를 바꿀 수 없다. 이미 일어난 일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과 감정은 같은 일을 두고 바뀔 수 있다. 대학 신입생 때 한 선배를 싫어했다. 이거 해라, 저거 하지 마라 잔소리가 많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한 모임에서 선배를 만나 옛날 이야기를 하다가 그때 왜 그랬는지 알았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서 한 말이었다. 단지 내가 타인의 진심을 받아들일 상태가 아니었다. 마음의 벽을 높이 세웠다. 그래서 다가오는 선배를 밀어내고 싫어했다. 시간이 흘러 다른 이의 마음도 담을 수 있는 사람이 되니까 간섭과 질타가 애정으로 느껴졌다. 선배가 내게 여러 말을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여기서 달라진건 내 마음가짐과 어떤 사건을 지켜보는 관점이다. 마음가짐과 관점이 달라지면 사건에 대한 해석도 변한다.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영화나 문학작품 속에 ‘타임 루프’가 소재로 사용될 때를 떠올려보라.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서 주인공은 이기적인 남자다. 그는 어느 하루가 무한히 반복되는 타임 루프 안에 갖힌다. 어떤 행동을 해도 그 하루는 다시 시작된다. 무한에 가깝게 그는 그렇게 살아야 되나보다 여기고 벗어나기를 포기한다. 그런데 이기적인 사람으로 자신만 알던 그는 타인을 배려하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타임 루프에서 벗어난다. 무한히 반복되는 같은 하루는 미래가 결정되어 있는 상태라고 생각해도 좋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신이 변화하는 것이다. 이때 변화는 외적인 것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타인을 대하는 방식처럼 세상과 관계를 맺는 가치관이다. 같은 하루라도 어떻게 바라보냐에 따라 그 하루는 매일 같은 반복되는 일상의 하루일수도, 삶을 바꾸는 가치가 있는 하루가 될 수도 있다.
어느 누가 별 생각 없이 고기를 먹는 생활을 하다가 가축이 얼마나 잔혹한 환경에서 자라서 도축되는지 알고 동물권리에 눈을 떠 채식을 시도하는 일은 의미가 있다. 그에게 세상은 동물 권리에 눈뜨기 전과 후가 다른 곳이다. 미래는 미로와 같아서 닥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아무리 정해져 있다 해도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무기력을 느낄 이유는 없다. 설령 내가 노력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내가 처한 입장에서 내 관점을 따라 행동하는 일은 자신에게 의미가 없을 수 없다. 의미는 대상에 있지 않고 내가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이처럼 미래가 과거처럼 고정되어 있다고 해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의미는 과거와 미래에 놓여 있지 않다. 의미는 오로지 현재에 있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와 연결될 때에만 의미가 주어진다. 우리는 지금, 현재만 의식할 수 있다. 의미는 우리가 부여하는 현재 의식 안에서 있다. 과거와 미래 모두 바뀌지 않는다 해도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면 다른 미래와 과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큰 의미를 가질 때는 우리가 변화할 때다. 이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가? 자기 자신을 반성적으로 돌아봐 성찰할 때다. 자기 인식이 있을 때에만 가치관이 변할 수 있다. 러셀의 역설을 해결한 방법처럼 한 차원 더 높은 곳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다. 이를 메타 인지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자기 인식’은 우리의 삶에 가장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자기 인식은 반드시 자기를 지시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역설에 빠지기 쉽다. 실제로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가 아닌가? 이 역설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을까? 그래서 <거짓말쟁이 역설에 관한 탐구>라는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구입하고 요즘 읽고 있다. 전문 철학자가 쓴 책이라 어렵다. 논리학을 따로 공부하지 않아서 논리 연산 기호가 나오니까 이해할 수 없다. 처음에는 이 책의 전체 내용을 요약해서 풀어보려 했는데 할 수가 없다. 대신, 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지 내 생각을 정리해봤다. 그리고 책의 앞부분을 조금 따라가 보겠다.
타르스키의 언어 위계론
타르스키는 ‘거짓말쟁이 역설’을 ‘언어 위계론’을 사용해 풀려고 했다. 이 방법은 버트런드 러셀이 ‘러셀의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 도입한 ‘유형 이론’의 아이디어와 본질적으로 같다. 언어에도 위계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어떤 언어의 체계에서 만들어진 문장을 평가하는 말은 그 언어의 체계보다 한 단계 위의 유형이다.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참이다’, ‘거짓이다’처럼 진리값을 말하는 술어를 진리술어라고 한다. ‘거짓말쟁이 문장’이 진리술어를 포함한다. 타르스키에 따르면 이런 진리술어는 특정 언어의 문장에 한정되어서 적용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Snow is black.” 이라는 문장이 있다. 이 문장을 보고 대부분 거짓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런데 ‘snow’가 강아지 이름을 지칭하고, ‘black’이 어떤 동물의 집합을 가리키는 언어 체계가 있다면 이 문장은 참이다. 즉, 참과 거짓을 표현하는 진리술어는 특정한 언어 안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어떤 특정한 언어로 이루어진 문장(대상언어)과 이 문장에 대해서 진술하는 문장(메타언어)은 서로 위계가 달라야 한다. 당연히 메타언어의 위계가 한 단계 더 높다. 자기지시적인 거짓말쟁이 문장은 언어의 위계에 어긋난 문장인 것이다.
타르스키는 거짓말쟁이 역설을 낳는 자기지시적 진리술어 문장을 배제하면 역설이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내 여러 비판을 마주했다. 비판의 여러 내용을 소개하기 전에 이 책에서 저자가 타르스키의 주장을 해설한 내용을 먼저 알아보는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잠깐 언급하겠다.
“거짓말쟁이 역설은 일상언어가 의미론적으로 닫힌 언어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의미론적으로 닫힌 언어란 그 언어가 진리술어와 같은 의미론적 술어를 포함하고 있고, 그 의미론적인 술어들이 그 언어의 문장에 적용되는 언어이다. 거짓말쟁이 역설을 봉쇄하기 위해서는 그 언어가 의미론적으로 열린 언어이어야 한다(……) 의미론적으로 열린 문장은 어떤 것도 그 언어의 문장에 대해서 참 또는 거짓을 부가하지 않는다. 타르스키는 의미론적으로 닫힌 언어를 무시함으로써 거짓말쟁이 역설을 해결한다.”
의미론적으로 열린 언어의 예는 수학 방정식이다. “5*X=10”이라는 식이 있다. X=2 일 때 이 식은 참이지만, 다른 숫자를 대입하면 거짓이다. 즉, 적절한 단어가 들어가면 참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되는 문장이다. 타르스키는 이런 언어만 사용해서 역설을 없애자고 주장한 셈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일상언어가 의미론적으로 열린 언어만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일상에서는 자기지시적인 문장, 자기지시적인 진리술어를 사용하는 의미론적으로 닫힌 표현이 아무렇지 않게 쓰이기도 한다. 일상에서 적용할 수 없는 해결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편, 논리적으로도 해결되지 않았다.
‘거짓말쟁이 역설’에 대해 다른 해결책을 내놓은 크립키는 타르스키의 해결책이 먹히지 않는 반례를 하나 들었다.
197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워터게이트’ 사건이 있다. 당시 대통령 닉슨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상대 후보를 도청하다가 이를 은폐한 사건이 알려졌다. 결국 닉슨은 임기 중에 사임했다. 이 사건에 대한 닉슨과 존스의 평가가 다음과 같다.
존스의 말 : (1) 닉슨이 워터게이트에 대하여 한 말 중 대부분은 거짓이다.
닉슨의 말 : (2) 워터게이트에 대해서 존스가 한 말은 모두 참이다.
문장 (1)이 대상언어라고 하자. 그러면 문장 (2)는 (1)에 대해서 참, 거짓을 논하는 메타언어다. 그런데 문장 (1)도 문장 (2)의 참, 거짓을 논하므로 반대도 된다. 메타언어는 대상언어를 포함하니까 이런 경우는 성립할 수 없어야 한다. 위의 예도 역설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대화할 때, 무엇이 대상언어인지 무엇이 메타언어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타르스키의 언어 위계론은 일상 언어에서 발생하는 거짓말쟁이 역설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타르스키가 채택한 ‘언어위계론’ 방식은 ‘거짓말쟁이 역설’의 해결책으로 적당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물꼬를 텄기 때문에 이후 활발하게 이 역설에 대한 해결책이 여러 방식으로 등장한다. 또, 언어 자체가 내포한 언어철학의 모순도 조명을 받게 된다. 유명한 언어철학의 역설로 베켄바흐의 역설, 삼각형의 역설이 있다. 두 가지 모두 같은 형식과 내용으로 구성되어 소재만 다르니 베켄바흐의 역설 하나만 소개하겠다.
언어철학의 역설
배중률(명제 P는 참이거나 거짓이다. 진리값은 둘 중 하나이지 다른 값은 없다. 모 아니면 도!)을 적용하면 모든 사람은 흥미로운 사람과 흥미롭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흥미롭지 않은 사람’에 속하는 사람 중 가장 흥미롭지 않은 사람은 가장 흥미롭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이제 흥미로운 사람이 된다. 이 사람은 이제 흥미로운 사람이 되었으므로 ‘흥미로운 사람’의 범주에 포함된다. 그러면 ‘흥미롭지 않은 사람’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 중 원래는 두 번째로 흥미롭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런데 가장 흥미롭지 않은 사람이 ‘흥미로운 사람’으로 옮겨 갔으므로 두 번째로 흥미롭지 않은 사람이 가장 흥미롭지 않은 사람이 된다. 그러면 그 또한 가장 흥미롭지 않은 사람이므로 ‘흥미로운 사람’의 범주에 속하게 되어 ‘흥미로운 사람’의 범주로 옮겨 간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흥미롭지 않은 사람’의 범주에 최후의 한 사람만이 남게 되는데, 그는 유일한 흥미롭지 않은 사람이 된다. 유일하다는 사실 때문에 그도 흥미로운 사람이 되어 ‘흥미로운 사람’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다 ‘흥미로운 사람’에게 속하게 되는 결과가 나온다. 결국 모든 사람이 다 흥미롭다!
‘거짓말쟁이 역설’이나 ‘베켄바흐의 역설’을 보면 우리가 언어를 통해 상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굳이 이런 논리학 개념을 빌어오지 않더라도 의사소통이 잘 안되는 수없이 많은 경험을 누구나 했을 것이다. 혹자는 언어의 한계를 진심으로 극복하자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진심이면 다 통할까? 나는 상대가 준비되지 않으면 진심도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겪었다. 둘 다 진심인데 둘 다 상대의 진심을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진심’이란 참되고 거짓이 없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이 진심이 과연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할 때 충분조건은 아니라도 필요조건이라도 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거짓말이나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의사소통에 더 필요하다.
거짓말과 사회적 소통 능력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무브 투 헤븐 :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라는 드라마를 감명 깊게 봤다. 야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한그루(탕준상)는 아버지와 함께 죽은 사람의 유품을 정리하는 일을 한다. 그는 타인의 감정을 읽지 못하고, 공감능력과 사회적 소통 능력이 떨어진다. 그의 아버지는 이런 그를 따뜻이 보듬으면서 고인이 남긴 유품이 고인에 대해 말을 한다고 알려준다. 한그루는 야스퍼거 증후군임에도 불구하고 그만의 집중력으로 유품을 통해 고인의 생전 생각과 의도를 밝혀낸다. 올해 본 “나빌레라”와 더불어 죽음과 노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면서 깊은 감동을 주는 드라마였다. 드라마를 보면 한그루는 상황에 맞게 대화를 이어가지 못한다. 또, 다른 사람이 말한 내용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다. 타인의 감정과 기분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한그루가 사회성이 발달하지 않았는데도 아이처럼 순수하게 보인다면 이런 특징들 때문일 것이다. 서너 살이 되기 이전의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거짓말을 할 수 있으려면 여러 가지 전제 능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거짓말을 할 때, 상대가 이 말을 믿게끔 만들려고 한다. 이러한 의도와 함께 내가 하는 말을 상대가 믿는다는 기대가 같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메타인지가 없다면 만들 수 없는 구조다. 자신의 마음과 더불어 상대의 마음도 읽을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이 상황 전체를 메타인지로 꿰뚫어 보아야 비로소 제대로 된 거짓말이 나올 수 있다. 고도의 인지적 활동이 아닐 수 없다. 조금 더 자세히 분석해보자. 우선 거짓말을 한다면, 자신과 상대방이 각자 다른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거짓말이 성립된다. 나에겐 거짓이지만 상대에겐 진실이라야 거짓말이 통한 것이니까 말이다. 이 점이 바탕이 된다. 여기에 더해 거짓말을 꾸며내면서 동시에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추정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마음 안에 나의 의도와 상대의 마음을 같이 담되 이를 구별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어라!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든다. 이는 바로 우리가 누군가와 의사소통을 할 때 일어나는 일이지 않는가? 그러면 왜 야스퍼거 증후군이나 자폐를 앓는 사람이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이런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의사소통 능력인 셈이다.
그러니 선생님들 혹은 부모님들은 아이가 거짓말을 했다고 무조건 혼내지 않는게 좋지 않을까 싶다. 물론 타인에게 해를 입힌다면 당연히 제재과 교육이 필요하지만 그렇지 않은 거짓말은 너그럽게 넘어가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거짓말쟁이가 되는건 훗날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는 사전 연습인 셈이니까.
진심, 거짓이 없는 마음만을 말한다는 것은 곧 야스퍼거 증후군 환자가 말하는 것과 같다.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거짓말쟁이 역설’에서 출발해, 언어의 소통 불가능성을 이해하려다가 ‘거짓말’의 역할까지 흘러왔다. 처음 이 책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할 때, ‘거짓말’의 역할을 쓰게 될 줄 몰랐다. 지금 쓰면서 보니까 신기할 정도다. 이쯤 되면 인간의 언어는 그 자체가 역설이다.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능력이 진심이 아니라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라니!
로물루스와 레무스 가설, 문법 언어의 탄생
우리의 언어가 역설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그 탄생에 있지 않을까? 얼마 전에 매우 재미있는 언어의 탄생에 관한 가설을 들었다. 일명 ‘로물루스와 레무스 가설’이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고대 로마를 세운 전설적인 쌍동이 형제다. 이들은 원래 왕족이지만 이들이 왕위를 뺐을까 두려워한 왕이 이들을 내다버린다. 쌍동이 형제는 사람이 아니라 늑대에게 구해져 자라게 된다. 이 가설을 소개한 사람은 현재 스위스에서 살면서 그곳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 스위스는 국제 기구와 다국적 기업이 많다. 스위스 국가 자체도 독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사용자들이 섞여 있다. 수많은 언어가 사용되는데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프랑스어와 한국어 사용자가 결혼하면 둘 사이의 자녀는 부모의 모어를 배우지만, 새로운 의사소통 체계를 가족 내에 만들기도 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언어가 만나서 소통의 편리함을 위해 생겨난 단순한 중간 언어를 ‘피진어’라고 한다. 피진어가 발달해 문법이 생기고 어휘가 확장되면 ‘크레올어’가 된다. 영어와 서아프리카어가 만나서 생겨난 자메이카의 파트와가 크레올어다. 현재의 영어나 프랑스어도 탄생 당시엔 라틴어와 게르만족의 언어가 만난 크레올어로 시작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그러면 첫 언어는 어떻게 나왔을까? 크레올어처럼 다른 언어를 기반으로 나온 것도 아닌 인류 최초의 언어 말이다.
언어학 연구자들에 따르면, 만 6세 전에 언어에 노출되지 못한 아이는 아무리 가르쳐도 문법 언어를 습득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 이전에 노출되면 문법을 갖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 그러면 여기도 역설이 생긴다.
(1) 언어 환경에 접하지 못한 어른은 문법 언어를 만들거나 배우지 못한다. 즉 언어가 없는 상태에서 어른들끼리 언어를 만들 수 없다.
(2) 어릴 때 언어를 배우지 못하면, 사람은 평생 언어를 배울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언어가 탄생했을까? ’로물루스와 레무스’ 가설을 주장한 사람은 안드레이 바이쉐드스키라는 신경과학자다. 그는 7만 년 전쯤에 최소 두 명의 유아들에 의해 최초의 문법 언어가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가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유아들이 끊임없이 수다를 떤다
* 유아들이 5세가 되기 전에 공간, 지각 등의 문법 요소를 가진 언어가 이들 사이에서 탄생한다.
* 이 유아들이 자라서 문법 언어를 후세에게 가르친다. (어른들은 문법 언어를 못 배운다)
처음 유아들이 수다를 떨 때, 합의된 언어가 없었을 것이다. 문법적 요소가 없는 명사 단어라면 서로 익히기 쉬웠을 것이다. 만약, 어느 한 아이가 새를 보고 손으로 가리키며 ‘새’라고 발음했다면 다른 아이가 이 발음을 따라하면서 ‘새’가 날아가는 새를 지칭하는 단어가 되는 방식이면 충분하다. 그러면 문법적인 요소를 가진 언어는 어때야 할까? 단어에 더해 누가 말을 하는지, 말을 하는 ‘나’와 내가 하는 ‘말’ 자체를 언급하는 재귀적, 메타적 방법이 들어가야만 문법을 가진 문장이 탄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언어의 탄생 자체에 자기지시적인 ‘거짓말쟁이 역설’이 기여한 셈이다. 언어는 자의적이라고 한다. 이 말은 언어의 대상과 대상을 나타내는 언어 사이에 어떤 필연적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언어는 서로가 서로를 보증한다. 사실 사전을 펼쳐 단어의 정의를 따지면 온통 순환논리다. 이 말이 저 말을 설명하고 저 말이 이 말을 설명한다. 자기지시와 이에 따른 역설은 우리 언어의 탄생에까지 소급되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이 아닐까?
의사 소통 전체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부분은 생각보다 적다고 한다. 이제는 많이 알려진 내용이다. 말과 더불어몸짓, 눈빛, 시간과 장소, 전후 사정 등등 의사 소통을 돕는 요소는 많다. 그래도 내용 대부분은 언어가 전달한다. 완전한 의사소통은 언어 자체의 한계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불가능성이 인간의 삶에 커다란 위안을 주는 공감을 낳지 않았을까? 인간의 삶 자체가 역설이 아닐까? 실은 그렇지 않다 해도 도리가 없다. 우리는 언어로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딱 떨어지는 논리적 삶이 아닌 역설의 삶을 우리는 헤쳐나가야 한다. 그 편이 재미있고 감동적이라 다행이다. 거짓말쟁이 역설은 인류 지식의 체계를 위협하는 몹쓸 녀석이 아니다. 우리의 삶 저변에 깔려 있는 공감의 힘과 소통의 능력을 드러내는 역설이 아닐까? 거짓말쟁이 역설 해결책을 보려다 이리저리 흘러와 찾은 깨달음이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