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영 作
나는 어떤 일에 명암이 있으면 암을 먼저 본다. 좋게 말하면 가장 낮은 것 그리고 소외된 것에 마음을 쓰는 편이고, 나쁘게 말하면 부정적이고 삐딱한 시선을 가진 편이다. 그렇다 보니 시니컬한 나의 시선과 말투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도 제법 있다. 소위 구김살 없이 자란 사람, 혹은 밝고 좋은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그렇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을 마주할 때면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괜스레 움츠러들고, 그 사람이 마냥 부러워진다. 그가 햇볕에 잘 말린 빳빳한 린넨이라면, 나는 축축하게 젖어 한껏 구겨진 린넨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어린이라는 세계’가 그런 사람 같았다.
예전에는 ‘어린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연스레 노란 병아리들과 까르르 웃는 꼬마 아이들을 동시에 떠올렸다. 분명 나에게도 어린이는 귀엽고, 사랑스럽고, 해맑은 존재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어린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괜스레 불안한 기운이 먼저 느껴졌다. 어쩐지 먼저 피하고 싶은 느낌이랄까. 이제는 어린이를 마냥 선량하고 순수한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어렵다. 나의 상상보다 영악하기도 하고, 무지하기에 되려 잔인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연일 미디어에 오르내리는 촉법소년들 외에도 “너희 부모님이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와 같은 서늘한 말을 내뱉는 꼬맹이들을 보면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결정적으로 어린이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은 몇 해 전 그 일이 있고 난 후였다. 당시 동생은 5세 반을 담당하는 유치원 선생님이었다. 어디서, 어쩌다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린이의 얼굴이 조금 부어올라 있었다. 그 어린이는 담임 선생님께 맞아서라고 거짓말을 했다. 학부모는 CCTV를 보여달라고 요구했고, 원장은 이를 거절했다. 무슨 치부가 드러날까 두려웠던 건지 모르겠지만, 원장에게는 사실 여부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동생에게 조용히 잘 마무리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흥분이 극에 달한 아이의 부모님은 내 동생에게 위협적인 협박까지 하고 말았다. 아빠는 그 며칠간 유치원 앞에서 동생의 퇴근을 기다렸다가 같이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결국 동생이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히자 그제야 원장은 CCTV를 공개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무탈하게 흘러가는 아이들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뒤 동생은 유치원을 그만두었고, 1년간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누구와도 그 일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다. 물론 부모와 원장의 그릇된 대응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일주일의 시간 동안 그 어린이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누이가 선생님께 맞은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어린이가 있지도 않은 일을, 그렇게 오랫동안 거짓말할 리가 없으니까. 나 역시 이 일을 겪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1년 동안 마음의 상처를 추스른 동생은 다시 유치원으로 돌아갔지만, 그 이후로도 선생님께 혹은 친구들에게 맞았다고 거짓말을 하는 어린이는 종종 등장했다. 나는 어린이들이 조금은 무서워졌다.
그리고 최근 회사에서 연말정산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나는 미혼이고 양육하는 아이가 없다 보니 인적공제를 받기가 힘들었다. 그런 부분에서 세금 공제 혜택이 좀 더 다양해지거나 미혼들을 위한 국가 정책도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동료가 애를 낳지 않는 나는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고, 나중에 본인 아이들의 피를 빨아먹을 기생충 같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덧붙여 내가 지금 행복하다며 하는 모든 일들은 찐 행복이 아니라고 말했다. 오로지 애를 키워봐야 인생의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나는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들은 것 자체가 일단 민망했다.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고, 나의 선택일 뿐인데 무언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몰아가는 분위기가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그의 말에 동조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다른 학부모 동료들을 보며, 너무나 불쾌하고 충격적이어서 제대로 된 대꾸를 할 수 없었다. 나는 현재 어린이들의 성장을 위해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이를 낳지 않은 채 미래에 연금을 받는 나는 그저 사회의 짐이 되고 마는 걸까.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이토록 이기적이고 편협한 어른들 사이에서 자라날 어린이들이 조금 더 무서워졌다.
나는 그래서 ‘어린이라는 세계’가 읽고 싶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어린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런 어린이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글일 테니까. 어쩐지 나랑은 일도 상관없는 이야기일 것만 같았고, 어쭙잖은 궤변을 늘어놓는 직장 동료들에게 좋은 근거를 만들어 줄 것만 같았다. 이거 보라며, 어린이가 이렇게 위대하다며, 결혼과 출산은 필수라고. 그래서 처음에는 흠잡을 곳이 없는지 찾느라 분주했다. 최선을 다해 구석구석 뒤졌지만, 흠을 찾기는커녕 책에 흠뻑 빠져들고 말았다. 독서 교실 어린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너무나 흥미진진했고, 때로는 감동적이었다.
독서 교실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염두에 둔 것인지, 글이 쉽고 명확하게 잘 읽혔다. 게다가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문장들이 정말 많아서 책이 온통 플래그 투성이 될 정도였다. 그리고 간결하게 정돈된 문장 안에는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분명하게 담겨 있었다. 그녀는 어린이를 예찬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가 어린이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어른이 해주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었다. 잘못한 어린이가 있다면 그것은 그런 모습을 보여준 어른의 문제다. 내가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어린이가 아니라, 그런 본보기가 되어준 어른들이었다. 어린이에게는 어른들이 곧 환경이고 세계이며, 어린이는 어른들이 그들을 대하는 방식으로 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른이 바로 서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어린이들 역시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며 바르게 대하는 것, 어린이들에게 선한 말과 옳은 행동을 하는 것. 그것에서 출발하여 그 어린이가 어른이 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니까. 결국, 세상을 더 좋게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자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나는 결코 어린이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린이와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불허의 대화가 마냥 신기하고 재밌다. 때로는 의외의 가르침을 얻기도 하고! 다만 모든 어린이가 상냥하고 순수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았고, 누군가 '어린이'라는 주제를 꺼내는 것에 예민했을 뿐이다. 한껏 배배 꼬여서는 애도 없는 내가 감히 ‘어린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해도 될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렵사리 도전했던 ‘어린이라는 세계’는 어린이에 대한 내 마음의 벽을 허물어 주었다. 저자가 어린이에게 보내는 공감과 응원의 메시지는 나에게 보내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어린이라는 세계’는 웅크리고 있던 내 안의 어린이까지 다정하게 보듬어주었다. 나는 이제야 어린이와 함께 성장할 준비가 되었다.
어린이는 나중에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도 할 수 있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p.18
지금 어린이를 기다려 주면, 어린이들은 나중에 다른 어른이 될 것이다. 세상의 어떤 부분은 시간의 흐름만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나는 어린이에게 느긋한 어른이 되는 것이 넓게 보아 세상을 좋게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를 기다려 주는 순간에는 작은 보람이나 기쁨도 있다. 그것도 성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린이와 어른은 함께 자랄 수 있다. -p.20
또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무서운 것들이 어린이의 어떤 면을 자라게 한다는 것을. 무서운 것이 있기에 조심하고, 무서운 것을 마주하면서 용기를 키우고, 무서운 것을 이겨 내면서 새로운 사진이 된다는 것을. 그런 식의 성장은 우리가 어른이 된 뒤에도 계속된다. 그러니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해 줄 일은 무서운 대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주할 힘을 키워 주는 것 아닐까.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을 응원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다독이면서. -p.53
사람들이 각자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는 우주는 활기차다. 서로 달라서 생기는 들쭉날쭉함이야말로 사무적으로 보일만큼 안정적인 질서다. 그런 우주 속에서 살아간다는 게 나는 안심이 된다. 우주가 우리 모두를 품을 수 있을 만큼 넓다는 사실도. -p.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