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과 단절, 그 사이 회색지대에 대하여
함께일 땐 혼자이고 싶다. 혼자일 땐 함께이고 싶다. 해 뜬 날 예고 없이 내리는 소낙비처럼 변덕스러운 내 성격은, 관계 맺음에도 통용되는 듯하다.
자랑할만한 일은 아니지만 나는 서른이 된 지금까지도 부모님과 함께 산다. 가족들과 떨어져 나 혼자 살아본 경험은 대학 시절 해외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 6개월, 몇 해 전 파견 근무로 타지에서 1년가량 살아본 것이 전부이다. 얼마 전 뉴스에서 30대 미혼남녀의 절반 이상이 부모와 함께 거주 중이라고 하던데, 내가 그 절반 이상의 캥거루족인 셈이다. 혼자가 아니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아직까지 부모님과 함께 산다고 하면 어른이 되다 만 것 같나 보다. 하기야 내가 생각해도 왕복 네 시간의 통근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본가에서 살길 고수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철이 없거나 돈이 없거나 아무튼 없어 보일 것 같긴 하다. 그동안은 그래도 외동이라, 언제 결혼할지 몰라서 같은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상황을 모면했지만 나이 앞자리가 3이 되어보니 나 조차도 슬슬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내가 독립을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는 고립이 두려워서다. 시기적 애매함이나 돈 문제 같은 건 사실 부차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나는 고요함을 갈망하지만 동시에 동 떨어진 섬처럼 고립되고 싶지 않다. 주변에선 처음에만 그렇고 살다 보면 혼자가 더 낫다고들 하던데 글쎄, 아무래도 나의 유전자는 외로움에 취약한 것이 분명하다. 찰나였던 자취의 경험은 내게 혼자의 자유로움보단 짙은 외로움을 선사했으니까. 오죽하면 그땐 주말이 두려웠다. 주말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눈을 떴을 때 쥐 죽은 듯 고요한 풍경, 공기조차 숨을 참는 듯한 그 느낌은 나를 숨 막히게 했다.
헌데 가족들과 함께인 지금은 갖은 소음과 끊이지 않는 대화가 나를 괴롭게 한다.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쌀쌀맞게 방에 들어가 방문을 굳게 닫고 잠시간 혼자 만의 시간을 갖는다. 밖에서 들려오는 텔레비전 소리가 나의 심기를 거스르면 시험을 앞둔 사춘기 학생 마냥 방문을 슬쩍 열고 소리 좀 줄이라고 잔소리를 한다. 주말 아침, 아직 해가 채 뜨지도 않은 꼭두새벽부터 달그락거리는 주방 소음도 스트레스다. 새벽 다섯 시에 한 번 깨고, 여섯 시에 또 한 번. 이렇게 선 잠을 자고 나면 외로웠던 자취 시절이 그리워진다.
이럴 때 찾아오는 혼자만의 시간은 단거리 질주 후 마시는 물처럼 달콤하다. 얼마 전 부모님께서 사정상, 일주일 정도 타지에 다녀오실 일이 있었다. 귀가해 현관문을 열었을 때 맞이하는 적막과 냉기는 새삼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었지만 동시에 홀가분했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밥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고, 원하는 시간에 잠들어 바라는 시간에 일어날 수 있어서 좋았다. 그 기간 희한하게 낮잠도 많이 잤는데, 그간 알게 모르게 누적됐던 관계의 피로가 한순간에 몰려온 것이 아닐까 싶었다.
고요함을 벗 삼아 지낸 어느 밤 산책 삼아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내게 필요한 건 ‘간헐적 고독’ 같다고. 영원한 단절도 아닌 지속된 연결도 아닌 그 중간 어느 지점, 연결과 단절이 균형을 이룬 삶이 내가 바라는 삶인 것 같다고 말이다.
엊그제 부모님께서 집에 돌아오셨다. 고작 일주일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간만에 느끼는 사람 온기가 무척이나 반갑다. 괜스레 아이처럼 부모님 주변을 맴돌며 살을 부빈다. 그리웠던 강아지까지 꼭 품에 안고나니 마치 오랜 여행 후 집에 돌아온 것처럼 푸근한 기분이다. 여행 후 이야깃거리를 풀어놓듯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그간 쌓아둔 대화 거리가 자연스레 새어 나온다. 그래, 내겐 이런 간헐적 고독이, 이런 간헐적 화합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