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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재원 Apr 15. 2017

농구와 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오랜만에 보는 친한 동생들과의 식사자리에서 내가 농구에 관한 얘기만 하면 '아, 또 농구야?'하며 장난 섞어 진저리를 치는 한 동생이 물었다.


"오빤 농구가 왜 좋아?"


이 질문에 나름 대답하긴 했지만 나 자신도 시원스러웠던 대답은 아니었다. 사실 누구를, 혹은 무엇을 좋아하는 데에 이유는 없을 수도 있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던 답을 찾기 위해서였을까? 나는 농구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1.

생각해보면 첫인상이 썩 좋은 놈은 아니었다.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첫 점심시간에 나는 코트 밖에서 동급생들의 반코트 플레이를 구경 중이었다.


그러다가 한 친구가 살짝 다쳤는지 주위를 잠깐 둘러보더니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더니 나보고 교체하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대타로 들어간 나는 잠시 뒤 수많은 친구들 앞에서 굴욕을 당해야만 했다. ‘악!’ 외마디 단말마와 함께 뒤로 발라당 자빠져 버렸다. 내 마크맨의 포스트업을 막다가 그 친구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글자 그대로 뒤로 발라당 넘어진 것이다. 이것이 농구와의 첫만남이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알고 보니 그 친구는 학년 내에서도 꽤 농구를 잘하는 친구였다는 점이 심심한 위로가 될 뿐이었다.


좀 더 변명하자면 중학생 때는 모래 운동장이라 농구 골대가 있어도 나를 비롯한 남학생들은 축구가 메인스트림이었다. 쉽게 말하면 강백호 같은 농구 초짠데 피지컬이나 능력치는 달재였으니 농구깨나 하던 친구의 파워풀한 포스트업을 막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런 굴욕에도 불구하고 우레탄 코트에 골대만 무려 8개여서 점심시간과 방과 후 코트에는 농구를 하는 사람들로 언제나 가득했던 환경 탓인지 난 농구에 슬슬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이후 난 점심시간과 체육 시간, 방과 후, 게다가 주말에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농구를 하기 바빴다. 누구든 그런 경험이 있을테지만 간혹 내 평소 실력보다 농구가 잘 되는 날이 있었다. 스포츠 과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flow 상태 즉, 몰입에 빠진 상태였던 것 같다. 한 번은 점심시간이었는데 동급생 중에 키도, 윙스펜도 길고 심지어 미국에서 살다가 와 농구를 잘하던 친구 A와 상대편으로 반코트 게임을 하게 되었다.


베이스라인 근처, 노마크 상황. A는 골 밑에 있었다. 나에게 패스가 온다. 점프 슛을 한다. 내가 슛을 쏘더라도 A의 순발력과 높이는 블락을 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A의 블락을 살짝 넘겨 성공시킨 고각 슛에 같이 농구하던 친구들의 감탄사와 A의 약간은 당황한 표정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원 실력의 120% 이상을 발휘하는 이런 짜릿한 순간들이 바로 농구에 빠져드는 순간들이었다. 그렇게 농구는 내 삶에 천천히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2.

농업혁명 이후 증기기관의 발명은 산업 혁명의 발판이 되었다. 학기 초에 새로 만난 친구처럼 농구와 친해지긴 했지만, 아직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그런 상태에서 ‘슬램덩크’와의 만남은 그런 우리 관계에 있어 마치 증기기관의 발명과도 같았다.


슬램덩크에서 내가 가장 소름 돋게 본 부분은 산왕전이다. 허리 부상 이후 테이블에 뛰어 올라가 ‘아아 산양은 내가 쓰러뜨린다. by 천재 강백호.’ 라고 선언을 했을 때와 막판 정우성의 덩크를 뒤에서 블락 하는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


눈치 챘겠지만, 그때의 나는 강백호를 가장 좋아해서 당시 유행하던 온라인 농구 게임 ‘X리스타일’에서도 파워 포워드로 플레이하곤 했다. 이런 내 취향은 실제로 첫 농구 스타일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난 170의 작은 키에도 골밑슛이 꽤 좋았다. (지금은 173쯤 된다. 고 믿고 있다.)게다가 나름 피딩 능력이 좋아서 골밑 가까이에서 포인트 포워드스러운 플레이를 즐겨 했다. 그러다가 찬스가 나면 코비의 무한 펌프 페이크와 하킴의 드림 쉐이크를 섞어 놓은 듯한 필살기를 골 밑에서 자주 쓰곤 했다.(그러다가 어지럼증을 호소하기도 했다.)이런 플레이 스타일 때문에 농구를 하면 주변의 찬스를 살피곤 했는데 그런 스타일에 내 친구들은 ‘눈치 농구’라며 내 스타일을 정의 내려 주었다.


또 다른 친구는 내가 키만 좀 더 컸으면 포워드로 더 좋고, 좀 더 빨랐다면 가드로 정말 좋을 텐데 아쉽다며 평해주기도 했다. (근데 그거 당연한 소리 아닌가?)


농구 실력이 상승되면서 교내 아마추어 레벨에서 마이너를 거치면서 (결국 메이저 리그로 올라가진 못했다.) 결국 난 키의 한계를 절감하고 전직을 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애초에 골밑에서 플레이 할 때도 패스하던 가락이 있어서인지 파포 다음으로 선택한 직군(?)인 포인트 가드에도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뭐 키가 작아서 그렇게 된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건 기분 탓이다.)그래도 물론 상대팀에 큰 키가 없으면 골밑에서 파워 포워드로 부업을 뛰곤 했다.


패스를 좋아하긴 했지만 처음부터 가드로 농구를 했던 게 아니라서 패스 외에 공격 옵션이 별로 없었던지라 퓨어 포인트 가드처럼 플레이를 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스탁턴, 키드, 내쉬, 크리스 폴 같은 퓨어 포인트 가드를 좋아했고 지금도 퓨어 포인트 가드의 플레이를 지향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 '제일 좋아하는 선수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내가 선호하는 스타일과는 우주 끝까지 정반대인 '코비 브라이언트'라고 대답한다.


3.

코비가 누군가? 20년의 선수 생활 내내 난사와 독불장군같이 혼자 슛을 독점하던 선수가 아닌가? 내가 지향하고 좋아하는 스타일과 정반대의 성향의 선수에게 이렇게 빠질 줄은 나도 몰랐다.


처음부터 지금처럼 코비의 열렬한 팬이 됐던 건 아니다. 코비는 농구를 좋아하게 되고 나서 NBA에도 흥미를 갖기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때 내게 코비는 기량의 출중한 엄청 잘하는 선수였다.


당시 인터넷을 통해 게걸스럽게 움짤이나 믹스, 하이라이트 영상을 탐닉하던 때였고 경기 중계를 보지 않았기에 저런 코비의 독불장군 스타일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다. 그때 느낀 코비는 다른 선수들과는 조금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유연하달까 단순히 ‘잘한다’는 표현은 조금 부족했다.


이때도 물론 코비를 좋아하긴 했지만 가장 좋아했던 건 아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동안은 ‘화이트 초콜릿’ 제이슨 윌리엄스나 스티브 내쉬의 믹스 영상에 빠지면서 킬링 패스, A 패스를 좋아하게 된다. 이랬던 내가 코비에 빠진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아마 코비의 워크 에틱(work ethic)에 대해서 알게 됐을 때가 아닐까 싶다.


난 선천적으로 게을렀다. 심지어 친구가 놀자고 집에 있던 나를 불러내도 귀찮아해서 친구들은 나를 꼬시는 스킬을 반강제적으로 익히게 될 정도였다. 그런 내게 코비의 일화들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아버지가 내 나태함을 나무라며 쓴소리를 하실 때 자주 쓰던 문구가 ‘치열하게 살아라.’였다. 처음으로 정말 치열하게 산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된 느낌이었다. 어떤 위인에게서 느낄 법한 어떤 경외감을 코비에게서 느꼈다. 그 경외심은 도저히 나는 저렇게는 못할 것이라는 어렴풋한 확신에 더욱 커졌다.


이후 난 코비를 단순히 좋아하는 걸 넘어 존경하게 되었다. 수많은 비판과 비난에도 꿋꿋하게 본인의 길을 걸어간 점, 끊임없는 향상심과 농구에 대한 열정은 그 어떤 위인전의 위인보다도 내게 존경심이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었다.


4.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몇 해 전 미생을 통해 다시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실은 조치훈 9단이 남긴 어록이다. 농구 역시 인생의 중요한 일 앞에서는 내팽개칠 수 있는, 그래봤자 공놀이일 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농구는 내 인생에서 빠져서는 안될, 큰 부분을 차지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난 농구를 정말이지 사랑한다. 이제는 그 동생에게 농구를 왜 좋아하는지, 어떻게 좋아하게 됐는지 얘기해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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