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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뿔도 없는 게

스페인 남부 여행, 그리고 다시 이스탄불에서 '이찬혁-파노라마'

by 미네

지난 2주 동안 아들의 국제학교는 방학을 시작했다. 자연히 아들의 방학이라며 다니던 이스탄불에서의 영어 수업을 빠진다. 그리곤 스페인 남부 여행, 결혼하기 전 남편에게 혼자 떠나겠다고 말했던, 버킷리스트였던 곳을 여행했다.


나의 버킷리스트가 무색하게 그저 돼지고기가 더해진 이스탄불처럼, 스페인에서 생활한다. 뒤로 배경판이 바뀌었다.


사실 이스탄불에서 영어 수업을 들으며 이곳을 계속 가냐 하나 말아야 하나 번민을 했다. 솔직히 그동안 영어 수업에 가서 새로 배운 건 없었다. 새롭게 알게 되었다는 것보다 내가 이걸 잊고 있었구나를 확인하는 시간이 많았다. 혼자 교재를 두고 일주일이면 읽어버릴 일을 왜 여기까지 와서 하고 있지 하고 생각했다.


"효율성이 없이 오간다고 하루가 바쁘네."

번민이 쏟아 오른다. 생각 없이 그냥 해야 하는데, 어느새 4월이었다.




그래도 느지막이 대학을 다니기 시작했다는 50대 후반의 튀르키예 어머님을 보는 게 자극이 되었다. 이미 자녀들이 출가를 했고, 이 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고 올해 새로 입학한 대학 수업에 가신다고 말하셨다. 붉은 뺨에 뿌듯함이 떠오른다.

'놀라운 토요일'이라는 오락프로그램을 즐겨보며, 한국 드라마에서 들은 이름인 '민주'로 자신을 불러달라는 비슷한 나이대의 튀르키예 어머님은 선생님이 시키신 영어문장을 열심히 적으셨다. 그리곤 나에게 이름인 '민주' 뒤에 '서울'을 붙이면 어떠냐고 물으셨다. 난감하다. 통상 사람의 이름엔 지역명을 붙이지 않는다며 그녀에게 '서울'은 굳이 더하지 않기를 말했다.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조용했던 내 휴대폰 속 노란 대화창에 숫자가 더해진다. 듣기 문제를 풀다 한참 동안 수업 대신 멍히 앉아있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가 노란 대화창에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족의 건강 문제다. 한참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노란 창에 가득해지는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를 읽는다.


마음이 답답해진다. 수업 중에 나가선 결국, 전화를 건다.

나는 무얼 말해야 할까. 무얼 해줄 수 있을까. 괜찮은 척을 해본다.


마흔이 넘은 나이가, 무겁다.



쉬는 시간 20분, 내 나이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내게 한국 화장품에 대해 묻는다. 겨우 얼굴에 비비크림과 립스틱만 바르고 온 나로선 내 얼굴에 가득한 기미와 주근깨는 보이지 않냐고 되묻고 싶었다.


그들의 눈엔 나의 모습은 20대 후반의 학생이다.


이런저런 질문에 답을 해주다 수업을 시작한 지, 어느새 한 달이 넘어선 오늘에야 내 나이를 처음 안 사람은 화들짝 놀라며 재차 내 나이를 되묻는다. 아들의 사진을 보여줘도, 이곳에선 이른 결혼 연령 탓인지 내 나이를 믿지 않는다. 그동안 나를 젊게 봐줘서 좋았는데, 오늘은 괜히 나를 한 번 더 보는 그녀에게 심사가 꼬인다.


다시 먹는 게 뭔지, 무얼 바르는지 묻는다. 연신 건강해 보인다고 말한다. 그래, 좋은 일이다. 고마운 일이다. 손가방에 있던 화장품 몇 개를 꺼내니 대학생이던 친구는 이것을 어디서 살 수 있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얼마에 샀다니 너무 갖고 싶은 표정이다. 갑자기 고가품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어느새 이스탄불살이 4년 차, 이스탄불 트럼프 타워에 있는 '미#'라는 한국산 로드샵 화장품 브랜드의 보랏빛 앰플이 한국백화점 1층에 있는 프랑스산 화장품과 비슷한 가격인 것을 안다.


마치, 우리가 2000년대 초반 낭만적인 유럽 여행을 생각하면 프랑스 파리를 꿈꾸듯, 그들은 지금의 한국 서울을 그렇게 그렸다.



마흔이 넘은 나는, 수업 중에 나가 한국에 있는 친구와 통화를 한다. 내 마음을 돌아와 앉혀야겠다.


내 속을 모르는 그는, 이 공간의 유일한 외국인인 내게 한국 사람들은 건강해 보인다고 말했다. 그리고 연금 수령과 새 사업을 위해 은퇴를 한 그의 삶을 이야기했다. 그의 나이 오십 초반, 한국이라면 한창 돈이 들 때인데, 그의 첫 번째 은퇴가 신기하지 않은 튀르키예 사람들이 내겐 오히려 이상해 보였다. 영국인들이 여행을 자주 오는 지역에 가서 호텔업을 시작할 계획으로 영어 공부를 하는 불칸아저씨.


나는 오십에 어떤 모습일까.


한참을 건강, 자식, 돈 걱정들을 시작하는 그들 앞에서, 너는 건강하고 어려 보인다는 그들에게 나도 마흔이 넘어 삶이 비슷하다고 말을 했다. 그는 내게 말했다.


"이스탄불에 와서 그 동네에 사는 너는, 마치 영화 주인공의 삶 같아."




젊은 시절 돈을 처음 벌고, 학교 일을 시작하고 여행을 시작한 나의 마지막 버킷리스트였던 스페인 남부, 이스탄불의 일상에 쫓겨 젊은 시절 버킷리스트였던 이곳에 대한 어떤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아들과 남편과 셋이 쪼르르 세비아 성당 뒤 돌길에 앉았다. 그리고 꽃 모양으로 멋을 낸 젤라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생각했다.


"그래, 제법 영화 같네."

"쥐뿔도 없는 게 그래도 여기까지 왔네. "


쓸데없이 괜히 비싸다며 안 사 먹으려 했던 아이스크림을 식구대로 손에 들고 앉아, 혼자 여행했던 유럽 도시들과 호주, 학교 생활, 아들과 단둘이 처음 탔던 이스탄불행 비행기까지. 지난 시간들이 모두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정말, 이스탄불을 떠날 때가 다가오나 보다.




https://youtu.be/RFxh1u0IrKc?si=nOJBoPYXQouekalo


'짧은 인생 쥐뿔도 없는 게 스쳐가네 파노라마처럼'


오랜만에 글을 씁니다. 읽어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타향살이가 쉽지 않네요. 게으른 연재에 또 이런 핑계를 적어봅니다. 스페인 여행 이야기도 써야 하는데, 느지막이 온 사춘기 어서 끝내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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