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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스러기 May 20. 2019

할머니 기일

할머니 기일이었다. 기일이라는 것이 양력과 음력 중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지 잘 알지도 못했지만 내가 감각하는 시간의 흐름으로 할머니는 2년 전 오늘 오후 5시 27분에 눈을 감으셨다. 그날은 비가 꽤 많이 왔고 발인날에는 장마가 그친 직후의 선선한 뙤약볕이 용미리 묘지 위로 내리쬐었던 기억이 난다.


고모를 신림역에서 만났고 그 전에 근처 꽃집에서 흰 꽃을 하나 샀다. 국화가 없어서 대신 고른 것이었는데 이름은 모르지만 수수하고 예뻤다. 오랜만에 만난 고모는 그대로인 것 같으면서도 조금 늙어보였다. 우리는 서로 간단하고 서먹하게 안부를 물으며 조금 정체되었던 길을 지나 벽제까지 갔다.


공원묘지는 조용했다. 그리고 무척 더웠다. 할머니를 모신 자리는 내 기억보다 한참을 더 올라가야 했다. 2년 전에 비해 나무가 더 많이 자라 있었고, 그 나무들 주위로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빼곡해진 것 같았다. 그 틈에서 할머니의 이름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등줄기를 따라 줄줄 흐르는 땀을 느끼며 15분 정도를 헤매다 겨우 할머니가 계신 곳에 다다랐다. 내가 기억하는 자리가 맞다면 그곳엔 유독 긴 잡초 하나가 쑥 자라 있었다. 준비해 간 꽃을 올려놓고 할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무슨 말을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더우시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무척 더웠기 때문에. 고모도 몇 마디 말을 건네더니 이내 내려가자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사진을 몇 장 찍고 할머니와 가까운 가지를 한 번 어루만진 뒤 고모를 따라 내려갔다.


따가운 여름 해가 내리쬐는 묘지에서 우리가 할머니와 머문 시간은 채 5분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공원의 묘지들은 40년 뒤에 자동으로 폐기되어 사라진다고 한다. 40년이라는 세월이 누군가에 대한 애도의 유통기한 같은 것이라도 되는 걸까. 나는 4년 뒤에라도 내가 할머니를 찾아올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다만 내가 소중한 이의 죽음 이후 그를 어딘가에 간직해야 한다면 이런 곳보다 차라리 내가 사는 집 안에 함께 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작은 단지와 생전의 사진. 그 사람이 보고싶을 때마다 멀리 가지 않고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고모는 한사코 내게 저녁을 사먹이겠다고 했고 우리는 적절한 식당을 찾다가 예전에 고모가 갔다던 샤브샤브집을 찾아갔다. 할머니가 마지막에 계시던 요양원 근처였다. 그러나 그 식당은 문을 닫았고 새로운 샤브샤브 뷔페가 대신 자리해 있었다. 가격에 비해 음식도 다양하고 퀄리티도 나쁘지 않은 곳이었는데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이 많지 않았다. 나는 고모가 맥주를 같이 마시자는 바람에 음주운전을 방조하고 말았다.


할머니가 떠나시고 고모는 다시 직장을 다니며 안정적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솔직히 말해 이제서야 차츰 돈이 모이고 살만해졌다는 이야기도 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떠나시기 전, 할머니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계셨다. 고모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상류층 사람들의 삶에 대해 가십처럼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 그런데 나를 지하철역까지 바래다주는 길에는 이런 말을 했다. 한때 호텔 뷔페 가는 건 우습게 여기던 자신이 '개그지'가 되어 이런 동네로 올 줄 누가 알았겠냐며, 인생을 살아보니 한번에 되는 것은 없다고, 모든 건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밟아나가는 일이니 조급해하거나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고, 내게 일러주었다. 그것이 자신의 삶을 자조하고 비하하면서 내리는 교훈적인 결론치고는 너무 아름답고 위로가 되는 말이어서, 나는 차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 2017년 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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