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정치의 발견>을 읽고
* 트레바리 [민주주잉]에 다녀온 후 생각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즉각 즉각 표결을 통해 국민의 의견, 즉 민의를 확인할 수 있는 기술을 지니고 있다. 이런 최첨단 시대에 정치란 왜 필요한지 문과인 친구 -정치학과- 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의 답은 인상적이었다. 무언가를 표결에 붙이려면 질문이 선행해야 한다. 정치는, 그 질문을 조정하는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특정 의제를 더 상세하게 혹은 단순하게 물을 수도 있고, 의제 간의 우선순위를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읽은 책 <정치의 발견>은 정치란 갈등을 사회화하는 방법론이라 설명했다. 개인이 겪는 저마다의 갈등을 최대한 많은 이들이 관여할 수 있도록 논의의 전선을 확대하는 과정이 정치라고 했다. 가장 좋은 예시는, 최근에 주목받은 미투(#metoo) 운동일 것이다. 젠더 권력의 구조 속에서 약자였던 여성들이 연대하여 젠더 폭력이라는 갈등을 공론의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 것이다.
개별 갈등을 서로 대조해보면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많이 보일지 모른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 폭력의 빈도, 언어/신체적 폭력의 수위, 폭력의 장소 등등. 이러한 갈등들을 제각각 법리 다툼으로 끌고 간다면, 대개는 보다 권력이 많은 이들이 쉽게 이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권력자들은 늘 갈등을 사적 영역에 가두려 한다. 사회화된 갈등은 이러한 디테일이 지닌 차이를 넘어선다. 갈등을 사회화하는 과정은 일종의 유형화 혹은 단순화에 가까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의사 결정 혹은 갈등 해결에 다수가 관여되는 과정. 각개전투에서 이기기 어렵던 '소수의 권력자들'을 상대로, '다수의 약자들'이 이길 수 있는 시스템. 정당 민주주의의 토대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각각의 갈등선이 파편화된 직접 민주주의에 비해, 정당 민주주의는 다수를 대변하기 위해 갈등선을 되도록 통합하려 한다. 그리고, 이렇게 갈등선을 효과적으로 예리하게 벼리는 작업은 정당이 담당한다.
민주주의를 기치로 삼는 많은 국가에서 정당은 사적 갈등을 공정 영역으로 옮기는 역할을 맡는다. 표의 획득을 통한 집권을 목적으로 삼는 정당들은,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갈등을 물색하고 유형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시민들을 삶에 다가간다. 많은 이들의 표심을 유도할 수 있는 갈등 축을 선보이는 정당은 승리하여 집권하게 되는 것이다.
대다수의 경우, 정당들은 이미 유형화된 유권자 집단을 대상으로 세력을 형성한다. 한국을 예로 들어보자. 지역 기반으로 본다면, 우파 정당은 경상도민을 자신들의 지지기반으로 다지면서 동시에 충청도민이나 수도권 시민들을 포섭하려 할 것이다. 직업을 기준 삼는다면, 좌파 정당은 노동자를 지지기반으로 삼으며 동시에 대학생이나 가정 주부를 설득할 수도 있다. 이렇게 중도층을 향한 서로간의 확장 싸움이야말로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정당 간의 경쟁 전략이다.
보다 어려우면서도 본질적인 전술도 있다. 아직까지 한 번도 유형화되지 못한 새로운 집단을 발굴하여 자신들의 편으로 삼는 것이다. 이러한 '암흑 유권자'를 찾아내는 것 역시 정당이 가진 긍정적인 의의일 것이다. 미국을 예로 들자면, 1930년대 미국 민주당은 비백인 이민자 계층(특히 흑인 및 히스패닉)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거듭나며 장기간 집권을 누릴 수 있었다. 비교적 최근인 2016년 미국 대선 때는 조명받지 못하던 러스트 벨트(Rust Belt) 지역의 광업 노동자들을 포섭한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지금의 한국은 어떠할까. 시사인 천관율 기자는 아래 기사를 통해, 한국 정치가 '좌우로 갈린 세계'에서 '울타리 안팎으로 갈린 세계'로 바뀔 수 있는지 질문한다. 각 정당들이 좌우 싸움에 매몰되어 새로운 갈등축을 발굴하고 대변하는 것을 게을리하지는 않는지 염려되는 대목이다. 상대방과 싸워 이기는 데 급급하여, 약자들의 파편화된 목소리를 일일이 들을 여유가 없다고 성내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하길 바란다. 그 유명한 "해일이 오는데 조개를 줍는다"는 표현이, 여전히 정당들의 속마음은 아닌지 우려된다.
한국의 암흑 유권자에 대한 토론 중, 고등학교 교사 한 분이 자신의 경험을 비추어 '고졸' 청년들을 언급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고졸로 학력을 마감하는 이들의 비율은 갈수록 늘고 있지만, 그들에 대한 유의미한 통계나 정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경제활동인구가 된 이들 대다수는 서비스업이나 제조업 단순 노동을 전전하지만, 그마저도 잦은 이직률로 인해 제대로 계측되거나 포착되기 어렵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를 사회화하기 위해 시도한 대통령이 보수정당 출신의 이명박 전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다소 아이러니컬하게 보인다. 그는 특성화 고등학교를 확대하고 고졸 취업을 활성화하는 등의 정책을 폈으니 말이다.
암흑 유권자를 찾는 정당의 노력이 서로 선순환하며, 사회적으로 발굴되어야 마땅했을 많은 갈등들이 선명하게 드러나길 희망한다.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던 질문들이 많은 이들에게 도달하길 기대한다. 여러 차원에서 고찰된 '다수의 약자'들이 저마다의 정의를 마주하길 희구한다.
그러면서도 머쓱찮은 질문이 불쑥 고개를 내미는 건 어쩔 수 없다.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아도 '소수인 약자'는 어떡해야 하는 것일까. 난민은? 성소수자는? 노조에 가입하지 못한 노동자는? HIV 보균자는? 아직 2단계도 제대로 못하는 우리에겐 너무도 사족 같은 질문이겠지만 말이다.
*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약자이면서 소수인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도운 이들은 '리버럴 liberal' 성향의 엘리트 진보 지식인층이었다는 것 역시 또 다른 아이러니 일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