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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엘 Mar 29. 2020

다시 <동백꽃 필 무렵>을 볼 때

'구더기는 장독을 깰 수 없다', n번방 뉴스 보도를 보며 든 생각

내게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은 작년 최고의 드라마였다. 어쩌면 인생 최고의 드라마로 말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에 반해 같은 해 개봉한 영화 <조커>는 많은 이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썩 들지 않는 작품이었다. 그 이유를 글로 정리해보려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글감만 쟁여두고 있었다.


2020년 3월, n번방 관련 기사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지금. 졸필이나마 글을 써보려 한다.



까불이, 찌질한 범죄자

<동백꽃 필 무렵>의 배경인 옹산에는 연쇄 살인범이 숨어 있다. 얼핏 보면 상투적인 범죄 스릴러 형식을 취하면서도, 이 작품이 위대한 이유는 가해자를 기존과는 다르게 호명하기 때문이리라. <동백꽃 필 무렵>은 살인범을 신비스럽고 멋지게 표현하지 않는다. 별칭부터가 찌질한 느낌이 물씬 나는 '까불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겠다. 


연쇄 살인범이라고는 하지만, 막상 까불이는 약자만 집요하게 노리는 인물로 등장한다.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이라 이유를 설명하지만, 그는 술집 여성, 가정 주부, 어린아이 등 자기보다 약자라고 판단할 때만 이를 드러낸다. (유일한 성인 남성 피해자인 배달원은 본인이 죽이지 않았노라 마지막에 고백한다.)


주인공 '용식'과 까불이의 대화를 통해 드라마는 가해자의 고루한 서사를 다룰 생각이 없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검거된 까불이는 자신 같은 범죄자는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될 수 있고, 계속 나올 것"이라 말하지만, 경찰인 용식은 "나쁜 놈은 백 중 하나만 나오는 쭉정이"라며 일언지하로 비웃을 뿐이다. 

왜 '아서 플렉'이 희대의 범죄자 '조커'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의 서사를 집요하게 묘사한 영화 <조커>와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조커>가 범죄자를 나름의 사연이 있는 불쌍한 인물로 그리는 데 반해, <동백꽃 필 무렵>은 까불이를 사람 많은 곳에서는 제대로 대꾸도 못하는 찌질이로 묘사한다. 가해자에게 서사를 허용할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향미, 지키지 못한 피해자 

가해자는 쉽게 과잉 서사되는 반면, 피해자의 서사는 철저히 외면받기 일쑤다. 특히나 그 피해자가 '당할 만하다'라고 여겨질 때 더욱 그러하다. <동백꽃 필 무렵> 초반 에피소드에서 언론과 경찰은 연쇄 살인의 마지막 피해자를 '직업여성'이라 지칭한다. 피해자가 될 뻔한 동백 역시, '술집 여자'라고 쉽게 낙인찍는다. 이는 옹산의 이웃들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들은 시간이 흘러 동백이 운영하는 식당 <까멜리아>가 유흥업소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후에야 오해를 풀고 동백을 이웃으로 받아들인다. 

그에 반해 '향미'는 실제 직업여성 출신으로 묘사된다. "동백이 걔는 완전 민간인이야."라는 말을 통해 은연중에 향미의 과거가 내비쳐진다. 하층민 여성인 향미는, 작중 표현처럼 "세상에서 없어져도 아무도 모를" 사람 취급받는다. "어딜 가도 열외 취급이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사람들 시야에 잘 포착되지 않는다. 옹산 이웃들 역시 향미를 백안시할 뿐이다. 


작가는 에피소드 12화, 한 편을 통째로 향미에게 쏟아 그간 다루지 못했던 피해자 향미의 이야기를 담는다. 그리고, 그 다음 화에서 동백 대신 향미가 죽은 후에야 옹산 사람들은 서로 의기투합하며 까불이를 잡기로 결심한다. 향미가 아무리 떠돌이더라도, 직업여성이더라도, 타인에게 원한을 살 일이 많았더라도 사람이 죽어서는 안된다는 그 당연한 명제에 다가가기까지 드라마는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반대로 생각하면, 아직 이 당연한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 보편화되는 데는 갈 길이 멀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의 뉴스와 댓글들

n번방 성착취물 제작 및 유포의 주범으로 지목된 속칭 '박사'가 검거되던 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업로드된 '용의자 신상공개 청원'은 역대 최다 청원 동의수를 달성했다. 많은 이들의 공분에 힘입어 '박사'의 신원이 공개되고 포토라인에도 세워졌지만, 우리는 그에게 마이크를 건네는 실수를 하고야 말았다.

다시 한 번 말해야겠다.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자. 나아가 그에게 마이크를 건네어 스스로 자기 서사를 늘어놓도록 방조하지도 말자. 아니나 다를까 '악마의 삶'을 운운하는 범죄자의 발언에서 조커가 되고픈 그의 덜 여문 망상만이 물씬 느껴진다. 언론이, 미디어가, 우리의 관성이 까불이의 허황된 망상에 부채질을 하고 있던 건 아닌지 반성할 때다. 

몇몇 이들은 '일탈계 계정' 등을 소재 삼아 n번방 피해자들도 잘못이 있다는 식으로 2차 가해를 늘어놓는다. 피해자에게 일정의 책임을 물려는 이 못된 심뽀, 제 멋대로 무고한 이와 그렇지 않은 이를 선별하겠다는 가당찮은 헛소리는 끊이질 않는다. 이 쯤에서 다시 한 번 <동백꽃 필 무렵>을 감상하는건 어떨까 싶다. 


향미의 죽음 이후 옹산 주민들이 합심하여 동백이를 보호하던 장면. 그리고 향미가 즐겨 마시던 맥주잔으로 까불이를 응징하는 장면. 까불이의 호언장담에 코웃음으로 냉소하던 장면.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이 범죄자를 퇴장시키는 방법이었다. 큰 인기를 끌었던 이 드라마의 교훈을, 우리 사회는 다시금 경청해야 하지 않을까.


"구더기는 장독을 깰 수 없다.
진짜로 무서운 건 까불이 같은 게 아니라,
사람을 지킬 수 없는 거였다."
- 동백꽃 필 무렵, 에피소드 20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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