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05, 김종목, 책과 삶, 경향신문)
"선악과 제거에 관한 '생각'의 주된 성질은 '고집'이다. 머릿속에 입력된 '생각'에 관해 회의하지도, 생각의 출처도 따지지 않기 때문에 고집은 강화된다. 홍세화가 문제 삼는 건 동사로서 '생각하는 과정'은 없고, 명사이며 결과인 '생각'만 갖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성장이 없으면 모두가 불행해지고, 패자의 탈락은 개인 책임이며, 때로는 전쟁이 인류 평화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인식도 고집의 성질을 가진 생각과 '확증 편향' 같은 경향이 결합된 결과다. 생각하고, 회의하지 않으면 '자발적 복종'의 길로 들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괴물이 될 위험에까지 노출된다."
어쩌면 그저 책 한 권을 소개하는 글. 그러한 글을 이번 주의 첫 글로 뽑아본다. 소개하는 책의 제목처럼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를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생각하게 된다.
(`18.01.07, 안희곤, 산책자, 경향신문)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정규직들이 먼저 반대하고, 공기업 블라인드 채용에 명문대 졸업생들이 분개를 한단다. 우리가 익히 듣고 있는 '무임승차론'이다.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이 대학에, 이 직장에 들어왔는데 능력도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이 같은 대우를 바라는가. (중략) 왜냐면 이들의 항변이란 게 남보다 더 가지겠다는 주장이라기보다는 그나마 가진 것을 지키겠다는 방어의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무너진 교실에 아이를 도저히 보낼 수 없는 친구처럼 말이다. 결국 상황은 또다시 능력의 문제, 능력을 약간 더 가진 을과 능력이 모자란 을이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문제가 되고 말았다."
두 번의 '글모음'에서 계속해서 갈무리하고 있는 '무임승차론' 혹은 '능력 만능주의'에 대한 글이다. 우리를 괴물로 만든 건 어디에 있을까. 자기 자신을 경제적 단위로 치환하는 것에 익숙해진 우리는 끝내 어디로 향하게 될까. 사실은 그러기 정말 싫어서, 아등바등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18.01.07, 신현호, 차트 읽어주는 남자, 한겨레신문)
"이제는 40·50대 남성의 교육·경제 수준과 그 자녀의 교육·경제 수준을 비교하면, 둘 사이의 관련성이 다시 높아지고 있습니다. 교육의 역할이 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모의 높은 교육수준은 부모 세대의 높은 소득과 자식에 대한 아낌없는 교육비 지출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자식 세대의 교육수준과 소득 확대로 귀결되는 경향이 강해지는 것이죠. 이제 교육은 거꾸로 '중요한 불평등기제'(great unequalizer)가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래프로 설명된 사회현상은, 수려한 문장으로 설명된 주장 글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2번 글과 같이 읽으면 그 맛이 배가 될 것 같아 이 위치에 놓아본다.
(`18.01.08, 홍은전, 세상 읽기, 한겨레신문)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꿈도 꾸지 못할 자유를 아무 노력 없이 누리면서도 일상의 작은 불편조차 장애인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그들을 격리하고 가두는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다. 인구의 10%가 장애인이지만 그들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비장애인들은 일상적으로 자신들의 가해 사실을 인식할 수조차 없다. 한때 남성들이 자신이 여성 혐오의 잠재적 가해자임을 선언하는 장면에 나를 대입하면 식은땀이 난다. (중략) 세상의 변화는 '장애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 '장애인에게 닥쳐온 어떤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시작되며, 그것은 이 폭력적인 사회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살아가는 90%의 사람들이 비로소 '비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성찰할 때일 것이다."
자신이 가진 어마어마한 권력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싶다. 늘 금세 까먹고 말지만, 그 깜박거림마저 권력이라고 생각하면 서글퍼질정도로 자기혐오에 빠지게 된다.
(`17.11.13, 진민정, 슬로우뉴스)
"페이스북의 문제는 한 켠에서는 아기들 사진, 학교 친구들 사진을 아주 멋진 방법으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많은 산업을 학살하는 거대한 독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측면, 그리고 많은 측면에서 위험하다. 저널리즘에 대한 영향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과 더불어 너무나 엄청나다. 그러므로 아주 중요한 문제라 생각한다. 페이스북은 여러 측면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클릭수'를 평가지표의 가장 우선순위로 두는 미디어는 결국 '가짜 뉴스'의 유혹에서 헤어 나오기 어렵다. 결국 과거(과거에도 그랬을지는 사실 확실치 않지만)처럼 편하게 뉴스를 소비할 날은 결코 오지 않을지 모르겠다. 세세한 팩트체킹과 글을 골라내는 안목을 기르는 것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18.01.12, 정승임/정반석, 성난 사회, 화 좀 내지 맙시다, 한국일보)
"우리 사회의 뒤틀린 분노는 유독 약자를 쫓는다. '내가 불편하다' '내 것 빼앗긴다'는 이기심을 먹고 자란 분노는 약한 곳을 헤집고 들어가 혐오라는 악성 종양으로 변질된다. 약한 자일수록 강하게 밀어붙이고, 처음부터 배제해야 나의 권리와 평안을 지킬 수 있다는 못된 습성이 장애인 성수소자 여성 아이 등에게로 확대 재생산되는 실정이다. 일례로 노(NO)키즈존은 있지만, 노(NO)만취객존은 없다. 카페에서 소란스럽게 뛰노는 아이, 식당 의자에서 아기 기저귀를 가는 엄마. 이 못지않게 커피전문점에서 '주문한 커피와 다르다'고 행패 부리거나 테이블에 토사물을 쏟아내는 취객도 있다. 하지만 대놓고 엄마와 아이를 거부하는 노키즈존은 확산되는데, 취객 출입을 금지하는 노만취객존은 볼 수 없다. '아이 소란 금지' '기저귀 갈기 금지' 정도면 충분할 텐데, 아예 출입을 원천 봉쇄한다. 모든 엄마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셈이다. 왜? 약하니까."
`16년 겨울, '왕궁의 음탕'에 분노하기 위해 우리는 많은 용기를 내야만 했다. 혼자서는 분노하기 벅찼기에, 결국 많은 사람들과 힘을 모아서야 겨우 제대로 분노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못내 뿌듯해한 것도 사실이다. 위로 향하던 그 힘들던 '분노의 기억'과는 상반되게, 아래를 향한 분노는 너무도 쉽고, 일상적이다.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에게, '20원을 받으러 찾아오는 야경꾼'에게 우리가 내뱉는 분노는 늘 이리도 쉽다.
(`17.12.21, veritaholic, NewsPeppermint)
이번 주에는 비트코인/블록체인에 관련된 글들도 참 많이 시중(?)에 나왔다.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글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가장 흥미로운 글은 에너지 총량과 열역학을 통해 생각의 가지를 마구잡이로 뻗어가는 이 글이었다. 총 2부로 구성되어 있고 다소 정돈되지 않은 글이지만 여러 방향으로 잡생각을 뻗어나가기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