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 애국가 작곡가의 상반된 삶
일본의 경제침략으로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하는 등 반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불매운동을 위해 주변을 살펴보면 생각보다 일본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중 상당히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
한 작곡가를 소개한다. 그는 만주 광야를 누비던 독립운동가를 짓밟고 일본이 세운 만주국을 찬양하는 <만주교향곡>을 직접 작곡한 사람이다. 그 이름은 에키타이 안.
에키타이 안은 철저한 일본인의 입장에서 1941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일본의 기미가요를 <에텐라쿠>로 작곡하고 지휘하며 독일 나치와 일본을 찬양했다. 그는 이름이 하나 더 있었다. 그 이름이 바로 안익태다.
안익태는 나치의 지원을 받는 독일-일본 협회 제국 음악원의 회원이었다. 안익태는 미국 유학까지 마친 엘리트였고, 야심가였다. 그는 한 때 독립을 바라며 <한국환상곡>을 작곡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출세를 위해 나치와 일본에 철저히 부역했다.
그는 만주국 외교관 에하라 고이치의 집에서 1941~44년까지 살면서 히틀러 생일 기념 공연을 비롯해 30여 차례 공연을 지휘했다.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를 베를린 주재 만주국 외교관으로 위장한 일본의 유럽 첩보망 총책이었던 에하라 고이치의 '특수공작원'이라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안익태 케이스-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 이해영, 삼인>
그는 1945년 광복 후에도 여전히 에키타이 안으로 살다가 10년이 지난 1955년 이승만의 80세 생일 축하연 때 비로소 한국으로 들어온다. 그때 연주한 곡이 지금 대한민국 애국가가 되었다. 이곡은 만주환상곡 몇 마디를 자기 표절해 같다 붙여 만든 한국환상곡의 재탕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북한의 국가 이름 역시 <애국가>다. 애국가는 작곡가 김원균이 1947년 작곡했다. 그런데 김원균의 이력이 특이하다. 그는 안익태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1917년 원산에서 태어난 김원균은 지독히 가난했다. 학비가 없어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를 중퇴하고 일제의 멸시와 학대 속에 노동으로 죽지 못해 살아갔다. 정식 전문 음악교육도 받지 않은 가난한 광부 출신으로 해방 이후 작곡을 시작했다.
그의 어려운 생활을 북한 음악평론가 김득청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김원균 선생은 나라 없던 지난날 간판이나 광부들을 그려주고 지붕에 페인트칠을 하면서 한푼두푼 모은 돈으로 기타를 하나 사서 노래도 지어내 놓았지만 품팔이꾼에 불과한 자기의 창작적 재능에 대해서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던 그가 광복 이후 <조선청년행진곡> <김일성 장군의 노래> <애국가> 등을 작곡하며 북한의 최고 작곡가로 떠오른다.
조선중앙통신 2012년 1월 4일 기사에 따르면 <조선청년행진곡>은 당시 "새 조선의 청춘이라는 고귀한 이름을 받아 안은 청년들을 장엄한 새날의 투사로 격조 높이 노래한 가요는 해방을 맞이한 각 계층 근로자들 속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라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1946년 8월 16일 조국해방기념 중앙보고대회가 끝나고 중요한 기념식에 애국가가 없다고 안타까워하며 다음과 같이 대중적인 애국가 창작사업을 제안했다.
"나라의 주인 된 기쁨을 안고 새 조국 건설에 발 벗고 나선 우리 인민은 자주독립국가의 진정한 애국가를 요구하고 있으며 빛나는 조국에 대한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합니다"
"아름다운 조국과 슬기로운 투쟁 전통을 가진 조선 인민의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노래에 담아야 합니다. 인민들이 이런 노래를 부르면 자기 조국에 대한 애국심이 더욱 솟아날 것입니다"
모든 작가와 예술인들 뿐 아니라 작곡가가 아니더라도 창작하고 싶은 사람은 모두 참가한 애국가 공모전이 개최되었다. 드디어 1947년 6월 27일, 애국가 선발을 위한 시청회가 열렸다. 시청회 날 김일성 주석도 참석하였다. 여러 작품 가운데 50번과 100번 번호의 최종 두 편의 곡이 선택되었고 공정한 심사를 위해 작곡가 이름은 비공개로 했다.
김일성 주석은 첫 번째 곡을 듣고 "노래를 들어보니 마음이 고상해지고 삼천리강산이 보이는 것 같아 노래에 사람들의 마음을 틀어잡는 데가 있다"며 애국가로 추천했다. <주체의 나라 조선의 애국가, 재미동포전국연합회 민족문화분과위원장 리준무, 2013.09.13>
작곡가 김원균은 당시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땅은 있어도 참다운 조국의 의미는 다 몰랐던 우리 인민,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자랑해도 나라를 대표할 노래에 대하여 생각도 못하던 우리 인민에게 과연 어떤 노래를.. 우리 공화국을 대표할 노래는 과연 어떤 선률이여야 하는가..."
그는 해방된 나라에서 희망에 차 넘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몇 달에 걸친 탐구와 사색 속에 해방의 환희와 격동, 민족적 정서와 숨결을 찾아 오선지를 수놓았다. <불멸의 송가와 작곡가 김원균, 조선의 오늘 2018.11.28>
김원균은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노래로 꼽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 작곡가로도 유명하다.
생전에 김원균은 늘 동료들에게 본인이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애국가>를 지은 것은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자 영광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고 한다.
해방 후 보천보 전투로 대표되는 반일 독립 무장투쟁하던 김일성 주석에 대한 환영의 분위기는 엄청났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에 30만 군중이 몰렸을 정도였다.
당시 김원균은 이제 30대가 된 무명의 작곡가였다. 그는 1946년 5월 시인 리찬이 쓴 <김일성 장군의 노래> 가사를 보고 작곡을 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꼈다.
그는 김일성 장군이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개선 연설을 하는 모습을 보고 느낀 감동을 선율로 써 내려갔다. 이 노래는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김원균은 작곡가로서 확고한 위상을 가지게 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작곡가 김원균 선생은 <애국가>를 내놓고도 <김일성 장군의 노래> 하나만으로도 한생에 할 일을 다한 것으로 된다”라고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불멸의 송가와 작곡가 김원균, 조선의 오늘 2018.11.26>
김원균은 국비장학생으로 1952년부터 1959년까지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에 유학했다. 이후 1961년부터 평양음악무용대학 학장, 1977년 피바다가극단 총장, 1989년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북한에서 작곡가 김원균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는 평양음악대학의 명칭을 보면 알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새로 지은 평양음악대학 개축 준공식을 맞아 "그는 우리 민족의 자랑이다. 새 음악대학은 그의 이름으로 명명해야 한다"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평양음악대학에는 손에 악보를 들고 팔짱을 낀 김원균의 반신상이 세워져 있다.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는 정령에서 "김원균 동지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애국가를 창작하여 해방 직후 우리나라 음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데 기여를 했고 그 후에도 명곡들을 창작하고 음악예술인 후비를 키워내는데서 공로를 세웠다"며 "나라의 음악예술 발전에 공헌한 김원균 동지의 이름을 달아 음악대학 명칭을 김원균평양음악대학으로 할 것을 결정한다"고 밝혔다. <中언론, 北작곡가 김원균 집중 조명, 연합뉴스, 조계창, 2007.06.06>
북한은 1997년 작곡가 김원균 생일 80돌 기념음악회에 이어 2017년 100돌 기념음악회를 열어 북측 음악계의 상징인 김원균을 감회 깊게 추억했다.
북한 애국가를 작곡한 김원균은 북한 음악의 산실인 평양음악대학의 상징이 되었다. 반면 우리는 대한민국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아니 에키타이 안을 대한민국 음악의 상징으로 인정하기가 어렵다. 대한민국 애국가 작사가 역시 친일파 윤치호로 추정된다. 우리는 작사, 작곡가 모두 친일로 얼룩진 애국가를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불러온 셈이다.
북한은 사회주의 헌법 제171조에 <애국가>를 국가로 명시하고 있다. 다행히 아직 대한민국 애국가는 법률로 정해진 바 없다. 관습적으로 애국가로 통용되어왔을 뿐이다. 이제 애국가도 불매운동을 해야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