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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Aug 23. 2019

국가전복 세력으로 몰린 광고 디자이너, 임군홍

화려한 인상파 여행 화가는 왜 북으로 갔을까?

운수부 월력 사건


1948년 어느 날 서울 명륜동의 광고 미술사 우보당(牛步堂)에 철도 경찰이 들이닥쳤다. 우보당은 미군정 공보원이 발간하는 잡지 <아카데미>의 홍보 대행사로 전국 각 기차역마다 홍보 간판을 설치하던 전도유망한 회사였다. 소위 잘 나가던 회사에 갑자기 왠 날벼락인가.


우보당은 화가 임군홍(林群鴻. 1912.3.27 - 1979.7.30)이 해방 후 차린 광고 미술사였다. 임군홍은 해방 전부터 중국에서 한구미술광고사를 운영하며 직접 관광 홍보물을 도안하기도 한 실력이 있는 작가였다. 그는 사업수완이 좋았고 철도국 운수부에서도 일을 의뢰받았다.

임군홍, <모델>, 1946, 캔버스에 유채, 가족 기증

사건은 1947년 운수부에서 의뢰한 달력에서 시작되었다. 이른바 운수부 월력사건. 달력에 남조선을 전복하고 공산주의 국가건설을 선동하는 내용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당시 수십 명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고 임군홍과 동료 화가 엄도만 등 6명이 철도경찰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경찰의 체포 이유는 정말 황당했다. 달력 모델이 북조선노동당 간부인 최승희(1946년에 월북한 당대 최고의 무용가)이며 최승희가 쓴 갓은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적색이다. 갓 끈에 소련 16연방을 의미하는 16개의 구슬과 갓 측면에는 조선을 의미하는 1개를 더하여 소련 17연방을 의미하는 17개의 구슬을 그렸다. 부채에는 삼팔선을 상징하는 선과 하단에는 소련 국기의 망치와 낫과 비슷한 모양이 있다는 혐의였다. <월간미술 2018.8 황정수. 한국 근대미술의 다층적 경계인, 서양화가 임군홍>


어처구니없는 짜 맞추기 수사였다. 임군홍은 단지 유명한 무용가 최승희를 달력에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국가전복 혐의에 걸려 약 4개월 감옥살이를 하고 낙인이 찍혔다. 하기야 대략 70년이 지난 후에 ‘대동강맥주가 맛있다’고 했다는 이유로 신은미 씨가 종북몰이 마녀사냥으로 입국 금지를 당하는 대한민국이니 당시는 오죽했겠는가.


보통학교 출신 치과 기공사


임군홍은 서울 중구 인현동의 가난한 품팔이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통학교(초등학교)만 나와 신문배달, 개인병원을 전전했다. 어린 소년은 상급학교를 다닐 수 없었지만 꿈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낮에는 고된 일을 하고 밤에는 경화양화연구소를 들락거리며 미술 기초를 배웠다.


임군홍은 19살 되던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 <봄의 스케치>로 입선한다. 그는 연구소 기간 밤을 하얗게 새우며 작업활동에 매진했다. 1936년에는 작품 <여인 좌상>이 두 번째로 15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에 올랐다.


임군홍은 송정훈(宋政勳), 엄도만(嚴道晩) 등과 ‘녹과전(綠果展)’을 만들어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는다. 그는 1938년까지 3회의 동인 작품전을 가졌고 1938년 서울 오아시스 다방에서 소품 21점으로 개인전을 가졌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임군홍은 1937년부터 <모델> <소녀상>, <풍경>, <정물>, <노점> 등으로 6년 연속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며 서양화가로 자리를 잡는다. 그는 1938년 동료 화가 엄도만과 함께 예림 도안사를 차려 작품 활동을 했다.


그는 어렵게 살았던 만큼 시선이 낮은 곳으로 향해 있었다. 작품 <행려>는 어두운 배경에 초점 없는 눈, 축 처진 어깨의 중년 노숙자 남성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흔치 않은 소재로 서민들에 애환을 진하게 담고 있다.

임군홍, <행려>, 1940년대, 종이에 유채, 60x44.5cm, 유족소장


인상파 여행 화가


1938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임군홍의 작품은 조선의 풍경과 여성 등 모두 일제 식민지 지배 질서의 틀 안의 작품들이다. 거의 독학으로 미술을 배워 이름을 알려야 했던 임군홍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동시에 먹고살아야 하는 생업 화가로 팔릴만 한 그림들을 꾸준히 그려야 했다.


일본의 간섭과 억압에 싫었던지 그는 1939년 27살에 중국 여행길에 올랐다. 중국을 여행하는 동안 중국에 매료된 임군홍은 중국 한구(중국 우한시 한커우)에 정착한다. 그는 거기서 1946년까지 한구미술광고사를 운영하며 한구와 베이징의 풍경을 주로 그렸다.


1939년에는 일본인 은행장의 후원으로 김혜일(金惠一)과 2인 서양화전으로 개최하고, 1941년에는 일본 무한(武漢) 미술전에 출품하였다.


그의 작품은 인상파 화풍으로 물감을 풍부하게 쓰며 강렬한 색감을 통해 절제된 인물을 구성하고 화사하고 무게감 있는 풍경을 묘사한다. 당시 그린 대표작 <고궁의 추광>은 베이징의 자금성을 비추는 가을의 햇살을 눈이 부시게 표현한 선 굵은 작품이다.

임군홍, <고궁의 추광>,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60x72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해방과 월북


해방이 되자 임군홍은 귀국길에 오른다. 그는 귀국한 그해 1946년, 서양화 6인전을 개최하고 남조선 미술 동맹에 가입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간다.


1948년 운수부 월력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이후 자연스럽게 사회 비판의식은 높아졌다. 그는 본격적으로 좌익계열 인사 들과 자주 교류하게 된다. 북측자료에 따르면 그는 이승만 정권에 반대에 하는 선전화를 그려 투옥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조선력대미술가편람>


임군홍은 1950년 한국전쟁 중 인민군 후퇴 당시 명륜동 자택에 찾아온 사람들과 함께 월북을 한다. 이승만 정부 하의 정치적 탄압을 피해 정상적인 작품 활동을 위한 결단이었다.


한국전쟁 당시는 주로 문화 선정성에서 직관 선전원으로 있으면서 전선 원호 작품을 그려나갔다. 이후 북한 국립 미술 제작소에서 화가 이쾌대와 함께 김일성 주석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임군홍은 북에서 인정을 받았다.


임군홍은 1961년까지 조선미술가동맹 개성시 지부장을 역임했다. 이후 북한에서 대표작으로 <임군홍,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무기를 나르시는 열렬한 공산주의 투사이신 강반석녀사, 1968년, 130x 112cm), <임군홍, 은영선, 장하남, 박경란 합작, 무장투쟁을 호소하시는 조선민족해방투쟁의 탁월한 지도자 김형직 선생님, 1968년, 292x142 cm)과 같은 주제의식이 뚜렷한 대표작을 남겼다.


그는 1970년대 후반기부터는 함경북도 미술 신인 기량 향상을 위한 교육사업을 하였다. 북한은 이런 그의 공로를 높이 인정하여 ‘공훈예술가’ 칭호를 수여했다.


2015년 10월 17일 북한 <통일신보>는 화가 임군홍에 대해 "일반 주제의 작품들에서도 실제 한 현실과 생활을 바탕으로 성격을 전형화, 일반화하는 사실주의 창장 방법을 잘 구현하였다"라며 "사회주의 사실주의 창장 방법에 의거하여 시대와 인민들이 요구하는 좋은 작품들을 많이 창작했다"라고 평가했다. <통일뉴스. 조정훈. 2015.10.19>


가족과 이별


이승만 정부의 정치적 탄압으로 가족과 헤어진 임군홍은 안타까운 이별을 예측이나 한 것처럼 마지막 작품으로 <가족>을 그렸다. 어린 아들을 안고 있는 부인의 모습과 하얀 백자와 도자기들. 빨간 고무신이 아른거리는 가족을 눈 앞에서 그리고 있는 듯하다.

임군홍, <가족>, 1950, 캔버스에 유채, 94x126cm, 유족 소장


이 그림을 남긴 직후 그는 북으로 갔다고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측은 색상이나 선처리 면에서 미완성의 작품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잘 나가던 작가들은 왜 붓을 꺾었을까 - 올댓아트 - 경향신문>


그는 비록 1950년에 월북했지만 남쪽에 상당히 많은 작품이 남아있다. 그의 가족들이 작품을 잘 보관해왔기 때문이다. 월북화가의 가족. 빨갱이 자식이라는 온갖 수난 속에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기적처럼 작품을 지켜왔다. 1988년 월북 예술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가 내려지기 전인 38년 동안이나 말이다.


그의 아내 홍우순(1915-1982)은 남편의 작품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1982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간호사 출신 신여성 홍우순은 남편의 작품을 통해 지금 우리 앞에 그 모습을 세상에 선보였다. 임군홍이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 <모델>의 주인공이 바로 아내 홍우순이다.


자신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그려주었던 남편에 대한 정성이 결실을 맺은 셈이다.

 

임군홍, <모델>, 1937, 캔버스에 유채, 90x71cm, 개인소장, 선전출품작


임군홍의 차남 임덕진 씨는 아버지의 작품 세계에 대해 소개하며 진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저는 작품이 태어나는 순간, 그 순간의 아버님의 마음을 들을 수 있지요. 누구와 견주어도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시는 그 당당함이 아버님의 작품 속에서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지금도 아버님의 유품 속에 들어가 아버님을 찾으면 많은 이야기들이 들려옵니다.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기도 하지요.” <김달진미술연구소 인터뷰>




임군홍의 작품은 근대미술의 발전을 연구하는데서 중요한 위치를 지닌다. 하지만 그는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아직도 대중들 속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며 연구도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측에 있을 더 많은 임군홍의 작품 역시 현재는 감상할 방법이 딱히 없다.


그를 탄압하던 종북몰이 마녀사냥과 국가보안법이 없어지는 그날. 그의 작품이 온전히 우리 앞에 그 진가를 드러내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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