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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Apr 06. 2020

분단 블랙리스트, 서예 추상의 거장 이응노 화백

문자추상 서예 추상의 대가, 고암 이응노

인간 추상, collage on canvas, 91.5 x 73 cm, 1963,

간첩 화가


분단 블랙리스트. 고암 이응노(1904~1989)는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붉은 낙인이 찍힌 후 한국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했다. 작품 전시나 거래는 모두 중지되었고, 그의 이름을 지목하거나 거론조차 할 수 없었다.


이응노는 20여 년이 흐른 뒤인 1989년이 되어서야 정치적으로 해금되었다. 그해 호암미술관에서 이응노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그러나 전시 첫날, 그는 안타깝게도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눈을 감고 말았다.


이응노는 1967년 한국 전쟁 당시 생이별한 아들을 찾기 위해 동독 동베를린에 갔다가 박정희 정권에 의해 고국으로 납치되어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었다. 기막히게도 동백림 사건은 박정희의 3선 개헌을 위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여론을 돌리기 위한 간첩 조작 사건으로 밝혀졌다.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2006.01.26.) 


그는 엄혹한 고문과 감시를 견디며 감옥에서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옥중화를 두고>라는 글에서 당시를 회상했다.


“2년 반의 옥중생활을 돌이켜볼 때 제일 고통스러웠던 것은 화가인 자신이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 독방에 들어갔을 때는 간수도 접근하지 않았고 세상과 완전히 격리되어 고독에 미칠듯하였다.”


“간장을 잉크로 해서 변소 종이에 소묘를 하기도 하고 밥풀을 매일 조금씩 모아서 신문 종이와 이겨 조각을 만들기도 하였다. 나에게 있어서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형무소 마당에서 못을 주어 알루미늄 세면기나 식기에 힘껏 구멍을 뚫거나 마음속에서 넘쳐나는 뇌의 격분을 조각에 옮기기도 하였다.”


“그림은 벽에 거는 장식에 불과해서는 안 된다. 그림에 생명이 깃든다고 생각한다. 나의 그림이 변화하는 과정에 옥중체험은 또 하나의 나 자신에 대한 자각이었다. 말년이 되어 늦은 자각이나 그 자각이야말로 나를 되 젊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조선력대미술가편람,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9, 리재현>


입체 조각 ‘군상’은 옥중에서 제작된 작품이다. 이응노는 교도소에서 나오는 밥알과 종이로 이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이후 본격적으로 제작된 군상 연작의 시초가 된다.


군상(입체소품), 종이, 밥풀, 32x16x12.5cm, 1967, 대전이응로미술관 소장


이응노 화백과 윤이상 작곡가 같은 세계적 예술가를 납치해 간 대가는 컸다. 프랑스, 독일 등 정부와 예술단체들은 한국을 인권 후진국으로 규탄하며 석방 운동을 펼쳐나갔다. 궁지에 몰린 박정희 정부는 이응노를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이응노가 억울한 옥살이를 한 지 2년 반이 지나서였다.


문자추상 서예추상


이응노는 일제 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는 등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해방 이후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개원하고 일본 잔재의 청산과 민족적인 한국화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1948년 홍익대학교에 부임하여 한국 전쟁 전까지 재직했다. 그러나 그는 1954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폐단을 지적하고 국전 추천작가로 초대받기를 거부한 후 해외로 작품 활동의 무대를 옮긴다.


이응노는 1958년 프랑스로 갔다. 거기서 그는 한국화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해 ‘문자추상’, ‘서예추상’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이응노의 ‘문자 추상’은 유럽에서 동양 예술과 서양 예술의 절묘한 조화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는 1960년 이후 카네기 국제미술제에 초대 작품을 출품하고, 스위스, 프랑스, 독일, 덴마크 등 유수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주변의 후원으로 1964년 파리 세르누쉬 미술관 안에 파리 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1965년에는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명예 대상을 수상했다. 

고암 이응노의 파리 아틀리에

이응노는 파리 동양미술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며 한국의 맥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는 서양 중심으로 편성된 세계 예술 질서에서 자주적 목소리를 내며 우리 것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갔다.


그는 도자기 제작에서도 전통을 어떻게 새롭게 창조할 것인가 몰두했다. 


“우리가 어떻게 과거의 자랑만으로 그친단 말이오. 선대의 유산만을 팔아먹고 사는 탕아(蕩兒)로 그친단 말이오. 우리 스스로 유산을 창작해야지. 고려자기 이조 자기의 걸작이 어찌 그 겉모양의 모조만으로 써 재생된다는 말이오. 눈에 안 보이는 그 장인들의 정신을 배워야지. 나의 전 작품은 묵화나 콜라주나, 지금 하고 있는 판화나 조각이나 이조 백자를 그의 정신에서 배워 파리에, 세계에, 현대에 들춰 보여주려는 노력이오”<탈(脫) 신화, 탈(脫) 정치화로 본 이응로와 윤이상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 신동아 2008.10.30.>


이응노의 열정적이며 성실했다. 그는 10년 넘게 간판장이로 일하다가 서른이 다 돼서 일본으로 유학해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늘 그런 간판장이였던 과거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미술을 고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하실 창고에서 노동으로 창조해낸다고 생각했다.


군상(群像)


이응노의 대표작인 ‘군상’ 시리즈는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탄생했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 전해진 광주항쟁의 수없이 많은 비극을 서예 추상화로 승화시켰다.


“나의 그림은 추상적인 표현이었으나, 1980년 5월의 광주사태가 있고 나서부터 좀 더 사람들에게 호소되는 구상적인 요소를 그림 속에 가져왔다. 2백 호의 화면에 수천 명의 군중의 움직임을 그려 넣었다. 우리나라 사람은 이 그림을 보고 이내 광주를 연상하거나, 서울의 학생 데모라고 했다. 유럽 사람들은 반핵운동으로 보았지만, 양쪽 모두 나의 심정을 잘 파악해 준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암 이응노, 삶과 예술', 44쪽, 고암미술연구소 엮음, 얼과알 출판사, 2000년 11월>


이응노는 ‘문자 추상’에서 표현한 장식적인 양식을 사람의 모습으로 차츰 변형시켜 나갔다. 그 작은 군상 자체가 디자인이 되고 장식으로 표현되었다. 나중에는 군상이 점점 작아지고 반복적으로 나타나면서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우고 거대한 민중의 함성을 표현하는 듯했다. 


"모두 서로 손잡고 같은 공생공존을 말하는 민중 그림 아닙니까? 그런 민중의 삶이 곧 평화지 뭐. 이 사람들이 바로 민중의 소리이고 마음이야." <내 그림의 제목은 모두 '평화'라고 하고 싶어요. 2018.04.18. 왕진오. 아트인포>


특히 ‘군상’ 연작 중 ‘춤추는 인간’은 자유와 평화에 대한 열망을 표출한 작품으로 독재 폭압 정권에 저항하는 광주 시민의 모습을 격렬하게 표현했다.


군상, 한지에 먹, 167x266cm, 1986, 대전 이응노미술관 소장


5월에서 통일로


이응노는 비록 몸은 프랑스에 있었지만 남북의 통일을 간절히 열망했다.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것이 통일이며, 자유와 평화의 장애물이 분단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한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군중 시리즈를 ‘통 일무’라고 했다. 


“우리 조국은 꼭 통일을 해야 합니다. 이 그림처럼 조국통일이 되는 날이 오면 우리 민족의 동포들이 기쁜 마음으로 춤을 추게 될 것이며, 나는 이러한 작업을 할 때 의무와 기쁨을 함께 느끼고 있습니다.” <'고암 이응노, 삶과 예술', 44쪽, 고암미술연구소 엮음, 얼과알 출판사, 2000년 11월>


이응노는 통일에 대한 열망을 담아 1987년 평양으로 향했다. 평양에서 부인 박인경과 함께 성대하게 개최된 이응노, 박인경 2인 전람회는 북에서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 그의 작품은 남녘 민중의 투쟁을 반영하였으며, 민중의 거세찬 시위가 물결쳐 흐르는 표현과 화면을 지배하는 율동감으로 많은 호평을 받았다.


이응노는 <옥중화 출판에 즈음하여 1985.9>라는 글에서 분단에 대한 안타까운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19년 후인 오늘에 와서 발표한다. 나의 심경은 정말 고통스럽다. 19년의 세월은 흘렀어도 우리 조국은 아직 통일되지 못하였다. 우리가 있었던 서울, 대전, 안양의 옥중에서는 우리와 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지금도 자유를 외치고 있을 것이다. 학생, 교원, 노동자, 종교인 민중 모두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원하며 조국 통일을 외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외친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형태로 박해를 받아왔다. 우리는 옥중에 있었던 과거를 돌이켜볼 때 ‘옥중 그것은 나의 학교’였다고 생각한다. 지금 나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민족통일에로의 념이 크다.” <조선력대미술가편람 244p 리재현 1999년 문학예술종합출판사>


북한 조선미술박물관은 이응노의 1983년 이후 시기 작품을 상당수 소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승리 1985> <군중(조국통일을 위하여) 1985> <군중 1983> <군중 1984> <군중 1985> <군중 1986> <민속춤 1986> <대 1986> <란 1986> <닭 1984> <만수 1986>이 있다.


북한은 그에게 ‘미술작품창작을 통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 통일을 위한 투쟁에 적극 기여했다’고 평가하며 1990년 8월 15일 <조국통일상>을 수여했다. 


파리에 잠든 이응노


독재정권의 탄압을 피해 1983년 프랑스로 귀화한 이응노는 이후 아시아 진보적 화가들과 연대하며 작품세계를 펼쳐나가다 1989년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 지금 그는 파리의 ‘페르 라쉐즈’ 공동묘지에 묻혀있다.


고암 이응노의 묘비

이응노가 바라던 통일이 되려면 얼마나 시간이 더 필요할까. 만약 자유롭고 평화로운 남북이 통일된 그 날이 온다면 이응노 화백은 비록 유해가 된 몸이라도 조국에 묻히고 싶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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