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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Jun 26. 2020

절망을 딛고 승리를 노래한, 혁명시인 리찬

김일성 장군의 노래 작사가 시인 리찬

김장군의 노래


시인 리찬은 1946년, 단 20일 만에 완성된 북조선의 토지개혁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이렇게 격정을 터놓았다.

“신화가 아니다. 전설이 아니다. 여기 북조선의 명백한 오늘을 모―든 불가능에서 가능이 전진한다.”<리찬, 승리의 기록, 문화전선, 창간호, 1946년 7월, 114쪽>


시집 『망양(茫洋)』(1940)에 실린 시인 이찬의 모습 ⓒkrpia

땅 한 뙈기 갖는 것이 소원이었던 조선 시대를 거쳐, 일제 강점기 프로레타리아 운동에서 꿈만 꾸던 전면적인 토지개혁이 이뤄졌다. 토지개혁을 넘어 노동법, 남녀평등법 등 20개 정강이 발표되며 기적이 일어났으니 그 충격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녹화(綠花)되는 영흥 대평야, 전에 없던 전기보일라, 연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공장의 굴뚝 등 눈앞에서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보며 시인은 “너 어서 위대한 이 지역 위대한 이 승리를 기록하야”라고 말했다. <김응교 와세다대학 객원교수, 리찬 시와 수령형상 문학, 현대문학의 연구, 한국문학연구학회, 2001년, 235쪽>


결국 리찬은 기관지 문화전선 창간호에 김일성 장군의 노래의 원작이 되는 김장군(金將軍)의 노래 (1946 리찬 작사, 김원균 작곡)를 발표했다.


북한 문학사에서는 리찬의 창작과정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토지개혁법령이 발포된 순간에는 서정시 새소식을 창작하여 토지개혁 법령 소식에 접한 감격과 흥분을 열정적으로 노래하였고…(중략)…송가를 창작하려는 그의 열정은 1946년 4월 위대한 장군님을 지척에서 뵈옵는 력사적인 날들을 계기로 더 강렬해졌다. 당시 함남일보사에서 기자로 일하던 시인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흥남비료 공장사업을 현지에서 지도하신다는 감격적인 소식을 듣고 공장으로 달려갔다.” <오정애․리용서, 조선문학사․10 ; 해방 후 편 평화적민주건설시기, 사회과학출판사, 1994, 59쪽.>


이 시를 통해 리찬은 <백두산>을 쓴 시인 조기천과 함께 북한 최고 시인이 받는 ‘혁명시인’ 칭호를 받는다.  


카프 문학


리찬은 18살 고교시절 1927년에 열린 조선일보 학생문예 공모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당시 발표한 시 <나팔>은 조숙한 역사의식을 보여준다.


“나팔이 운다 / 나팔이 또 또~운다 / 억지로라도 옛일을 잊으랴만 / 그래도 애끓는 이 회고(回顧) 들었으랴 / 여음이 길이길이 옛 왕성 안에 빙그를 돌 때 / 갈가마귀조차 울고 가는구나 / 오 저 나팔 소리! / 육조(六曹) 앞에 눈물을 끌어내는 저 나팔 소리가 그렇듯 대담하게, 혹은 비장한 목소리로 터져 나오게 하는 것이다!”<나팔, 1927>


리찬은 1929년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 중에 시인 임화 등을 만나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문학 운동에 뛰어들었다. 1932년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화연맹 코프(KOPF)의 조선협의회에서 활동하다가 서울로 귀국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7년 『조선문학』 11호에 실린 시 「눈나리는 堡城의 밤」ⓒkrpia

시월 중순이언만

함박눈이 퍼억 퍽…….

보성의 밤은 한치 두치 적설 속에 깊어간다

깊어가는 밤거리엔 ‘수하(誰何)’ 소리 잦아가고

압록강 굽이치는 물결 귓가에 옮긴 듯 우렁차다

강안(江岸)엔 착잡한 경비등·경비등

그 빛에 섬섬(閃閃)하는 삼엄한 총검

포대는 산비탈에 숨죽은 듯 엎드리고

그 기슭에 나룻배 몇척 언제 나의 도강을 정비코 있나

오호 북만의 심오 도구(道構) 말없는 산천이여

어서 네 크나큰 네 비밀의 문을 열어라

여기 오다 깃들인 설움 많은 한 사나이

맘껏 침통한 역사의 한 순간을 울어나 볼까 하노니   

<눈 나리는 보성(堡城)의 밤, 1937>


리찬의 대표작으로 시집 <대망>(1937)에 수록된 <눈나리는 보성(堡城)의 밤>이다. 함경도가 고향인 시인은 압록강에 삼엄한 일제 경비를 묘사하며 역사의 한 순간에서 고뇌하는 심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리찬 첫 시집 대망 ⓒ2008(주)hwabong

허무와 일탈


사회주의 문학 운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해나가던 리찬에게 시련이 닥쳤다. 리찬은 1932년 11월 일명 ‘별나라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어 구속되어 2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별나라 사건은 일본의 코프 조선협의회 기관지 <우리동무>를 국내에 배포하다 출판법 위반으로 탄압받은 사건이다.


감옥에서 나온 리찬은 고향 함경도 북청에 내려가 어렵게 생활을 이어갔다. 관납상회, 북청문화주식회사(인쇄소)와 양조장 등 일터를 전전하며 홀로 떨어진 그는 점점 허무하고 나약해지기 시작한다.


강한 쇠가 비바람에 녹이 슬 듯이 사람의 신념도 항상 고정불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인은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점점 낭만주의, 감상주의, 허무주의로 빠지게 된다.


시인 이찬의 24살 때 모습. 1933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작성 ⓒ국사편찬위원회


기적도 얼어붙은 북국의 마을

남행차는 용케도 구울러 밤마다 지냈다

들먹이는 창구멍에 거듭 침 바르는

그 처녀의 심사는 무엇이겠느냐

휘연한 차창·차창

미처 그 속의 정경은 식별 못해도 좋았다

다만 그때마다 그는

아련한 남방의 한 개 걸녀(乞女)였어도 가(可)하였나니

기인 긴 겨울

북국은 눈으로 밝고 눈으로만 어둡고

그리운 말방울 기억조차 멀어지는

그 세월과 함께

처녀는 언제까지 소녀가 아니었다

은근히 자랑삼던 머릿채

내 생 처음 밉살스럽던 저녁이 있었나니

뭇 강아지의 벌룩한 코도 도시 오늘을 예각(豫覺)치 못했도다

함박눈 나리는 동구 앞에 무덤이 두 개

어설픈 전설의 무덤이 두 개

순(順)아 그 한 개 적은 무덤의 이름은

그러나 전설도 모르더구나

<북국 전설(北國 傳說), 1939>


리찬의 시집 <분향>(1938), <망양>(1940)이 발간된 무렵부터 사회주의적 색채는 점점 사라지게 된다. 1941년 12월 일제의 진주만 공습 이후 신념이 약해진 리찬은 서서히 친일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결국 리찬은 1944년 태평양 전쟁 당시 징병제 실시를 전후한 시기에 <송 출진학도(送 出陣學徒): 매일신보 1944-01-19 일자 02면 10단> 등의 친일시를 썼다. 일제 강점기 말에 쓴 시로 리찬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친일 작품 수는 희곡 2편을 포함하여 총 8편이 밝혀져 있다.


그도 1년 후인 1945년에 해방될 줄 알았다면 인생의 오점을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재생하는 새로운 삶


북한은 해방 후 철저하게 친일파를 청산했다. 그러나 진심으로 과거를 반성하고 민족의 편에 서려는 사람들은 ‘과거불문’의 원칙으로 과감하게 믿고 내세워주었다. 시인 리찬은 비록  일탈을 하기는 했지만 과감하게 믿고 내세워주어 최고의 시인인 ‘혁명시인’이 되었다.


과거불문의 모습은 리찬의 스승이었던 춘원 이광수의 사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광수는 최초의 근대소설인 무정을 쓴 소설가로 대표적인 친일인사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 폐렴을 심하게 앓던 이광수를 위해 김일성 주석은 전쟁 중인데도 특별열차를 보냈다. 당시 그의 후배인 리찬이 이광수를 데리러 와 함께 북으로 넘어왔다.


부수상을 역임한 홍명희가 직접 이광수를 찾아 치료를 받도록 하는 등 배려했지만 애석하게 만포로 가는 도중 양덕고개에서 사망했다. 북한은 "이광수가 한때 친일을 했지만 생의 마지막에 공화국으로 넘어온 것을 북에서는 귀하게 여긴다"고 평가했다.<이상현, "김일성, 폐렴 앓던 춘원 이광수에게 특별열차 보내", 연합뉴스, 2015.07.20.>


혁명시인 리찬


리찬은 1945년 해방 후 서울에서 ‘조선문학가동맹’의 일원으로 해방기념시집인 『횃불』을 발간하며 다시 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바로 월북하여 함경남도 혜산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함남일보사 편집국장을 맡았다.


그는 1946년 4월에 송시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작사하고 이후 시집 <화원>(1946), <승리의 기록>(1947), <쏘련시초>(1947) 등을 발간하며 북한 정부수립에 큰 기여를 한다. 리찬은 특히 북한 문학에서 중요시하는 수령형상문학의 새로운 단계를 열어놓았다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이후 북조선문학예술동맹 서기장, 조소문화협회 서기장·부위원장, 문화선전성 군중문화국장,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고 1974년 사망해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사후에 그의 시를 모아 시집 <태양의 노래>(1982)가 발간되기도 하였다.


리찬의 생애는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제작된 다부작 영화 <민족과 운명> 카프작가편에서 중요하게 다루었다. 영화에는 주인공 리찬이 일본 유학 후 카프 문인들과 교류 중 스승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을 주장하며 친일을 하고 있음을 알고 그와 결별하고 프로레타리아 문학운동에 나선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함경남도 함흥시에 있는 함남일보사는 2011년 혁명 시인 리찬의 반신상을 건립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2011년 함남일보사 리찬 흉상 ⓒrfa.org

카프작가로 사회주의 이상향을 꿈꾸다 좌절도 맞보고 다시 일어나 승리를 노래했던 시인 리찬.


월북 시인 리찬은 북한에 활동했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남에서는 단순한 친일시인으로 매도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시인 리찬은 프로레타리아 문학사의 중요한 인물로 남과 북의 소중한 자산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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