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삽질 Jul 22. 2020

겸재와 오원의 맥을 잇는 대가, 정창모

몰골 기법을 완성한 월북화가

꼬마화가가 그린 <아침해>


정창모(鄭昌謨, 1931.12.16.~ 2010.7.25.)는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표구를 했고, 외할아버지 리광렬은 문인 화가로 미술 재능을 타고난 그였다. 어릴 적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인 손자는 외할아버지 밑에서 그림을 배웠다. 1938년, 8살에 완산초등학교 시절 크레용으로 그린 <아침해>가 아동 미술전람회에 출품되면서 꼬마화가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집안 살림으로 미술을 계속 배울 수는 없었다. 전북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형의 영향으로 사회정치과목에 열중했고 조선민주학생동맹에 가입해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이승만 정부의 분단과 독재에 대한 반대 운동은 그의 정치적 눈을 뜨게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창모는 전북중학교 민청부위원장으로 활동했고, 빨치산 부대에 입대했다. 후퇴하는 조선인민군과 같이 북행길에 오른 그는 조선인민군에 입대했다. 총탄이 오가는 현실에 직접 뛰어든 그는 전쟁 중에 부대 연극 공연의 무대미술과 군인 미술전람회 출품작을 내며 미술에 점차 발을 다시 들여놨다. <리경수, 운명의 선택2, 평양출판사, 2012>


26살 늦깎이 대학생


미술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한 정창모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7년에야 평양미술대학 조선화과 2학년에 편입했다. 27살에야 전문적인 미술공부를 시작한 셈이다. 10년도 더 늦게 미술 기초를 본격적으로 배웠으니 다른 학생에 비해 실력은 형편없었다.


그는 아무리 따라잡으려고 해도 따라잡을 수 없자 미술을 포기하고 전공을 바꿀 생각도 했다. 10년이 늦었으니 10배의 노력을 했고, 1~2년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꾸준히 따라갈 각오로 그림을 그렸다.


정창모는 굳어진 손목을 풀기 위해 권투를 시작했다. 조선화를 그리기 위해 속도와 힘을 활용하는 권투 기술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교수진의 권고에 의해서였다. 그에게 몰골 기법을 사사해준 화가 리석호도 태권도 유단자였다. 정창모는 권투를 정말 열심히 해 대학 선수로 경기에 출전하기까지 했다.


그는 결국 피타는 노력으로 대학 졸업작품 <배머리에 오신 어버이 수령님, 1963년>을 창작하며 조선화 화단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북만의 봄>, 정창모, 조선화, 108cm x 148cm, 1966년 Ⓒ연합뉴스


북만의 봄


정창모의 대표작은 <북만의 봄, 1966>이다. 항일유격대 여대원이 군마에게 물을 먹이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갈대밭 주변에 휴식하는 항일유격대와 잠깐의 시간을 빌려 험난한 여정을 걸어온 말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여대원의 여유가 돋보인다. 얼음이 채 녹지 않은 초봄이지만 희망을 상징하는 새싹이 나무에 돋아나고 있다. 담담한 표정의 여대원의 모습은 고난에 굴하지 않고 낙관적 미래를 그리고 있다. 조국광복의 봄을 기다리는 항일 유격대원들의 서정적 낙관주의를 깊이 있게 표현한 정창모의 대표작이다.


북한의 미술은 사실주의를 추구한다. 그러나 단순한 사실의 표현이 아니라 사람들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정서적 요소를 중시한다. 주체 문예이론 속에서 풍경화에 대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명한 테제 “자연은 어느 것이나 뜻이 깊고 정서가 차 넘치게 그려야 한다.”를 잘 구현한 대표적인 작가가 정창모다. <박계리 한국전통문화대 초빙교수, 정창모 북한 미술계 서정적 표현의 대가, 통일한국 스케치北, 2013년 5월호>


<북만의 봄, 1966>은 제9차 국가 미술전람회에 출품된 후 수차례 상을 받았으며, 소련과 폴란드 미술전람회에서도 높은 호평을 받았다.


몰골법의 대가


북한 전문 예술잡지 '조선예술' 2000년 3월호에서는 정창모를 ‘20세기를 빛내인 주체미술사와 더불어 조선화(朝鮮畵·동양화 일종)의 전통적 기법을 현대적 미감에 맞게 새로운 경지로 발전시킨 화가의 한 사람, 현대 조선화의 로장’이라고 격찬했다. <이 사람-현대 조선화의 거장 정창모, 매일신문, 2000.05.12.>


정창모는 화가 이석호에게 실기지도를 받으면서 점차 조선화 분야에서 확고한 위치를 잡게 된다. 그는 1975년 북한의 종합 미술창작소인 만수대창작사의 조선화 창작단 풍경화 실장을 역임하며 여러 대표작을 탄생시켰다.


그는 1976년에는 금수산 기념궁전 기념 촬영대에 비치될 <비룡폭포의 가을>을, 1977년에는 <백두산의 봄>과 <천선대의 가을>을 창작해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1989년에는 예술적 재능과 미술작품 창작 성과를 인정받아 인민예술가가 되고 나중에 김일성상 계관인이 된다.


그는 조선화의 몰골기법으로 자연을 그리면서 지나친 사의(寫意)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형사(形似)를 중시하는 창작 관념과 태도로서 조선화 실경산수화의 특색을 잘 보여주었다. <리재현, 조선역대미술가편람,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9, 533p>


몰골법은 동양화 기법으로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붓의 닿는 부분의 색채나 수묵을 그대로 살려 사물의 형태를 그리는 화법이다. 정창모의 작품의 특징은 색감이 부드럽고 은은하다는 것이다. 그는 몰골법을 쓰면서도 단필법을 고집하지 않고 단계적으로 그려내면서 현실의 자연과 미적 이상을 놀랍게도 잘 살려냈다.


일필휘지(一筆揮之)


정창모는 그림을 그릴 때 사색을 깊이 하고 붓을 아꼈다. 그는 풍경을 그리기 위해 묘향산에 올라서 풍경을 그리지 않고 계속 관찰만 했다. 다만 몇 개 붓으로 표시만 남기고 돌아왔다. 산에서 내려와서도 바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그림을 완성한 후 갑자기 붓을 들어 한 번에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러자 한순간에 <묘향산 상원동, 2007>이 화선지 위에 웅장하게 옮겨졌다.


<묘향산 상원동>, 정창모, 64cm x 127cm , 종이에 채색, 2007 ⓒ포털아트


그래서인지 그는 약 3000여 점의 다작을 남겼다. 그의 그림은 사람들에게 널리 유포되었는데 이는 한 점이라도 더 사람들에게 그림을 나눠주자는 그의 소박한 가치관 때문이었다. 북한은 그중 약 100여 점을 국보로 평가하고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덕분에 정창모의 그림은 남측에도 상당히 많다. 2005년 제8회 베이징 국제예술전람회에서 금상을 받은 <남강의 겨울, 1999>이 다음 해 경매로 나오기도 했다.


북 언론은 "조선화 <남강의 겨울>은 조선의 명산 금강산을 배경으로.. 군대와 마을녀성들의 애국의 마음을 오늘도 전하며 흐르는 남강의 겨울 풍경을 현실감과 서정이 풍부한 화폭으로 보여주고 있다"라고 극찬한 바 있다. <김치관, 북남교역, 국제미술전 금상작 '남강의 겨울' 경매, 통일뉴스, 2006.08.26.>


정창모의 생의 마지막 작품 <내금강 보덕암, 2010>은 몰골 기법의 완성을 보여준다. 한 향토사학자는 “이 작품이야말로 겸재나 장승업 조선시대 대가들의 맥을 잇는 작품이다”라고 평가했다. <최상균, 우리문화 북한문화, 1편-북한미술, 한국문화정보원, 2019.06.07.>


전라도인 정창모


정창모는 늘 고향을 그리워했다. 고향에 가볼 수 없었던 그는 통일을 주제로 3부작 그림을 그렸다. 연작 <분계선의 옛 집터> <장벽을 넘어오는 철새> <림진강의 눈석이>에는 ‘전라도인 정창모’라는 서명을 남겼다. 서명에 고향 전주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셈이다.


<장벽을 넘나드는 철새>, 정창모, 71 x 130㎝  50호, 조선화, 2000년 ⓒ중앙매거진


<분계선의 옛 집터>는 휴전선 근처 단란했던 가정의 보금자리였던 집터가 폐허가 되어 버려진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장벽을 넘어오는 철새>는 분단의 장벽인 철조망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모습을 통해 부모 형제도 오갈 수 없는 비극을 그려냈다. <임진강의 눈석이>는 분단의 상징과 같은 강이 되어버린 임진강의 단단한 얼음도 봄날이 오면 녹아내리듯 통일이 봄처럼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형상했다.


그는 분단의 현장 <분계선>에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남겼다.

“분계선. 이 땅의 허리를 갈라 지나간 비운의 철조망 우에 눈보라 싸납다. 허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 노래 부르며 통일의 봄 맞으리.”<박계리 한국전통문화대 초빙교수, 정창모 북한 미술계 서정적 표현의 대가, 통일한국 스케치北, 2013년 5월호>


정창모가 다시 남쪽 땅을 밟은 것은 거의 반세기가 흐른 2000년이 되어서다. 6.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고 두 달 후 8월 18일 짧은 3박 4일의 일정으로 정창모는 헤어진 동생들을 만나기 위해 이산가족상봉 행사가 열리는 서울 쉐라톤 워커힐 호텔을 찾았다.


“춘희야, 남희야. 이게 얼마 만이냐” “오빠, 오빠…” “너희들에게 정말 미안하구나. 그동안 얼마나 맘고생이 심했니”


남측 여동생 정춘희, 정남희 씨를 만난 화가 정창모 ⓒ가톨릭신문


이들은 만나자마자 눈시울을 붉히며 제정신을 잃은 듯 서로를 외쳐댔다. 기나긴 이산 세월을 보상받으려는 듯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감싸 안고 비벼대며 혈육의 뜨거운 정을 나눴다. 그는 먼저 가신 어머니 앞에 죄 많은 자식으로서의 심경을 녹음기에 담았다고 한다. <마승열, 인민화가 정창모-여동생 춘희씨의 3박4일 상봉, 가톨릭신문, 2000.8.27.>


정창모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통일된 조국의 모습을 화폭에 담기를 소망해왔다. 비록 이제 그의 붓으로 통일된 조국의 모습을 그릴 수는 없지만 온전한 그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통일의 그 날이 하루속히 찾아오기를 기원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분단 블랙리스트, 서예 추상의 거장 이응노 화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