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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동 Mar 14. 2016

그와 내가 받은 기회.

기회라는 그 이름. 





그가 말했다. 
 

나도 알아, 우리 집이 어렵고. 
내가 짊어질게 많은 것을. 
그런데, 말이야. 
이기적이게도 나의 행복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어.

 
  S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다. 그가 우리나라 보안업체 중 가장 큰 곳에 입사했을 때 나는 누구보다도 기뻤다. 어머니가 아프셨고, 집에 빚이 있었다. 좋은 기회를 잃고 오랫동안 힘든 시기를 겪은 후의 결과였다. 처음 그에게도 빛이 비치었다. 나는 그의 연수원 수료식에 다녀왔고, 그의 높은 연봉을 그리 질투하지 않았다. 나의 수입이 전혀 없던 그때도, 나는 그렇듯 그를 응원했다. 
 
몇 달이 지난 후,  그가 회사를 그만둔 것을 알았다.  왜 그곳을 그만두었느냐고 한동안 물어보지 않았다.  그도 그 나름대로의 결정을 한 것이었고, 그가 가족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아는 그런 싹수가 노란 놈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나를 만나 삼겹살을 먹던 그날도, 선배에게 따귀를 맞았다고 했다.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하라는 대로 주차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라는 것은, 더욱이. 어느새 나에게 그러한 것은 먼 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어쩌면 그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 
 
실리콘 밸리에 지내면서 ‘기회’를 생각하곤 한다.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유학을 왔고, 도피성이 짙었음에도 우습지만 ‘외국’ 대학을 졸업하게 된다. 지금도 늘지 않는 영어에 답답하면서 그리 열심히 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지만, 적어도 커피를 사며 “꺼퓌”라고 말할 것이다. 
 
 미국에 올 때 나는 어느 성실한 청년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낮에는 공부를 하고 밤에는 편의점에서 일하지 않았다. 그저 도둑놈처럼 미래를 위해 투자해주세요. 라며 부모님께 학비를 내놓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 결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원하는 만큼의 성공을 하면 그 결정은 옳았다고 믿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슬그머니, “그래도 많이 배웠어요” 하고 말꼬리를 흐릴 것이다. 
 
내가 하고 싶지 않아도, 회사에 남는 것이 야근이라 한다면, 나는 하지 않았다. 가고 싶지 않은 술자리를 정 과장에 의해 가지 않았고, 내가 하는 일이 잘 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이 있을지라도, 저 새끼가 시켜서 해야 하는 압박감은 없었다.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의 눈치를 보며 책상 아래에서 메시지를 주고받는 일도.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 회사를 가면서 억대 연봉을 받는 친구와 살았고,  구글에 다니면서 점심은 페이스북에 놀러 가 점심을 먹는 이와 지냈다.  처제의 결혼식에 한 달간의 휴가를 내고 인도로 돌아간 애플에 다니는 그와 금요일 밤 영화를 보았다.  물론 여러 변수에 의해 삶이 변화하고 팀에 의해 그들의 이야기가 달라진다. 애플에 다니던 그는 작은 스타트업으로 옮겨 하루 15시간 이상을 회사에 다녔고, 구글에 다니던 친구는 회사를 나와 집을 팔고 자신의 스타트 업을 준비했다. 허나 많은 이들이, 회사를 지겨워서 못 다니겠다고 말하기보다는 자신의 가슴속 꿈을 찾아 떠나는 이들이 많아 보였다. 
 
실리콘밸리의 삶은 녹록하지 않다. 미국 내 다른 지역에 집을 가지고 있어도 이곳에서 방 한 칸을 가지기 힘들고, 회사가 잘된다고 말해야 하는 그들의 무언의 압박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가 기회를 가졌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내가 만났던 무수한 이들이 내일 짐을 정리할 것이고, 실리콘밸리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 뒤 포브스의 잡지에 나오는 사람은 내가 만났던 “그” 가 될 확률이 높다. 
 
 별 재주가 없는 나는, 내가 생각만큼 쉽게 성공하지 못할 것이고. 한동안 실리콘밸리의 생활에 익숙해져, 한국 기업문화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아마 못하는 취직을 안 한다고 생각하며 다른 길을 찾을 것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운이 맞아떨어져,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있을 때 내가 그 많은 기회가 주어졌고 그저 그중 하나를 사탕 까먹듯이 먹은 것을 까먹을 것이다. 
 

나는 기회를 받았다.



 
 부유하게 살지 않았지만 내일 먹을 밥을 걱정하지 않았고, 가족에게 입금해야 할 돈을 세지 않았다.  그 기회를 놓치는 것은 순전히 나의 ‘잘못’이다.  그래서 내가 그리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나의 잘못이다. 
 
헌데, 
 
많은 이들이 기회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유튜브를 치면 거의 모든 것을 배울 수 있고 온라인으로 MIT 의 강의를 들을 수 있다. 허나


봐 네가 찾는 모든 것을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어. 그리고 그걸 하지 않는 것은 너의 “게으름” 이야.라고 말할 수 없다. 


EBS를 보면 수능을 잘 보는데 왜 그걸 못하니라고 말하는 선생님처럼 말하고 싶지 않다. 
집안의 어려움, 건강의 아픔, 부양해야 할 가족. 많은 장애물 앞에서 많은 이들이 포기를 한다.  
그들에게 넌 노력이 없어서라고 말할 수 없다. 
 
그는 말했다. 
사내답게 눈물을 훌쩍거리진 않았다. 
오늘은 도서관에 갔는데 공부가 되지 않았다고.
나는 그에게 도서관에서 자지 말고 공부를 열심히 해보라는 성의 없는 말을 했다. 
그에게 너의 빚은 어떻게 하려고, 내년에 결혼하고 싶다고 했잖아. 하고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고는 일본어 과외를 받았다. 일본어 과외를 하는 동안 그를 걱정하지 않았다.
꾸준히 하면, 나는 또 일본어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부여받은 ‘기회’는 내 노력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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