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 한 옛날에 어둠의 전설이라는 게임이 있었는데 ...
보통 틀딱들은 모여서 옛날 얘기 하면서 놀죠. 근데 그게 아는 사람이 많아야 재밌죠. 예를 들면 같은 게임을 했던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하며 ‘맞아 그땐 그랬었지’하고, 또 ‘요즘 놈들은 편한 것만 찾아서 못써 쯧쯔 …’ 좀 해줘야 진정한 틀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임 쪽에서는 와우 얘기가 대표적이죠. 소싯적에 자기가 가시덤불 골짜기에서 얼라 도적에게 뒷치기 당하던 호드 뉴비를 어떻게 구했는지, 밸라스트라즈 탱 교대가 꼬였을 때 나서서 극적으로 어떻게 전체 레이드 인원 40명을 전멸에서 구했는지 등등.
그리고 여기, 공유할 사람이 너무 적어 누구와도 얘기 나누기 쉽지 않았던 게임을 즐기던 사람이 있습니다. 접니다. 전 심지어 이 게임의 라이브 서비스 팀에서 일하기도 했었습니다. 게임은 ‘어둠의 전설’이라는거고요. 넥슨에서 1998년도에 서비스 시작한 게임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도 서비스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화석. 살아있는 박물관 같죠.
어둠의 전설은 대단히 인기있는 게임은 아니었기에 어디가서 옛날 얘기를 같이 나누고 싶어도 그럴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아쉬운대로 혼자 쓰는 공간인 여기에 좀 적어보려 합니다.
어둠의 전설은 바람의 나라의 형제 게임입니다. 게임 내부적으로(서버사이드) 많은 것들이 비슷해요. 실제로 doomvas 엔진이라는, 넥슨이 바람의 나라 만들 때 썼던 서버엔진을 그대로 사용해서 그렇습니다. 요새는 어떤지 모르지만 적어도 옛날엔 그랬습니다. 내부에서 바라보면 어둠의 전설은 종종 바람의 나라의 모드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더라고요. 같은 엔진을 공유했던 넥슨의 다른 게임들로는 아스가르드, 일랜시아 등등이 있죠.
어둠의 전설의 특이한 점은, 파티플레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에 굉장히 타이트한 파티플레이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있습니다. 서구권에서 EQ를 중심으로 한 탱딜힐과 어그로 기반의 파티 시스템이 대유행 할 때, 한국에서는 ‘리니지의 솔플이 살 길이다’라면서 파티플레이에 관심 갖는 경우가 드물었거든요. 그나마 기억에 좀 남은게 나이트 온라인. 이게 EQ의 탱딜힐을 그대로 도입한 아마도 국내에서는 첫 게임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파티플레이를 대중화 시킨건 리니지2와 와우죠.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리고 대중화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아무튼 어둠의 전설은 ‘국내 최초의 탱딜힐 형 파티플레이 게임’인 나이트 온라인 이전에 이미 파티플레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EQ의 영향을 받은 어그로×탱딜힐이 아니라 나름 독자적인 모델을 꽤 탄탄하게 구사하고 있었고요.
어그로×탱딜힐 시스템은 물론 대단히 완성도 높은 장치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 시스템의 핵인 어그로가 게임 플레이 중에 눈에 들어오는 요소가 아니라 ‘수치’로서 구사되고 있기에, 직관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거죠. 어떤 몹이 어떤 PC에게 어느정도 어그로를 가지고 있는지 눈에 보이게 표현해주지 않으니까요.
물론 와우 초기부터 애드온을 통해 많은 이들이 이걸 그래프 형태로 보면서 플레이했었고,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요새는 아예 디폴트 UI에서 어그로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긴 하던데, 그럼에도 여전히 ‘숫자’로 이 요소를 다룰 수 밖에 없다는건 아쉬운 일입니다.
이런 아쉬움은 저만의 것은 아니었나봅니다. 원래 블리자드는 와우에서 어그로 시스템을 가지고 오만가지 일들을 다양하게 했었거든요. 밸라스트라즈의 탱커 교대가 대표적입니다. 게임 자체적으로는 보여주지도 않는 어그로 수치를 순서대로 교대할 수 있느냐 하는게 레이드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로 동작했죠. 소위 ‘삼룡이’ 라고 불리웠던 화염아귀, 플레임고르, 에본로크 3대장의 공략 또한 어그로를 다루는 탱커들의 테크닉이 극도로 중요하고요.
오리지널과 불타는 성전을 거쳐 여러 레이드에서 이 어그로를 가지고 다양한 기법들을 구사하던 블리자드도 이게 좀 이상하다고 느꼈나봐요. 리치왕의 분노에서부터는 탱커에게 어그로 키핑이나 교대 역량을 요구하는 공략 방식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탱커가 어그로를 끌고 싶다면 간단한 스킬 한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게 바뀌었습니다. 어그로 시스템의 비중을 대폭 축소한거죠. 그 대신 탱커의 생존이 새로운 화두가 되었습니다만 이건 오늘 얘기하려는 이슈가 아니므로 다음 기회로 넘기고.
아무튼 이렇게 어그로×탱딜힐 시스템은 매우 출중한 발명품이지만 문제점도 있었던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숫자를 다루게 한다. 따라서 직관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라는.
전 애초에 이 어그로×탱딜힐의 발상지인 EQ에서도 일종의 기술적 한계를 디자인으로 극복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었을까하고 의심합니다. 파티플레이라는걸 만들고 싶긴한데, mmorpg라는 환경에서 모든 캐릭터와 몬스터를 충돌체크 한다는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거든요. 그래서 EQ도 와우도 캐릭터 충돌 체크는 지금도 없고요. 충돌 체크가 없으니 몹이 힐러나 딜러에게 가려는걸 탱커가 막을 방법이 없죠. 그래서 어그로라는걸 만들어서 붙잡아둘 수 있게 한게 아닌가하는 …
앞서 얘기한대로 어둠의 전설에도 파티플레이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근데 어둠의 전설은 타일 베이스로 움직이는 게임이었어요. 그것도 헥사곤 뭐 이런게 아니라 격자무늬입니다. 4방향으로만 움직이죠. 몹이건 PC건 모든 캐릭터는 반드시 타일 위에서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건 즉, 가능한 공간의 좌표계가 극도로 단순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계산도 쉬워요. 아무데로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EQ나 와우보다 훨씬 간단한 공간 좌표계입니다.
이러면 충돌체크도 가능하죠. 그래서 바람의 나라도 어둠의 전설도 충돌체크를 실제로 합니다. (리니지 온라인도 그렇고요) 충돌체크가 가능하면 또 뭐가 가능해지냐면, 탱커가 비루하게 어그로 시스템 따위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동료를 보호할 수 있게 됩니다. 몹의 진로를 가로막아서 그렇게 하는거죠. 소위 ‘길막’을 통해서요. 어둠의 전설의 파티플레이는 이런 길막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연약한 클래스들을 강력한 클래스가 앞장 서서 가로막아 보호합니다. 이건 다른 무엇보다도, 시각적으로 매우 이해하기 편합니다. 직관적이죠. 몹이 동료에게 가는걸 막아야 한다! 그러면 길목을 가로막으면 됩니다.
전 지금도 이런 방식의 플레이가 어그로보다 좀더 우월하다고 믿습니다. 혼자서만 쓰는 이름도 붙여주었습니다. ‘어그로 탱딜힐’에 대비되는 ‘블로킹×탱딜힐’ 이라고 … 어그로 시스템에 비해 낫지만 아쉽게도 대중화되지 못한 그런 비운의 게임 메커닉 … 물론 게임 내의 모든 공간이 타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거대한 희생이 필요하기에 대중화가 되긴 역시 어렵겠다 싶긴 하지만요.
어둠의 전설의 파티플레이는 제가 만든건 아닙니다. 제가 팀에 합류했을 때 이미 그런 기반을 가진 게임이었어요. 아마도 초기 개발자인 서민, 정상원, 권순성 … 뭐 이런 분들 중 누군가 만들었겠죠.
어둠의 전설에서 ‘이건 내가 함ㅋ’하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요소는 퀘스트입니다. 그렇습니다. 대중화가 지나치게 많이 된 나머지 이제는 귀찮은 일처럼 여겨지는 바로 그 퀘스트.
지금은 그렇게 되어버렸지만, 그때는 안그랬습니다. 퀘스트라고 하면 이제 웅장하고 거대하고 어떤 그 … 에픽한 이야기와 대단하고 강력한 보상이 따라오는 굉장히 무거운 컨텐츠였죠. 적어도 EQ에서는 그랬었어요. 어둠의 전설을 만들면서 간간히 EQ도 하던 저에게 이 퀘스트라는게 꽤 괜찮아보이더라고요? 마침 서버 개발자분들 중 한 분이 꽤 야심찬 분이라서, 어둠의 전설의 서버엔진인 doomvas에 새로운 스크립트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합니다. 이전에 쓰던게 있긴 했는데 거의 어셈블리 수준이라 다루기가 매우 까다로웠거든요. 근데 이걸 이제 새 스크립트 엔진으로 바꾸면 엄청 편하고 알아보기 좋게 스크립트를 만들 수 있게 되는거죠.
저의 야심은 게임 시작하면 만렙이 될 때까지 모든 구간을 퀘스트로 도배하는 거였습니다. 맞습니다. 나중에 와우가 해낸, 그리고 제가 꼽는 와우가 성공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요소 중 하나인 바로 그것. 하지만 당시에 새 스크립트 엔진을 실무단에서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저 뿐이었고, 어둠의 전설은 99렙 찍기가 쉽지 않은 즉 시간이 엄청 오래 걸리는 게임이었고, 그 시간을 모두 퀘스트로 메우는건 도저히 엄두가 안나더군요. 그래서 일차 목표는 퀘스트를 100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주 6일제였기에 일 할 시간도 많았습니다. 정말 맹렬히 달렸습니다. 퀘스트 100개 가진 게임을 내 손으로 만들고 싶다!
최종적으로 그 목표를 이루진 못했습니다. 중간에 다른 일로 제가 팀을 떠나야 했거든요. 그래도 재밌었어요. 엇비슷한 퀘스트만 계속 나오면 지루하고 짜증나니까 최대한 다양하게 만들려고 몸 비틀어가면서 노력했던게 너무 신났었습니다.
먼저 만들어진 몇몇 퀘스트들이 우선 서비스에 적용되었는데, 유저 게시판 반응이 완전 좋았던게 아직도 또렷이 기억납니다. 사실 지금까지 이 직종에서 일하는 토대는 아마도 그때 유저 게시판에서 경험했던 뽕맛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
아무튼 그랬었습니다. 지난 주말 동료들과 맥주 마시며 얘기 나누다보니 어둠의 전설을 재밌게 했던 유저분이 게임 업계에 들어와 제 동료가 되어있더라고요.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 하다보니 엄청 신났는데, 지금은 이런 게임 기억해 줄 사람도 별로 없구나 싶으니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여기에 적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