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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함이 필요한 이유

생각하지 마라. 생각은 창의성의 적이다. 의식적인 것은 모두 형편없다.

by 유앤나

우리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다.

대기실, 엘리베이터, 신호등 앞. 몇 초의 공백도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낸다.

지루함은 채워야 할 결핍, 피해야 할 문제로 여겨진다.

하지만 지루함을 피하는 순간, 뜻밖의 선물도 함께 놓치는 건 아닐까.


영국 센트럴 랭커셔 대학의 심리학자 샌디 만(Sandi Mann)은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다. 참가자를 두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에는 20분 동안 전화번호부 숫자를 베껴 쓰게 하고, 다른 그룹은 아무것도 하지 않게 했다. 이후 플라스틱 컵으로 할 수 있는 창의적인 용도를 떠올리게 했더니,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지루한 작업을 한 그룹이 훨씬 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냈다. 귀걸이, 악기, 심지어 "마돈나 스타일 브라"까지.



후속 실험은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세 그룹으로 나누어 숫자를 베껴 쓰는 그룹, 전화번호부를 소리 내어 읽는 그룹(더 지루한 작업),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룹을 비교했다. 가장 지루한 작업을 한 그룹이 가장 창의적이었다. 왜 그럴까?



지루함의 복권



뇌과학은 그 이유를 설명한다. 특정 과제에 몰두하지 않을 때 활성화되는 기본 모드 네트워크(DMN)가 자발적 사고를 촉발하고, 멀리 떨어진 아이디어들을 엮어 통찰을 만든다. 최근 연구는 DMN이 창의적 사고와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모든 지루함이 창의적인 것은 아니다. 토론토대 제임스 댄커트는 지루함을 고통에 비유한다. 고통이 몸이 보내는 이상 신호이듯, 지루함은 마음이 보내는 신호다. 문제는 어떻게 반응하느냐다. 바로 SNS를 켜고 스크롤을 시작하면, 그것은 도피일 뿐 창의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지루함을 견디고 마음이 방황하도록 두면, 뇌는 더 넓은 연결을 시도한다.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심리학자 카렌 개스퍼(Karen Gasper)와 브리애나 미들우드(Brianna Middlewood)의 연구도 이를 뒷받침한다. 지루함을 느낀 참가자들이 편안하거나 흥분하거나 고통스러운 상태의 참가자들보다 창의성 테스트에서 더 나은 성과를 냈다.


지루함은 자극이 부족하다는 신호이지만, 동시에 우리를 더 깊은 의미 탐색으로 이끄는 문이기도 하다.



생각하지 마라. 생각은 창의성의 적이다. 의식적인 것은 모두 형편없다.
- 레이 브래드버리, 『화씨 451』



지루함을 견디는 세 가지 방법


1. 작은 공백을 허락하기

줄을 서 있을 때 휴대폰을 꺼내지 않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그냥 서 있는다. 버스를 기다리며 하늘을 바라본다. 단 몇 분의 빈 시간을 즉시 채우려 하지 말고, 그 공백 자체를 경험해본다. 처음엔 손이 근질거리겠지만, 이 작은 연습이 쌓이면 뇌는 점차 고요함에 익숙해진다.


2. 단조로운 활동 속으로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개고, 목적 없이 산책을 한다. 이런 저강도 활동은 DMN을 활성화하는 최적의 조건이다. 몸은 움직이지만 정신은 자유롭게 방황할 수 있다. 많은 창작자들이 산책 중에, 샤워 중에 영감을 얻었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3. 불편함을 받아들이기

처음엔 어색하다. 초조하고, 뭔가 해야 할 것 같고, 시간이 낭비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조금만 견디면, 뇌는 새로운 보상 체계를 형성한다. 즉각적인 도파민 보상에서 벗어나, 더 깊고 지속적인 만족감을 발견하게 된다. 지루함은 견뎌야 할 고통이 아니라, 익숙해져야 할 자연스러운 상태다.



지루함은 빈 캔버스가 아니다. 씨앗이 묻힌 땅에 가깝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그 순간, 가장 많은 것이 자라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그 시간을 지켜보고, 기다리고, 견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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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IT Times에 연재를 시작한 칼럼입니다.

최신 기술의 중심에서, 잠시 ‘끄는 법’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하지만 이건 단지 멈춤이 아니라, 놓쳐왔던 감각, 리듬, 생각,

그리고 나라는 시스템을 다시 부팅하는 작은 실험이기도 합니다.


https://www.koreait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7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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