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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GIPUB Mar 01. 2016

#8. 아름다운 남자 박총

《욕쟁이 예수》를 쓴 대중신학자, 청년들에게 입을 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재질의 옷은 그의 행실로 미루어보건대 분명 친환경 소재임에는 틀림없다. 그 모습 켈트의 땅에서 신의 의사를 전했다는 드루이드를 연상케 할 정도. 하지만 그는 도심형 재속재가수도원 <신비와저항> 원장이자 예수에 관한 신선하면서도 묵직한 통찰이 담긴 《욕쟁이 예수》를 쓴 대중신학자이기도 하다. 그럼 지금부터 아름다운 남자 박총에게 ‘청년들의 진로와 소명’에 관한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집안일 했습니다. 제가 네 아이의 아빠니까, 그게 제 실존의 출발점이다보니 직장 생활하는 ‘안해’와 살림과 육아를 해왔습니다. 사역으로는 ‘신비와저항’이라는 도심 속 수도원을 2년 반 정도 꾸려가며 대안적 목회를 실험하고 있고요, 밥벌이로 글쓰기교실을 꾸리고 순회 설교 및 강연을 다니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소명을 따르라고 말하고, 청년들은 취업현실을 고민하는데요. 양자 사이에서 청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 청년들 대부분이 이 사회와 가정, 교회의 요구에 맞춰 살아오느라 내가 누구인지 잘 몰라요. 아는 것도 많고 참 똑똑한데 가장 중요한 지식, 즉 자신에 대한 앎이 없는 거죠.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잘하는지도 모르고, 무엇이 내 가슴을 뛰게 하는지도 모르는데, 소명이 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제가 전하는 메시지 중에 “스타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강의가 있어요. 스타일, 취향, 개성 같은 건 한 사람의 영성, 육체성, 감성, 사회성, 심미성, 인격성 등이 한 데 어우러져 형성되는 거예요. 습득의 관점에서 보자면 오랜 세월 갈고 닦아야 하는 겁니다. 불행하게도 한국에는 그럴 여건과 여유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세계 어느 나라보다 유행에 휩쓸리는 일이 많지요. 소명을 논하기에 앞서 내가 누군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럼 자신을 알기 위해 무엇을 하는 게 좋을까요.


주어진 여건이 만만치는 않겠지만, 할 수 있는 한 자유롭게 살아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교회 안팎에 엄청나게 많은 당위가 있잖아요. 이를 테면 좋은 직장을 얻어야 한다, 결혼을 해야 한다, 순종하는 청년이 되어야 한다, 등 이런 모든 종류의 규범과 초자아를 의심해보세요. 비딱한 문제제기도 해보고, 위험하다고 여기는 책도 읽어보고, 미칠 듯이 사랑도 해보고, 금기를 깨뜨리고 사고도 쳐보세요. 특별히 돈이 안정감을 준다고 믿는 신화를 의심하고, 이를 거스르는 모든 행동을 강추합니다. 돈 없어도 훌쩍 여행도 떠나보고, 아낌없이 자신을 내주세요. 한 번도 제 몸과 소유를 던져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무슨 소명을 말합니까. 무엇보다 약하고 고통 받는 이들과 연대하길 권합니다. 진정한 소명은 바로 이 대목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언뜻 취업엔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하, 그렇지 않습니다. 먹고사는 일이 얼마나 귀하고 거룩한 일인데요. 보통 소명이라고 하면 생계와는 관계없이 순수하게 영적인 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야말로 그릇된 이원론 신앙의 병폐입니다. 헌신을 결단하고 실천하는 청년들을 보면 참 귀하지만 부모에게 의존하고 있는 동안엔 그게 그리 어렵지 않죠. 그래서인지 뜨거운 청년들일수록 헌신과 소명을 읊어댑니다. 미안합니다만 단 한 번도 삶의 무게를 제 스스로 고스란히 받아낸 본 적이 없으면서 고상한 말을 반복하는 걸 전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경제적 , 사회적으로 독립해서 제 인생을 책임져보고, 나아가 제 몸의 열매로 태어난 아이를 키우느라 온갖 부담감을 눌리면서도 그때에도 변치 않고 돈과 안정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소명이 먼저라고 말하고 살아갈 수 있느냐가 중요한 거죠.


먹고사는 일이 대단히 영적이고 하셨는데, 자세히 들어볼 수 있을까요.  


먼저 영성은 왕의 길(via regina)이 아닌 노동의 길(via laborosa)이란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우리 인간은 종신토록 수고하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땅의 소산을 거둘 수 있다고 했거든요. 끔찍하도록 지겨운 노동을 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인간의 으뜸가는 실존입니다. 그게 단지 저주일까요. 그걸 은총의 측면에서 볼 수는 없을까요. 모든 영성과 소명의 논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통과하고 일상의 책무를 묵묵히 감당하는 그 속에서 사람이 파괴된 인간성이 회복된다고 믿습니다. 인간됨을 회복하고, 신의 모습을 닮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일상의 책무입니다. 먹고사는 괴로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동료 인간들의 고통을 긍휼할 수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이 공감할 수 있고 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전도와 선교도 여기에서 비롯될 수 있다고 봅니다.




청년들을 위해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방금 말했듯이 교회가 먼저 믿지 않는 사람들과 공통기반을 가지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꾸 우리들의 특수성만을 이야기하려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세상과 어우러지지 못하고 교회 안에 함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엔 대학가기 힘들고, 취업하기 어렵고, 먹고 사는 게 힘들다. 거기서 비그리스도인들과의 공동체 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대학에 척척 붙고 취업에도 만사형통일 수 없잖아요. ‘먹고살기 힘들다.’라는 공통기반 위에서 나에게 신앙은 뭐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뭔지 고민해야죠. 현 세대에 나의 또래 청년들이라면 교회 안이건 밖이건, 2,30대들이 겪는 고통들은 다 비슷해요. 그 아픔을 충분히 나누는 가운데에 하나님의 뜻과 우리를 향한 소명을 모색해봐야죠.


그렇다면 이 시대 청년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첫째, 남들이 다 가는 넓은 길로 가지 마세요. 다들 안정감의 추구에 목을 매는 현실 속에서, 도리어 ‘거룩한 불안정성’(holy insecurity)을 나의 안정감의 근원으로 삼아보세요. 본토 친척 아비 집이라는 삶의 안정된 기반을 버리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던” 아브라함의 그 불안한 걸음을 자신의 걸음으로 삼으십시오.


둘째, 세상의 가치를 뒤집는 교회공동체를 이루어가세요. 무릇 교회란 세상의 가치가 전복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부자와 잘 생긴 자와 성공한 자와 많이 배운 자들이 세상에서처럼 교회에서도 여전히 높임을 받는다면, 빈자와 못난 자와 실패한 자와 가방끈 짧은 이들이 세상에서처럼 교회에서도 루저와 잉여가 된다면, 그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전 12:22, 23)는 곳이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몸된 교회는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사람,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사람, 사회 어디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세상 어디서도 쉴 곳을 찾지 못한 사람이, 다른 누구와의 비교됨 없이 참된 영혼의 안식을 찾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만큼은 누구에게 어찌 보일까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자유롭게 존재하고 존중받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누구나 바라는 소비수준을 내려놓고, 단순하고 소박한 자족하는 삶을 살아가세요.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패배자입니다. 저는 올 봄에 “꽃이 피는데 무얼 더 바라겠습니까.”라는 말을 많이 해왔어요. 더 많이 벌고 사야 행복하다는 악마의 속삭임을 “I am enough!"라는 복음의 주문으로 물리치세요.넷째,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6절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상류층 사람들 사이에 끼려고 하지 말고, 도리어 낮고 천한 이들과 즐거이 사귀라.”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가난한 이를 편애하십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며 선포했던 말씀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려고 할 때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습니다. 약자들과의 연대가 없다면 우리의 예배, 봉사, 교제가 참된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약자들과의 연대가 구제를 뜻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구조적 모순과 사회적 불의를 고쳐나가기 위해 ‘투쟁의 영성’을 키워가는 것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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