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회사를 그만뒀다는 소리에 친구가 말했다. "야, 너는 회사를 3년 이상 못 다니냐?" 웃자고 한 소리였겠지만 머릿속을 띵, 하고 울렸다. 근데 정말 그랬다. 첫 회사에서는 약 2년, 두 번째 회사는 3년을 좀 못 다녔다. 첫 번째 회사에서도 그랬지만 두 번째 회사에서의 일과 분위기에 익숙해질 무렵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과장, 차장, 부장들은 어떻게 이 회사에서 10년, 20년을 버텼을까. 이 일을 하면서. 무슨 재미로. 무슨 낙으로. 나는 쭉 해외영업을 담당해왔는데 그나마 내가 정상적인 회사원 인양 코스프레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종종 있는 해외출장과 영어를 쓴다는 점 때문이었지 그러지 않았다면 아마 애 진작에 그만뒀을 것이다.
부끄럽지만 무언가를 꾸준히 해본 적이 없다. 나의 길지 않은 회사생활처럼 말이다. 대학원을 가고 싶었는데 원하던 학교들이 다 떨어지며 '아마 난 안될 거야'라는 생각이 들어 취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4학년 무렵 남들 다 취업 준비할 때 나는 취업 생각이 없단 소리를 주기도문처럼 외우고 다녔다. 그럴싸한 계획도 없었으면서 말이다.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지만 기자나 PD를 해볼까 하고 준비했던 적도 있다. 역시 시험에 광탈해서 포기했다. 그럼 로스쿨은 어떨까 하고 LEET도 풀어보고 입시전형도 알아봤지만 나의 낮은 학점- 외우기도 쉬운 3.69-과 괴기스러운 시험 난이도에 질려 역시 포기했다. 인턴을 했던 공기업에 들어가고 싶어 1년여를 준비해 시험을 봤으나 역시 탈락. 누군 3번의 고배 끝에 마침내는 입사를 해내던 그 회사에 나는 한 번의 시도만에 맥이 탁 풀려 그만뒀다. 이십 대의 나에게 포기란 배추를 세는 단어가 아니라 나의 일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고기도 먹던 놈이 먹는다고 포기도 해본 놈이 하는 걸까.
그런 나에게도 일생 동안 꾸준히 해오는 것이 있다. 바로 독서와 글쓰기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는 도서관과 서점이다. 대학생 땐 다 읽지도 못할 책을 가득 빌려 책장에 꽂아놓곤 뿌듯해했다. 읽지 못할 책을 사고, 빌리는 것은 아내가 싫어하는 나의 악취미(?) 중 하나다. 토론토에 머무른 지 3개월쯤 되었을까. 남들은 향수병이 생긴다는 데 나는 무엇보다 모국어의 글맛이 사무치게 그리워져 어렵게 어렵게 김연수의 신간과 시집 몇 권을 구해 읽기도 했다. 의식주만큼이나 나에게 중요한 것이 독(讀) 일만큼 난 읽어야 살 수 있는 사람이다.
나의 글쓰기의 연원은 언제부터인지 딱히 특정할 순 없다. 여느 작가들의 유년시절처럼 백일장이나 교내 글짓기 대회를 휩쓸어 본 적도 없다.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아마 대학생 때부터였던 것 같다. 인터넷 문화나 SNS 서비스가 발달되면서 사이트든, 게시판이든, SNS 같은 곳이든 쓸 곳은 널려있었다. 대학생이 정치의식과 자의식 과잉이었던 나는 싸이월드나 페이스북에 어쭙잖은 글을 끄적였다. 김연수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읽으며 아주 잠깐 작가가 되는 공상을 해봤지만 단편소설이든 장편소설이든 진득하게 이야기를 끌고 나갈 힘이 나에겐 없었다. 포기는 눈보다 빨랐으니까. 그렇지만 이곳저곳에 끄적이는 내 일상과 이런저런 일에 대한 소회를 적는 것은 나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재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곳저곳에 올린 글들에 재밌다는 리플이라도 달리면 뿌듯하기도 했고, 신이 나서 속편을 쓰기도 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글을 쓰는 주체는 사실 손이나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고 글 자체다. 엉덩이를 붙이고 의자에 앉아 뭐라도 적기 시작하면 글이 나오고, 그 글이 나도 모르는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경우가 있다. 어쩌면 그 순간의 쾌락-글 뽕!-을 위해 쓰는 건지도 모른다.
종잡을 수 없는 나의 직업생활을 제외하고 나니 내 청춘은 뭐라도 읽고, 뭐라도 쓰는 삶이었다. 수없는 포기의 경험과 이사, 울퉁불퉁한 사회생활은 따지고 보니 내 글감이었고 얘깃거리가 아닌가. 그래서 이제는 방향성을 갖고, 조금 더 진득하게, 뭐라도 읽고, 뭐라도 쓰는 삶을 살려한다. 이 매거진은 그 기록을 남기는 곳이며,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글들을 한데 모으고 다듬는 곳이 될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언젠간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 되뇌던 문장이 있다. 그 문장으로 마지막을 갈음하고 싶다.
그러므로 쓰라. 재능으로 쓰지 말고, 재능이 생길 때까지 쓰라. 작가로서 쓰지 말고, 작가가 되기 위해서 쓰라. 비난하고 좌절하기 위해서 쓰지 말고, 기뻐하고 만족하기 위해서 쓰라. 고통 없이, 중단 없이,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진 세계 안에서, 지금 당장, 원하는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날마다 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