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의 위로 11
얼마 전, 할머니의 기일이라 산소에 들렀다. 할머니는 내가 영원히 이별한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내 꿈에 나와 주신 분이었다. 산소에 들렀다 돌아오면서는 갑작스럽게 떠나보냈던 그가 생각났다. 할머니처럼 그를 꿈에서라도 만나보고 싶었는데, 그는 한 번도 나와 주지 않았었다.
"누나, 소식 들으셨어요?" 처음에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게 우리가 종종 떨곤 하는 너스레라고 생각했다. 정말 죽겠다, 이제 너 죽었다, 죽고 싶다 같은. 그래서 나는 잠시간 '도대체 무슨 사고를 쳤길래 죽었다는 말까지 나오나' 하고 바보같이 고민했다. '돌아가셨다'는 표현을 썼더라면 달랐겠지만 그에게는 그런 표현을 쓸 수 없었다. 23살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을 친구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나도 같은 표현을 써야만 했고, 죽었다고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죽음은 그렇게 생경하며 갑작스럽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할아버지 할머니들 사이에서 유별나게 이질적인, 미처 준비되지 못한 그의 영정사진 속 어린 얼굴을 보았을 때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온라인 메신저로 대화를 주고받던 이였고, 아직까지 그는 핸드폰 속 친구목록에 멀쩡하게 존재하고 있다. 진짜로 그가 죽은 걸까?
장례식장에서는 하도 많이 울어 눈이 퉁퉁 부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럼에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뜻하지 않게 만난 친구들과 소식을 주고받으며 수다를 떨다 보니 주인공이 오지 않은 생일잔치인 것만 같았다. 어떻게 오랜만에 만나도 이런 데서 만나냐. 다음번엔 다른 데서 만나자. 고인과의 작별은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나는 친구들과 작별하고 장례식장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는 후회만 밀려왔다. 메시지 답장 조금 더 빨리 해줄걸. 부탁한 것들도 군말 않고 해줄걸. 연락 한번 먼저 해볼걸. 저번 모임 때 나갈걸. 그때 봤으면 마지막으로 얼굴 봤을 텐데. 그가 죽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후회들을 하나씩 세어보며 문득 나는 스스로가 위선적으로 느껴졌다. 장례에 대해서 한 학기 내내 수업을 들은 적도 있었는데, 나름대로 이제 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실제로 닥친 죽음 앞에서 나는 마치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갓난아이 같았다. 어떻게 애도해야 할지 모르는 위선적이기만 한 아이.
이렇게 예상치 못한 죽음이 가져다주는 슬픔과 애도와 고통은 늘 남겨진 사람의 몫이다. 유가족과 친구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이전에 누군가에게 배운 대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이다. 그 이상한 섭리와 깊은 슬픔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이 없다.
길게는 몇 년을 철저히 준비하고 기다리는 결혼식과 달리, 언제 올지도 어떻게 올지도 모르는 우리의 장례식은 그렇게 늘 생경하고 어색하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도 산 사람들은 똑같이 사는 모양이다. 그 날, 나는 사람이 죽었다는데 이게 다 대수냐 싶어 하던 일을 제쳐두고 장례식장으로 급하게 갔지만, 죽음을 마주한 후에도 저녁으로는 뭘 먹을까 고민했었다. 인생이라는 건 정말 모순인가 보다.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가 전혀 없는. 다들 언제 죽을지도 모르면서 영원히 안 죽을 것처럼 군다.
이제는 나름대로 다 큰 체하며 짐짓 죽음 앞에서도 요동하지 않는 어른처럼 굴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마주해야 할 수많은 죽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는 언제나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다가 도착할 인생의 종착지 역시 나의 죽음이라니, 삶에는 생각보다 가까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어느새 11월, 모든 생명이 움츠러들고 사그라드는 겨울이 왔다. 하지만 그 잠깐의 차디찬 죽음을 겪고 나면 곧 생명을 피어오르게 하는 봄이 찾아올 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그림자 아래서도 사람들은 다시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가 보다.
떠나간 이들을 추모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