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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얀나 May 26. 2019

파리로 가는 길

무채색의 위로 13


  어떤 날, 영화를 예매하고 시간에 맞춰 달려갔는데 상영관 입구에서 내 체크카드가 없어졌다는 걸 알았다. 그걸 알아챈 순간 너무 놀라서 손이 후들거렸다. 돈도 돈이지만 늘 철저한 내가 그런 실수를 했다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허둥지둥 카드사에 전화해서 분실신고를 해놓고선 복잡한 마음으로 예매해둔 ‘파리로 가는 길’ 이라는 영화를 봤다.

 

 영화는 파리에 가기로 했으니 얼른 파리로 가야만 하는 여자와 파리는 어디 가지 않으니 먹고 즐기고 쉬면서 가도 된다는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영화의 영어 제목은 ‘Paris can wait(파리는 기다릴 수 있어)’이다) 운전을 해서 태워주겠다고 고집하는 남자 덕에 여자는 파리행 비행기 티켓을 끊는 대신 자동차에 오른다. 그리고 여자는 비행기를 탔더라면 겪지 않아도 되었을 많은 일들을 겪게 된다. 남자가 자꾸만 맛있는 음식을 맛보라고 권유하거나 관광지에 들르는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자동차까지 고장 나 버리는 바람에 몇 시간이면 충분했을 여행은 며칠짜리의 긴 여행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여자는 이상하리만큼 여유를 부리는 남자가 처음에는 못마땅하지만 점점 잊고 살았던 것들을 마주하며 여행을 즐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영화 말미에서 남자가 보낸 초콜릿을 깨물며 웃게 된 여자를 보며 나 역시 ‘그래, 인생길 뭐 급하고 곧게만 달려갈 필요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수도 하고 즐기기도 하고 가끔은 여유도 부리면서 낭만으로도 살아야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가는 길이 중요하다고, 제목이 파리로 가는 길이라면서 정작 파리의 풍경은 나오지도 않은 영화가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 카드 좀 잃어버릴 수도 있지. 경험으로 생각하자고 다짐한 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간 안내데스크에서 나는 누군가 주워놓은 내 카드를 되찾았다.

 

 얼마 전부터 새로운 일을 하게 되었다. 기쁘기만 한 마음으로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 이 시점에 이런 곳에서 이런 일을 한다는 건 내 장기적인 인생 목표와는 큰 관련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일을 하며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아도 되었을 재미있는 일들 또한 겪게 되었다.

 

 이전에 지금 일하고 있는 건물을 지나다닐 땐, 이맘때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건물을 보며 ‘도대체 저 멋진 장식은 누가 해 놓는 걸까’ 하고 생각했었다. 입사한 첫날 내 담당 업무에 건물 크리스마스 장식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는 웃음이 나왔다. 나는 내 집에서도 해보지 않은 크리스마스 장식을 이렇게 큰 건물에서 기획하는 담당자가 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일자리를 새롭게 구하다 보니 사는 곳 역시 직장 근처로 새롭게 구했는데, 내 옆자리에는 벨기에 사람이 들어와 함께 살게 되었다. 나는 내가 벨기에인과 매일 같은 방에서 잠에 들고 눈을 뜰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침마다 내가 ‘잘 잤어요?’라고 묻는 말에 한국말에 서툰 그녀가 ‘네, 당신은요?’ 하고 되묻는 걸 들을 때마다 영화 속 그녀가 초콜릿을 깨물며 웃은 것처럼 나 역시 미소를 띠게 된다.

 

 영화를 봤던 그 날로 되돌아가, 분실신고를 해지하고 올라탄 버스에서 나는 일부러 내릴 곳을 지나쳐 종점까지 갔다. 목적만을 위해 행동하던 내가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목적을 달성하는 걸 잠시 잊고 그렇게 예상치 못하게 살아가는 일이 무척이나 즐겁다는 것을 배웠다. 막상 종점에서 내려서는 어떻게 다시 돌아가야 하는지 몰라 허둥댔지만, 그것조차 추억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날 배운 삶의 자세를 견지할 생각이다. 어딜 가든 도착하는 것보다는 가는 길이 더 중요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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